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사사기강해 19

푸른 섬 2012. 4. 22. 13:03

사사기 강해 19

기묘


사사기13장1-23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습니다.

사사기를 보면서 우리는 이제 이 말에 익숙해 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목전에 악을 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문제는 이렇게 여호와 목전에서 악을 행해도 가나안 땅, 약속의 땅에 이스라엘 백성이 살 자격이 있느냐입니다.

지금까지 살펴 본바에 의하면 살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자격이 누구의 자격인고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격이 아니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자격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인도해 낼 때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께 순종해서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가나안 땅에 들어 왔을 때에도 여전히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유효할까요?

여러분 지금까지 사사기를 보면서 좀 이상한 점 발견하지 못했습니까?

율법이 없어요. 물론 기드온이 번제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율법이 나오지 않아요.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했다는 말씀에 근거하면 이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고 살았다는 말이 됩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고 살아도 구원자는 이스라엘 가운데 있었습니다.

아마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기간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요. 그렇다면 율법을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고, 지키려고 했을까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지 않을까요.

오늘날 교회가 그렇잖아요.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고 생각해요.

지난번에 교회 수양관같은 곳에 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보니 율법을 정리해서 빼곡하게 적어놓았더라고요.

성도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이 율법, 즉 구약 율법에서 다 말씀하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교회사를 보면 알미니안주의 자들이 있어요. 이들의 특징은 십자가의 피 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땀이 플러스 될 때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을 이단으로 정죄한 무리들이 개혁주의자들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정죄해 놓고 자신들이 알미니안들이 주장하는 그 주장을 펼치고 있어요.

십자가로 구원을 얻지만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주장 말입니다.

결국 인간이 주체적으로 무엇인가를 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신약 시대 교회사 전체의 주장들입니다.

이들의 주장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완벽히 다 이루셨다고 안 보아요.

물론 믿는다고 주장은 해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음을 우리가, 인간이 보여주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 일하시니 사람을 통해 영광 받으신다고 생각을 해요.

이들 눈에는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 되신 예수님이 안 보여요. 믿어지지가 않아요. 그러니 믿음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육의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말씀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요.

자 그러면 오늘 본문으로 한번 들어가 봅시다.

아마 목사들이 오늘 본문 같은 경우 상당히 부담스러울 것입니다.

단 지파에 소속된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결혼을 했는데 아기를 갖지 못해요.

왜 아기를 갖지 못할까요?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기를 낳지 못하니 사람들이 뭐라고 했을까요?

사무엘상1장에 보면 한나와 브닌나가 나옵니다. 한나가 아기를 낳지 못하니 브닌나가 한나의 마음을 엄청 상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무엘 시대와 삼손시대가 엇비슷해요.

그러니 마노아의 아내도 그런 대우 받지 않았겠어요.

그런 마노아의 아내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셔서 아들을 낳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하시면 말씀이 “너는 삼가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지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지니라”

마노아의 아내가 나실인이 되어라고 명하십니다. 나실인이 무엇인고 하면 구별된 자 하나님께 성별되어 바쳐진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민수기 6장1절 이하를 보면 나실인의 서원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나실인, 즉 여호와께 거룩히 구별되어 바치는 서원을 인간 자신이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여호와하나님께서 마노아의 아내를 나실인으로 만드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지금 시대는 자기 마음대로 하는 세상입니다. 어느 누가 나실인 서원을 하겠습니까?

그런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자식이 없는 마노아의 아내에게 아들을 낳을 것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께 구별해 네 몸을 드려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낳는 아들도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아이가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하기를 시작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아 아이 역시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게 하지 말고,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물론 시체도 만지면 안 됩니다.

그런데 한번 보세요.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고 이런 말씀을 들었는데 마노아의 아내가 남편에게 뭐라고 합니까?

6,7절입니다.

“이에 그 여인이 가서 그 남편에게 고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 내게 임하였는데 그 용모가 하나님의 사자의 용모 같아서 심히 두려우므로 어디서부터 온 것을 내가 묻지 못하였고 그도 자기 이름을 내게 이르지 아니하였으며 그게 내게 이르기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죽을 날까지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하더이다”

이정도 말하면 마노아가 알아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마노아는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주여 구하옵나니 주의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람을 우리에게 다시 임하게 하사 그로 우리가 그 낳을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게 하소서

왜 이런 기도를 할까요?

아내의 말을 못 믿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마노아의 목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런데 마노아에게 곧장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마노아의 아내가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밭에 있는 마노아의 아내가 밭에 앉았을 때에 나타나셨습니다. 여인이 급히 남편을 불렀습니다.

마노아가 와서 묻습니다. 당신이 이 여인에게 말씀하신 사람이니이까? 그러자 그로라 라고 하니 마노아가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면서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우리가 어떻게 행할까요라고 질문을 합니다.

13,14절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여인에게 말한 것들을 그가 다 삼가서 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지 말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아서 내가 그에게 명한 것은 다 지킬 것이니라”

서원은 인간 쪽에서 한다고 했지요. 그런데 삼손은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나실인으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서원과 상관없이 말씀이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마노아는 염소 번제물을 여호와의 사자에게 드리려고 합니다. 물론 여호와의 사자인줄도 알지 못합니다.

여인과 마노아는 단지 하나님의 사람으로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지요. 하나님의 사람에게 왜 번제를 드리려고 하느냐 말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자기 마음대로 적용하는 것입니다. 마치 입다가 자기 딸을 번제물로 바치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라고 가르쳐 줍니다.

그러자 마노아가 질문합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야곱이 묻는 질문 같지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당신의 말씀이 이룰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숭하리이다 라고 말합니다.

