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강해

강해19

푸른 섬 2008. 4. 3. 11:35
 

사울의 모습

사무엘상9장1-14

본문에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 될 사람이 등장합니다.

일단 외형적으로는 왕의 자격이 될 만한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듯 합니다.

2절을 보면, 그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께 위는 더 하더라.


어떻습니까?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 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라는 말을 보니, 누가 보아도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진다면 왕으로 세워지는데 부족함이 없어보입니다.


이렇게 사울의 모습을 묘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사울은 무슨일을 하고 있습니까?

철저하게 개인적인 일에 치우쳐 있습니다.


아버지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버지가 암나귀들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사울은 암나귀를 찾기 위해 에브라임 산지와 살리사 땅, 사알림 땅, 베냐민 사람의 땅으로 다녔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명을 따라 개인적 재산을 찾기 위해 얼마나 열심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걱정하실 것 같다는 생각에 암나귀를 찾지 않고 돌아가려고 합니다.


효성이 뛰어난 아들이라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준수함, 부지런함, 효성과 열심 이런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왕이 되어도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하는 왕이란 이런 왕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봅시다.

돌아 가자라고 할때 사환이 뭐라고 합니까? 사환이라 종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성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다고 하면서 그 사람에게 물어 보자고 합니다.


아마 소문을 들었든 모양입니다.  그가 말한 것은 반드시 다 응하나니 그리로 가사이다 그가 혹 우리의 갈 길을 가르칠까 하나이다.


그런데 이 말에 대해 사울이 뭐라고 합니까?

안된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7절에 보면 우리가 가면 그 사람에게 무엇을 드리겠느냐라고 말합니다.

우리 그릇에 식물이 다 하였으니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릴 예물이 없도다 무엇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사환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 손에 은 한 세겔의 사분의 일이  사분 일이 있으니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려 우리 길을 가르치게 하겠나이다라고 합니다.


표현이 어떻습니까?

6절 하반부에 보면 혹 우리의 갈길을 가르칠까 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뭐라고 말합니까?


은 한세겔의 사분의 일이 있으니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려 우리 길을 가르치게 하겠나이다라고 하죠.


오늘날로 말하면 복채가 있으니 하나님의 사람이 자신들이 찾아야 하는 암나귀들의 행방을 알려 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는 모습입니다.


이런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사기를 좀 봐야 합니다.

사사기 17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그 어미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일천 일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취하였나이다 어미가 가로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미가가 은 일천 일백을 그 어미에게 도로 주매 어미가 가로되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 차로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돌리리라 이마가 그 은은 어미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미가 그 은 이백을 취하여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 이 사람이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또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제사장을 삼았더라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셨더라 유다 가족에 속한 유다 베들레헴에 한 소년이 있으니 그는 레위인으로서 거기 우거하였더라 이 사람이 거할 곳을  찾고자 하여  그 성읍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서 행하다가 에브라임 산지로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매 미가가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로부터 오느뇨 그가 이르되 나는 유다 베들레헴의 레위인으로서 거할 곳을 찾으러 가노라 마가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거하여 나를 위하여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식물을 주리라 하므로 레위인이 들어갔더니 레위인이 그 사람과 함께 거하기를 만족히 여겼으니 이는 그 소년이 미가의 아들 아들 중 하나 같이 됨이라 미가 가가 레위인을 거룩히 구별하매 소년이 미가의 제사장이 되어 그 집에 거한지라 이에 미가가 가로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


어떻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자신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신입니다.


훔쳐간 자에 대해 저주를 내렸다고 자신의 아들으로 드러나니 여호와께로부터 복받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신상도 만들고 여호와께 예물도 드리고.


또한 자기들 마음대로 아들 하나를 제사장으로 세웁니다.

에봇과 드라빔도 말들고. 에봇은 제사장 옷이고, 드라빔은 우상입니다.


자신들 가정에 복받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취할수 있는 행동은 다 취합니다.


그러다가 레위인이 미가 집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곧장 제사장을 교체합니다.

자신의 친 아들이 제사장 흉내를 냈다면 이제는 진짜 레위인이 자신가정의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심리적으로 얼마나 푸근하겠습니까?


제사장만 있으면 여호와의 복이 임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레위 자손이 제사장을 하니까 어느정도 더 구색을 제대로 갖춘 것입니다.


10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미가가 그 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거하여 나를 위하여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식물을 주리라 하므로 레위인이 들어갔더니”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자신들 개인적 복을 받기 위한 제사제도로 전환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레위인도 자신의 본문을 잊어버리고 만족해 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 사명을 받은 자가 아니라, 돈받고 설교하는 목사, 삯군 목사와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철저하게 복을 빌어주고 자신은 복채, 즉 돈만 챙기는 자들입니다.


13절을 봅시다.

“이에 미가가 가로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리 하니라.”

이게 바로 레위인을 자신의 가정집 제사장을 삼은 이유입니다.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과 너무 똑같죠?

복받기 위해서 목사를 열심히 섬기고, 예배당을 수백억  들여서 짓고. 아끼지 않고 다 바칩니다.

복을 받는다면 성경의 어떤 말씀도 이용할 준비가 되었습니다라는 입장입니다.


여러분 상상이 갑니까?

어떻게 감히 율법 말씀을 이렇게 이용할 수 있을까요? 이런 의문이 들죠/

그런데 이게 인간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요?

사울과 그 사환이 사무엘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돈만 주면, 복채만 드리면 선지자가 갖고 있는 능력을 자신들을 위해 기꺼이 사용해 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과 사환이 예물에 대해서 이야기 한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이 조금 이해 되시지요.


사울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어떻습니까?

암나귀를 부지런히 열심히 찾는 그 모습이 사사기 17장과 클로즈업 됩니다.

그러니 사울의 신앙이란 이스라엘의 가장 부패한 모습의 대표자로 나타납니다.


겉모습은 왕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이고, 열심과 성실, 효심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란 미가 집안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을 보게 되면 사무엘의 역할이라는 것이 이스라엘에서 어떤 역할인지 분명히 나타납니다.

자신들에게 복을 주는 역할, 적군으로부터의 보호을 해 주는 역할입니다.


이런 생각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고 있고, 이런 사고 방식속에서 왕을 요구한 것입니다.


딱 자신들이 바라는 왕의 모습을 사울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모습을 완전히 대변해 주는 사울입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왕, 하나님은 바로 이런 하나님입니다. 이런 왕입니다.

그저께 텔레비전을 보는데 마야문명에 대해서 나왔습니다.


그곳에서는 강력한 왕의 통치가 이루어졌답니다. 그런데 이 통치가 강압에서가 아니라 국민들이 전폭적인 지지에 의해서 이루어 졌습니다.


그 배경에 대해 설명을 하는데, 왕이 자신의 피를 흘려, 그 나라에 비도 내리고, 전쟁에서 승리도 갖다주니 절대 복종이 이루어졌답니다.

그런데 그렇게 찬란한 문명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망했는가는 왕이 왕의 기능을 제대로 못했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들에게 복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원하는 왕이란 , 신이란 이런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철저하게 복을 내려주는 신, 이런 예수를 사람들은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다가 오시는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 오십니까?

바로 십자가 지시고 우리에게 다가 오십니다.


너희들이 원하는 신이 이런 신이지. 너희들이 원하는 왕이 이런 왕이지.

이것에 대해 쏙쏙들이 다 드러내시면서 다가오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오늘 말씀을 보면서 상한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더 높아 보입니다.


더 존귀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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