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

말라기강해 3

푸른 섬 2011. 4. 11. 07:52

 


function file_download(link, file) { document.location.href=link; } window.[안내]태그제한으로등록되지않습니다-xxonload=function() { resizeBoardImage(600); drawFont(); }

레위와 세운 언약

말라기2장1-9

성경을 읽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찌되었든지 말씀과 관련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말씀이 그들이 어떠한 삶을 사는지를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만 보더라도 레위인들, 제사장들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과연 말씀이 우리를 공격하고 있습니까?

다르게 말하면 성령의 책망을 듣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분명 성령께서는 자기백성을 십자가 피를 근거로 늘 책망하십니다.

이것이 말씀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생활에서 과연 성령의 책망이 있습니까?

그래서 가끔 부럽습니다.

누가 부러운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 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럽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에겐 분명한 경고의 말씀이 들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경고를 들었다가 문제가 아닙니다.

경고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경고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경고가 이스라엘 백성을 제거하는 쪽으로 갑니다.

3절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의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똥칠해서 제거해 버리십니다.

그것도 절기의 희생의 똥을 얼굴에 발라서 말입니다.

레위기4장12절을 봅시다.

“똥 곧 그 송아지의 전체를 진영 바깥 재 버리는 곳인 정결한 곳으로 가져다가 불로 나무 위에서 사르되 곧 재 버리는 곳에서 불사를지니라 ”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중심입니다. 나 중심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을 보면 먼저 자기 자신과 관련지어 말씀을 해석해 보려고 합니다.

이것이 당연한 해석방법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런 해석방법을 피해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입장에서 해석하려고 하지요.

물론 좋습니다.

그런데 주님입장에서 해석해 버리면 이스라엘이 빠져 버립니다.

내가 빠져 버립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자신은 잘난 인간이 되어 버린다는 말입니다.

자신은 마치 주님 편에 서 있는 자 이냥 말씀을 대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될 경우 말씀은 정말 자신과 상관없는 말씀이 됩니다.

오늘 말씀을 한번 봅시다.

2절 끝부분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

이 말씀이 이해됩니까?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복을 주셨으면 복이 주셔야지 왜 복을 저주로 바꿉니까?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미 저주하였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이렇게 하신답니다.

사람은 고정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변화를 싫어합니다.

물론 변화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머리를 볶았다가 풀었다가 색을 입혔다가 뺏다가 합니다.

그러나 복에 대해서는 변함없는 것을 좋아합니다.

지난주에 잠시여행을 갔다 왔습니다.

입장료도 엄청비싼곳을 들었는데 온통 불상, 공자상, 노자상이 가득했습니다.

또한 엄청 비싼 차상, 보석류를 보았습니다.

물론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관람용이었습니다.

크기는 어마어마했습니다.

경복궁과 맞먹는 크기 였습니다.

제가 궁금해서 가이드에게 물었습니다. 이게 누구 소유냐?

개인 소유랍니다.

이런 사람에겐 이런 것을 두고 죽기가 얼마나 아깝겠습니까?

생명이 영원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 영원성을 자신의 아들, 손자로 이어진다고 믿지요.

그런데 이들에게 저주, 즉 지옥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 아닙니까?

자신 나름대로 복을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영원히 불타는 지옥이 입을 벌리고 그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마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소유를 두고 사는 것도 역시 지옥이지만.

문제는 이 땅을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삶을 지옥이라고 생각할까요?

여호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않으면 복을 저주해 버리시는 분이 여호와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레위 인들은, 제사장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여호와의 말씀에 근거하여 이들의 생각을 들여다보면 복은 영원할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복을 저주하는 여호와는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이유는 자신들에겐 언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레위와 세운 언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언약을 자신들의 소유로 생각했습니다.

소유로 생각한다는 것은 자신들을 위한 언약이라 생각한 것이지요.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갖는 생각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상 예수님을 믿는 자신을 위한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항상 자신의 편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나를 위한 것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합니다.

십자가 복음을 안다고 하는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말라기 2장1-9절 말씀이 지금도 우리에게 있다는 것은 성령을 통해 자기 백성을 책망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어라가 아닙니다.

제사장들이, 레위 인들이 무슨 생각으로 여호와를 믿고 섬기고 있는지를 너희들이 아느냐?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생각과 전혀 다르지 않음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들에겐 이미 주의 이름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관심 갖는 것이 무엇입니까?

8-9절을 봅시다.

“너희는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파하였느니라 너희가 내 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을 행할 때에 사람에게 편벽되이 하였으므로 나도 너희로 모든 백성 앞에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이들은 율법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자기 편한대로 율법을 활용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들이 붙들고 있는 것이 있죠?

레위언약입니다.

생명과 평강의 언약임을 이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배뿡냥하게 율법을 마음대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이들에겐 여호와 경외와 여호와를 두려워함이 없습니다.

이유는 아시지요.

먹고 살기 바쁩니다.

먹고 살기 바쁜데 챙길 것은 챙기고 잊어 버릴 것은 잊어 버려야 하지요.

아니 잊어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냥 살다 보니 잊어버리지요.

우리의 삶이 그렇지 않습니까?

먹고 살기 바쁜데 여호와 경외, 여호와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습니까?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십니다.

그야 알죠.

그런데 주님을 경외함이 있습니까?

