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하

강해29

푸른 섬 2009. 10. 18. 16:37

지혜

사무엘하20:3-22

우리들이 함께 볼 본문에서 세 가지 사건이 나옵니다.

첫째는 다윗이  예루살렘 본궁에 이르렀을 때에 전에 머물러 지키게 열 명의 후궁들에 대한 처리입니다.

둘째는 다윗 왕이 아마사를 세바 반란 진압을 맡기는 과정에서 요압이 아마사를 죽이는 내용입니다.

세 번째 내용은 아벨성에 사는 지혜로운 여인에 대한 내용입니다.


먼저 우리들이 열 명의 여인들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억울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윗 왕 자신이 예루살렘 본궁을 떠나면서 열명의 후궁에게 궁을 지키라고 했기에 지켰을 뿐입니다.

또한 압살롬이 왕과 같이 된 마당에 자신들이 어찌 할수 있었겠습니까?

다윗 왕이 남겨 두지 않았다면 그런 일이 일어 나지 않았겠죠.


그런데 이제 와서 그 평생을 갖혀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열명의 후궁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뭐 어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열명의 여인이 아닙니다.

열명의 후궁이 어떤 생각, 어떤 마음을 가졌느냐는 성경에서 무시해버립니다.


단지 이들은 다윗의 소유물과 같이 압살롬의 소유물과 같이 여겨질 뿐입니다.

참으로 억울한 인생 아닙니까?


오늘날 제대로 주체가 확립된 시기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 여성주의 자들이 난리법석을 떨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이렇게 무시해도 되느냐? 후궁들은 사람이 아닌가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것이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는 말씀입니다.

목사들이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이 후궁들에게는 하나님의 인격이 없습니다.


후궁들에겐 하나님은 정말 나쁜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윗만 생각하시지 자신들은 전혀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압살롬이 왔을 때 자살이라도 했어야 하지 않느냐?


이게 말이 안 되죠.

자살이나 압살롬의 놀이감이 되나 뭐가 다릅니까?

어찌되었든 다윗 때문에 발생한 일들인데..


모든 문제는 다윗입니다.

다윗이 원인 제공자입니다.


그런데 누가 억울한 삶을 살게 됩니까?

열  명의 후궁입니다.


이들은 다윗 때문에 억울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억울한 후궁이 내용의 중심이 아니라 다윗왕이 중심이라는데 있습니다.


이들은 단지 액스트라에 불과합니다.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액스트라.


그런데 이 후궁들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심으로 말미암아 다윗에겐 평생 동안 무엇을 생각하게 됩니까?

죄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한 죄 말입니다.


다윗이 이들과 동침치 않고 평생동안 죽을 때까지 생과부로 살게 함으로 자신의 죄를 결코 잊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물론 또 교만해 집니다마는..


다윗은 열 명의 후궁과 멀리함으로 지혜로운 모습을 보입니다.

지혜란 이런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1장21절에서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없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의 도입니다.


다윗은 지금 십자가의 도를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죽인 당사자임을 후궁들이 죽을 때까지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지혜롭다는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과 너무 다른 것입니다.

정말 다른 세상의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지혜로운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사건을 보면 다윗이 변절자 아마사를 진압군 대장으로 세우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아마사가  좀 늦었습니다.

그러자 조급한 다윗이 아마사와 상극인 요압과  그 동생 아비새를 압장 세웁니다.


그런 중에 아마사가 요압 장군과 합류하게 됩니다.

이 때 요압이 아마사를 죽여 버립니다.


그리곤 세바를 쫓습니다.


이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번째 사건입니다.


여기에 문제는 누가 갖고 있습니다.

다윗과 요압입니다.

다윗이 아마사를 세웠으면 좀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필 아마사가 약속시간에 늦어버립니다.


아마사도 다윗의 명을 준행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조급한 다윗은 요압과 그 동생 아비새를 다시 앞장 세웁니다.


결국 이 일로 인해 기회를 노리든 요압이 아마사를 암살합니다.


요압이 왜 아마사를 죽였을까요?


아마사는 요압과 사촌간인데 상황을 미루어 볼 때 서로 라이벌인 관계 같습니다.