마노아의 눈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안 보입니다. 믿어지지가 않아요.

그러니 여호와의 사자의 이름을 존중하고 숭배하려고 덤벼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섬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름을 뭐라고 하십니까? 기묘 . 기묘라는 뜻은 이해할 수 없는, 뛰어난 이라는 뜻입니다.

이에 마노아가 염소새끼 하나와 소제물을 취하여 반석에서 여호와께 드렸습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사자가 이적을 행하여 불꽃이 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단 불꽃 가운데로 좇아 올라 갔습니다.

이제야 마노아가 그 사람이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았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아내는 뭐라고 합니까? 23절입니다.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 이 모든 일을 보이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 하셨으리이다 하였더라”

제가 앞서서 오늘 본문을 보면 목사들이 ,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부담스러워 할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떻습니까? 본문을 쭉 살펴보니 그럴 것 같습니까?

나실인에 대한 법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볼 때 마노아와 그 아내가 이 법을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까?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율법을 주신 것을 지키라고 주셨다라고 말입니다.

이 말속에 이런 의미가 담겨있지요.

율법을 듣는 사람, 받는 사람은 율법을 지킬 능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볼 때 어느 누가 나는 성경말씀을 지킬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더라도 그래 마노아와 그 아내가 율법이 멸시 당하는 세상에서 나실인에 대한 법, 여호와의 명령을 지킬 것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야 자신들이 생각하는 삼손과 맞아 떨어질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우리들이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명한 것을 지키지 않는데 이스라엘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목사들이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보면 당황스러운 본문이 됩니다.

삼손 전체가 그래요.

누가복음23장33-43절을 봅시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다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백성은 서서 구경합니다. 관원들은 비웃습니다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or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군병들도 희롱합니다.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거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달린 행악자 중 하나나도 비방하여 말합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그러자 다른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그리고 하는 말이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한 강도 외에는 모두가 예수님을 비방하고 조롱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한 강도에게만 이루어졌습니다.

구원이 누구에게 주어졌습니까?

율법을 지키는 자들입니까? 아닙니다.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사람에게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기묘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옆에 달린 강도가 구원받은 것에 대해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물론 말로는 강도 같은 나를 구원하셨다고 하지요. 그러나 강도 같은 자를 구원해 버리시면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평생 말씀에 순종하지 않다가 죽을 때 예수님을 믿게 되면 천국 가는 강도 같은 사람이 너무 얄밉지요.

뿐만 아니라 너무 부러운 것입니다.

또한 내가 기대하는 구원과는 동떨어진 구원이 됩니다.

사람이 기대하는 구원은 어떤 구원입니까?

에베소서4장1,2절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이러한 삶을 살 때 비로소 구원받은 자 답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런 삶을 산 교회가 있었습니까?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졌죠. 등대불빛 같아요. 그래도 등대 불빛은 자주 깜빡이지요. 성경가운데 이런 삶을 찾아보기는 너무나 어렵지요.

잠시 잠시 나타 날 뿐입니다.

이런 식으로 성령께서 역사하시지요. 그래야만 주님 되신 예수님만 전파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런 것이 싫어요. 자신이 드러나야 하고 자신이 영광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에베소서4장 말씀을 십자가 지신 주님이 이루신 일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으로 이루려고 합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성경을 보니 오늘 우리들이 살펴보는 본문의 의미를 제대로 찾을 수가 없습니다.

율법을 지키지도 않고, 율법과 상관없이 사는 자들에게 나실인이라는 것이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지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까?

민수기 6장을 보면 나실인은 자원하여 서원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만큼 하나님을 향한 열심히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그런 열심 없어요.

오히려 하나님의 목적에서 악을 행해요. 율법을 어기는 행위만 합니다.

약200년 이상을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지금 단 지파에 속한 마노아와 그의 아내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14장을 보면 삼손이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겠다고 하니 절대 반대하지 않습니다. 마치 엘리제사장을 보는 것 같지요. 아들들을 여호와 하나님보다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마노아의 행동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번제를 여호와의 사자에게 드리려고 하잖아요.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습니다.

갈라디아서2장15-21절을 보겠습니다.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어 죽으셨느니라”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됩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17절을 봅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데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을 왜 합니까?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데 되기 위해 율법을 지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율법을 지킬 수 있나요. 없어요. 죄인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느냐고 반문하면서 결코 그럴 수 없다고 합니다.

성도는 율법을 향해 죽었습니다. 죽은 자가 율법 운운할 수가 없지요. 죽었고 하나님을 향해 살았습니다.

이 모습이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내가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성도는 육체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살아가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해도 아들이 나와야 하겠지요.

지금 갈라디아교인들의 문제가 예수님 안에서 의롭게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까? 그러니 믿음이 없다는 말이지요. 믿음이 없으니 율법을 끌어당깁니다. 그리고는 자신들의 종으로 삼으려고 하지요.

예수님 안에서 의롭게 되려고 율법을 끌어당기는 자들은 결국 사람의 종 만들려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알미니안주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개혁주의라고 주장하는 교회들의 모습이고요.

실제로 한번 보세요. 개혁주의 교회라고 주장하면서 목사 말에 복종하라고 하지 않는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이들은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에 관심이 없어요.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는 것을 몰라요. 자기 쪽에서 자꾸 믿음을 만들어 내려고 합니다. 이들은 기묘자로 찾아오신 주님을 몰라요.

그러나 구원은 죄인가운데 찾아오심입니다. 기묘자로 찾아오셨습니다. 믿음은 기묘한 일입니다.

우리가운데 기묘자로 찾아오신 분이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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