주님을 두려워 합니까?

하루하루가 전쟁인데..

현재 내가 살아남아야 하는데..

문제는 성도를 주님께서는 왕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성도는 제사장 역할을 감당해야 하지요.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당연히 경외하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성도는 십자가 피복음을 전하는 제사장입니다.

성도의 입에서 십자가의 복음이 흘러 나오기 때문에 늘상 죽음의 자리로 내 몰리는 자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일상이 그렇게 녹녹치 않다는 사실입니다.

먹고사는 자리에서는 예수님 이야기도 나오지 않습니다.

십자가 이야기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물건을 사고 파는데 십자가 이야기가 나옵니까?

공부하는데 십자가가 나오지 않습니다.

다르게 표현해 볼까요?

레위인들의 생활이 무엇입니까?

제사드리는 일이 일상입니다.

이들이 하는 일이 제사 드리는 일이지요,

우리도 이런 생활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요.

그런데 이런 생활해 보았자 별것 없습니다.

저주받는 인생이 될 뿐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의 일상이 주님의 두려워함이 없습니다. 주님을 경외함이 없습니다.

장사하면서, 사업하면서, 자식 교육하면서, 주님을 경외하거나 두려워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은 나의 영생을 보장해 주는 분입니다.

그러나 나의 일상생활은 나의 힘과 능력에 달렸을 뿐이라는 겁니다.

지금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고 마시고, 아이 키우고, 물건 파고 살고 하기 바쁜데 무슨 주님 경외함이 있습니까?

히브리서 11장13-16절을 봅시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말씀이 너무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것과 너무 다르게 살고 있지요?

그런데 성도란 이런 사람입니다.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성도는 본향이 따로 있습니다.

하늘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의 하나님임을 부끄러워 아니하신다고 합니다.

히브리서12장1-4절을 봅시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

성도가 왜 이런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이유는 언약 때문입니다.

새언약을 전하는 자가 성도입니다.

복에 저주를 내리시는 이유는 여호와의 관심은 언약에 있기 때문입니다.

언약에 위배되는 자들은 가차 없이 제거합니다.

그래서 가짜 성도를 제거하시기 위해서 성도의 삶은 십자가의 삶으로 점철되어져 있습니다.

히브리서11장과 12장을 보게 되면 성도의 삶이 처절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니 되었다 끝이 아닙니다.

성도의 삶 속에서 철저하게 십자가의 피 능력을 꺼집어 내십니다.

성도의 길고 짧은 생애를 통해 말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을, 레위인들을, 제사장들을 너무 부러워하지 마세요.

우리가 그런자들입니다.

이런 삶 가운데 성도는 주님과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죄에서 떠나게 하는 자입니다.

좀 복잡하지요.

간단하게 우린 주님과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죄에서 떠나게 하는 자들입니다라고 하면 될 터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꼭 우리를 죄인 속으로 쏙 집어 넣어버린다 말입니다.

이게 말씀입니다.

그래야만 주님이 죄인을 사용하셔서 일하심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그야 말로 주님이 그들을 그렇게 살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죄인으로써 주님되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심을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인으로서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며 사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이 이렇게 살려 주시지요.

주님의 일하심은 늘 언약중심입니다.

십자가 중심입니다.

그래서 레위인처럼, 제사장처럼 생각하는 자들은 제거됩니다.

나는 당연히 구원받았어.

나는 틀림없이 천국갈거야라고 하면서 십자가를 부끄러워하는 자들은 언약이 항상 있게 하시기 위해서 제거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15-17절을 봅시다.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것을 금지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니 저희를 위하여 캄캄한 어두움이 예비되어 있나니”

이들을 거짓선지자라고 합니다.

이들은 탐욕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성경에 거짓 선지자라고 말을 하니 그렇게 보이지만 실제로 이들은 양의 탈을 쓴 이리이기에 그렇게 쉽게 눈치 채지 못합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레위인들, 제사장들이 자신들의 탐욕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것을 알지 못하듯이 말입니다. 몰론 이스라엘 백성들도 똑 같은 탐욕으로 살았습니다.

거짓선지자가 왜 인기를 끌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땡기는 것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발람이 불의의 삯을 사랑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간단하지요.

내 마음이 그렇잖습니까?

돈 사랑하지 않는 사람 있습니까?

그런데 이 탐심이 누구를 대적합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 원리를 대적합니다.

이 탐심이 십자가를 조롱한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이 십자가를 멸시하고 조롱하는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 성도라고 우긴다는 말입니다.

이 땅 모든 사람들은 일상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목사가 되었든 사업가가 되었던 직장인이 되었던.

그런데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그런 생활가운데서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을 전하는 자로 살아가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꼴이 어떤 꼴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동시에 이런 생활가운데 살게 하시면서 주님은 제거할 자는 제거하십니다.

이유는 오직 한가지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 종류는 탐욕을 위해 살다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한 종류는 탐욕을 위해 사는 가운데 늘 회개하면서 십자가의 피 공로로 감사하며 사는 자입니다.

'말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라기 강해 6  (0) 2011.05.08
말라기 강해 5  (0) 2011.04.24
말라기강해 4  (0) 2011.04.17
말라기강해 2  (0) 2011.04.11
말라기 강해 1  (0) 2011.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