사무엘하19장13절에 보면 다윗 왕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또 아마사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대신하여 항상 내 앞에서 군장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 하셨다 하라”


요압이 군장인데 그 자리를 압살롬에게 붙었던 사촌 아마사가 차지해 버렸습니다.

특이 요압 입장에선 압살롬에게 붙었던 자인데 그를 용납하는 것도 문제였죠.


그러니 아마사를 죽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 왕과 요압의 차이가 나옵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요압을 그냥 군장으로 세워두는 것이 옳습니까 아니만 적장이었던 아마사를 군장으로 세우는 것이 옳습니까?

적들을 껴 안는 것에는 성공할지 모르지만 문제는 현재 자신의 편인 요압을 끌어당길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죠. 그런데 다윗이 왜 이렇게 아마사를 군대총사령관으로 삼았을까요?

이게 지혜입니다.

다윗은 누구의 편이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 편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에게 칼을 겨누었던 자를 자신의 군대 통솔자로 임명해 버립니다.


여기에 대해 가장 큰  불만을 갖는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요압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1,2절입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때 누가 가장예수님을 싫어합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지킨다고 하는 자들.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다고 생각한 자들. 말씀을 늘상 몸에 품고 사는 자들. 말씀을 달달달 외우는 자들. 말씀을 온 몸으로 실천하는 자들. 이들이 예수님을 가장 싫어했습니다.


이유는 이것입니다.

왜 자신들을 인정해 주지 않고 하필이면 자신들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과 함께 노는가 입니다.

자신들을 인정해 주면서 어떻게 말을 하면 좋을 텐데 전면 부정을 하면서 자신들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과 친구로 지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15장7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정말 사람을 미치게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의인 아흔 아홉은 뭐가 됩니까?

쪽 팔립니다.

부끄럽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온통관심은 죄인 하나의 회개에 있다는 말씀.

이 말을 누가 듣고 있습니까?

회개 할 것 없는, 자칭 의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듣고 있죠.


너희들 구십 구명보다 너희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죄인 하나의 회개에 하늘에게는 잔칫집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견딜 수 없습니다.


오늘날도 예외가 아닙니다.

특히 목사들이 문제가 많은데, 물론 신앙생활 잘한다는 사람들.

이들은 이런 말씀에 살짝 삐지다가 계속해서 몰아붙이면 벌컥화를 냅니다.


마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처럼말입니다.


내가 왜 죄인이야. 난 예수님을 믿는 괜찮은 사람이야 라고 말입니다. 십자가의 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제 세 번째 사건을 봅시다.

아벨성의 이름없는 한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을 살리기 위해 세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 앞에 던집니다. 이것으로 여호와께서 이 여인에게 주신 기업은 아무 일이 없게 됩니다.


이 여인의 지혜는 내어 놓아야 하는 것을 제대로 내어 놓았다는 말입니다.

그에게 소중한 것은 여호와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기업입니다.


이 기업을 지키기 위해서는 내어 놓아야 할 것을 제대로 내어 놓아야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태복음13장44절을 보겠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이 말씀이 만일 땅의 경제 논리로 말한다면 남는 장사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전 재산을 다 팔아 그 밭을 샀어도 전혀 손해 볼 것 없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문젠 그 밭에 감추인 보물이 뭐냐는 것입니다.

바로 영생입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영생은 땅의 것이 아닙니다.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를 발견한 사람은 어떻게 행동 하는고 하면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도 전혀 아깝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사람을 미치게 하는 말씀입니다.


투자가치로 올인 하면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생은 투자가치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게 예수님 비유의 어려운 점입니다.


땅의 이야기를 하면서 하늘의 이야기를 해버리시니 이 말씀을 덥썩 무는 자들은 딱 지옥가게 됩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땅의 자본의 논리, 투자의 논리로 해석하여 철썩같이 믿는 자는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에서 말씀하시는 지혜란 철저하게 땅의 논리를 거부하는 지혜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일 뿐입니다.


천지 이익이 안 되는 일을 골라서 한다는 것은 멸망하는 자들이 보기엔 어리 섞은 일입니다.


성도는 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십자가에 복음에 올인 할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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