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하

[스크랩] 강해 9

푸른 섬 2009. 6. 10. 03:39

천하게 보이는 다윗

사무엘하6장12-23

골로새서 3장17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한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자신의 인생이 없다는 말이지요.


말이든지, 일에든지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한다는 것은 달리 표현하면 우리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대표주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면서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말을 하고 일을 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주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고 일하는 것이 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까?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고 일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런 과학시대에 무슨 귀신 시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하지 않겠습니까?

지난 번 공부할 때 제가 영화이야기를 잠시했죠.

노잉이라는 영화 말입니다.


종말론을 이야기하려면 그 영화처럼 납득이 되는 종말론을 이야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 되신 예수님이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 납득할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말입니다. 특히 그 심판의 기준이 오직 한 가지. 예수님을 믿느냐 안 믿느냐. 더 나아가서 예수님을 믿는 것도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은혜 베푸시는 자 마음대로 하여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놓습니다.


이정도 말해 버리면 지금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한국 영화에 결혼은 미친짓이다라는 것이 있는데 예수님을 믿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우리가 어릴 때에나 세상 물정을 모를 때에 성경을 보면 과연 그런가 하는데 세상 물정을 알고 나면 성경 말씀은 하나의 종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학생 때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세월이 흘러 만나 보면 신앙생활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직장생활 해보니 예수님이라는 분은 존재하지 않는 분으로 확인됩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학교 다닐 때에는 정말 주님이 살아계시고 성경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것 같지만 막상 교회속으로 들어가 보면 예수님을 없습니다.

탐욕덩어리인 인간 군상들만 가득합니다.


그러니 어찌합니까?

정치해야지요.

종교 놀음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이 다 허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짜 실상은 오직 하나, 자신의 육체 덩어리밖에 없습니다.


생존하고자 그 몸부름, 자신을 더욱더 가치 있게 만드려는 그 욕망 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들은 이것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성도도 그러하고 목사라는 직분도 그러하고 헌금도 그러하고, 봉사도 그러하고 직장도 그러하고, 모든 것들은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 있어야하고 이용되어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성경말씀은 점점 더 멀어져 갑니다.


성경을 아예 덮어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말씀은 세상에서는 통하지 않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성경 말씀을 부적과 같이 여기는 사람들은 성경을 열심히 보겠지요.

성경을 열심히 보고 기도를 열심히 해도 이런 사람들은 절대로 세상에서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기를 싫어합니다.


합리적이고 예의 바르고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가 되기를 바라지요.


예수님을 믿더니 예의도 모르고 상식도 없다는 소리는 듣기 싫은 것입니다.

이렇게 되다 보니 당연히 성경말씀과는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읽은 본문을 보게 되면 다윗이 언약궤로 인하여 행동하는 모습이 그의 아내 다말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습니다.


20절을 봅시다.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가로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왕의 체통을 지켜야 하는데 다윗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다윗왕은 언약궤의 축복 속에 들어간 것이 너무나 기뻤습니다.


언약궤를 주도하는 입장이 아니라 언약궤의 축복속에 들어가니 그에겐 언약궤로 인한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것은 생각도 안합니다.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이런 것들은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언약궤의 주도권 속에 자신이 들어감으로 인해 다윗은 너무나 즐거운 것입니다.


21절을 봅시다.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이 말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자신이 자신이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보이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언약의 말씀을 자신을 사용하여 이루시는 것에 대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타인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가에 관심이 없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고 만일 자신이 주권자 되는 것으로 인한 즐거움이라면 오히려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 고려하고 행동했을 것입니다.


22절을 보세요.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이보다 더 낮아져 스스로 천하게 보여도 상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천하게 보고 조롱하는 자에게는 높임을 받을 것을 압니다.


천하게 보고 조롱하는 자는 , 업신 여기는 자는 다윗을 업신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조롱하고 업신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을 보면 우리는 그래도 하나님을 믿을 만하지요.

왜냐하면 그 다음 구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


이렇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일들이 구약에는 나타났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을 만합니다.


그러나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어떻습니까?

물론 거짓목사나 삯꾼들이 이런 성경구절을 이용합니다.


그래서 마치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을 성경구절에 끼여 맞추어 해석해 내려고 합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춥니다.


여러분 자식이 없는 이유는 혹시 여러분이 예수님 잘 믿는 사람을 업신 여겨서 일지 모릅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을 웃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말 자식이 없는 사람에게 이런 말은 어떻게 들릴까요?


자녀들이 있으니 별로 와닿지 않죠.


그러나 자녀들이 없는 사람에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들에겐 십자가 지신 주님되신 예수님은 어떤 존재일까요?

그야 뻔하지요. 필요를 채워주고 체면을 세워주는 분이 예수님이죠.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하여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는 것을 이상하게 여깁니다.


꼭 이렇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시 잘 살아야 하고, 예수님을 믿으니 예의 발라야 하고, 예수님을 믿으니 자식이 잘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니 부모님께 효도해야 하고, 예수님을 믿으니 사업이 잘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니 부부사이가 좋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때 제일 많이 들은 이야기 중에 하나입니다.


가난하면 부유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체가 복이요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조롱받는다. 업신 여김 받는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 다윗은 자신이 언약 궤속에 들어감으로 인해 너무나 기뻐합니다.

성도가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피가 나와 상관 있다는 것이 성도에겐 그 무엇보다 행복한 일이요 기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 보기에 조롱거리이고 업신 여김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돈을 우선시하고 사람을 우선시 하는 오늘의 사회에서는 십자가지신 예수님을 뒤로 빠져 주셔야 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평가를 내리든지 상관없습니다.

사람들이 조롱거리가 되어도 좋습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십자가의 복음을 자랑스러워 하는 자가 참 성도입니다.

로마서1장16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믿는 자기에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하기야 지옥을 모르는 자에겐 이 구원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도는 지옥을 압니다. 그러니 구원의 능력이 되는 복음을 결코 부끄러워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자랑합니다.


출처 : BLUE ISLAND
글쓴이 : 정석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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