사무엘상 강해

강해 12

푸른 섬 2008. 1. 22. 00:08
 

신경쓰지 마세요.

사무엘상5장6-12

살면서 일이 잘 풀릴 때가 있고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일이 잘 안풀릴 때 그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것입니다.


잘 안 풀리는 이유를 생각해 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행위를 어떻케든 고쳐봅니다.


새벽기도를 열심히 다니든지, 아니면 말씀 묵상을 열심히 하든지, 아니면 구제를 열심히 합니다.


헌금을 열심히 합니다.

이전에 어려운 일이 없을때 보다 더 열심을 냅니다.


그래서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지금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순탄한 길로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흔히 이러한 시도가 성공했다고 간증을 하고, 그렇게 설교를 하면서 가르칩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것이 만일 이런 것이라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우리는 바보가 됩니다.


모든 것이 우리 행동여하에 따라 결정이 나는 판에 주님되신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주님이라는 말은 그야 말로 그분 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신데, 우리의 행동에 따라 주님의 일하심이 좌지 우지 된다면 그것이 어떻게 주님이라고 불릴 수 있습니까?


바울을 부르시고 가게 하시고 복음을 전하게 하신 분은 주님되신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좀 이런 주님을 믿고 살수 없느냐는 것입니다.


일이 잘된다 안된다의 기준을 자꾸 땅의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호들갑을 떨고 있습니다.

난리가 났지요.

전쟁에서 승리 했을 때에는 그보다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어떻습니까?


자신의 신들의 목이 잘리고 손목이 잘리는 상황에다가 아스돗 사람들에게 독종의 재앙이 내렸습니다.

완전히 망할 지경이지요.

그러자 저들이 뭐라고 합니까?

이스라엘 신의 손이 우리와 우리의 신 다곤을 친다라고 말하면서 블레셋 방백들을 모아 의논을 합니다.


그래서 그 의논의 결론으로  여호와의 궤를 가드로 옮깁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손이 큰 환난을 그 성에 더하게 하셨습니다.


성읍사람의 큰자나 작은 자 모두에게 독종이 나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다시 에그론으로 여호와의 궤를 보냈습니다.

그러자 에그론 사람들이 죽는다고 발악을 합니다.


권력의 힘이 아스돗보다 가드가 그리고 에그론이 약하여서 이렇게 여호와의 언약궤가 옮겨졌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자신들의 신이 이 지역에서 특히 더 강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지 지금 난리가 났습니다.

에그론 사람들이 부르짖습니다.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고 합니다.

온 성이 사망의 환난을 당하였고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습니다.


그러자 이들은 여호와의 궤를 본처로 돌려 보내어 죽임을 면하자라고 의견을 모읍니다.


어쩌면 이렇게 언약궤를 빼앗긴 이스라엘이나 이들이 똑 같은 생각을 합니까?

무엇이 저주이며 무엇이 축복임을 전혀 알지 못하는 인생들이지요.


당장 자신들에게 독종이나 사망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곧 복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저주임을 저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들의 방법은 복의 근원되신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 돌려보내는 방식을 택합니다.


그렇다면 이전엔 이들에겐 저주가 아니었습니까?

하나님의 저주가 없었습니까?


있었지요.

언약궤를 모르고 사는 것이 저주받은 인생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합니까?

자신들의 몸에 불길한 일들이 일어나니 그것을 오히려 저주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주를 없애는 방법은 언약궤를 제거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 중에 이런 불신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앞서 제가 서론 쪽에서 말씀 드렸듯이 불길한 일, 안좋은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하면 이 일에서 피해볼까?


내가 무엇을 하나님께 잘못했길레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가?

기도하고 성경보고, 착하게 살아보고 등등 난리 법석을 떨지요.


믿음이라는 것은 이런 것과 전혀 상관없는 일인데도 말입니다.


언약궤가 있음으로 인해 죽음이 일어나면 그래 맞아 나는 죄 때문에 죽는 것이 당연해 라고 생각하면 될 터인데, 본래 저주받은 인생이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축복받은 인생이라면 십자가 지신 주님 안에 있는 인생이야말로 나의 몸에서 일어나는 것을 신뢰하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이 이루신 일을 믿는 인생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두고 축복과 저주를 나누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언약궤는 죄를 용서하고 주님과 화목케 하는 것인데, 이들은 자신들에게 무엇인가 불길한 일을 준다고 하여 오히려 적극적으로 거절하는 모습.


이것은 곧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대한 모습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예수님은 자신들의 자리를 방해하는 자라고 간주하여 어떻게 합니까?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지요.


그리고 유대인들에게는 이 십자가가 미련한 것이고, 이방인들에겐 이 십자가가 거리끼는 것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얼마나 이 말씀이 딱맞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십자가를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속을 들여다 보면 십자가 믿는 것이 마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블레셋 사람들처럼 믿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정말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고, 거리끼는 것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어도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삶을 바라지요.

십자가 지신 예수님처럼 죄인취급받는 것은 절대로 자신에게 일어나면 안됩니다.

바울 처럼 죽는 것도 서대반처럼 죽는 것도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에게 일어나면 그것이야 말로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참으로 오늘날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 되어 버렸고, 거리끼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대표적인 세계가 목사들의 세계인데, 개척교회에서 성도들을 얼마나 모았나로 성공과 실패를 나누어 버립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내가 얼마나 바뀌었느나, 내 몸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로 결판이 납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미련하고 거리끼는 것이니까 저리 집어 치워라고 합니다.


왜 자꾸 말씀대로 가르치려고 하느냐.

세상 물정을 알아야 하지 않느냐라는 것이지요.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아직도 바울이 가르치는 복음을 가르치느냐는 것입니다.


얼마나 예수님의 말씀이 딱 들어 맞는지 모릅니다.


쫄딱 망하면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일이 잘 풀리면 주님이 도와 주시는구나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이야 말로 마귀에게 속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쫄딱 망하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저들은 모릅니다.


그러면 일이 잘 풀리면 저주입니까?

꼭 이렇게 묻는 자들이 있는데, 불레셋 보세요.

잘풀리는 것도 저주가 아닙니까?


언약궤 중심으로 보지 않고 자신에게 일어난 일 중심으로 보니 자꾸 마귀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복은 십자가 복음을 믿는 것이 복입니다.

그러나 한국 코메디 중 까다로운  변선생에 나오는 대사처럼 신경쓰지마시기 바랍니다.


내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신경쓰지 않는 복받은 인생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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