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룻기강해 2 1장6-18

푸른 섬 2012. 7. 15. 13:50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룻기1장6-18

나오미는 이방 땅 모압에서 두 며느리와 함께 두 아들과 남편 뒤에 남았습니다.

그러나 모압땅을 떠날 생각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든 중 모압 땅에서 유대땅 베들레헴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여기에서 권고하사라는 단어가 나오지요.

이 단어는 성경 여러 군데에서 사용됩니다.

출애굽기3장16절입니다. "너는 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실로 너희를 권고하여 너희가 애굽에서 당한 일을 보았노라"

여기에서 권고라는 단어가 나오지요. 히브리어로 파가드라고 읽어요.

이 단어는 여러 가지 뜻이 있어요. 그러나 말씀내용을 보게 된다면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다라는 의미가 강하지요. 애굽에서 당한 일을 그냥 뻔히 보고 구경하시는 것이 아니라 애굽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이 당한 일을 함께 몸소 경험하셨다라는 의미가 강해요. 물론 방문하다, 돌보신다는 의미도 있지만. 이런 의미도 포함되겠지요.

출애굽기4장31절에서는 돌아보시고라고 번역되어 있지요.

창세기50장2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여기에서는 권고하시고라고 번역했습니다. 파가드라는 단어가 두 번이나 나와요. 이 말씀은 곧 출애굽기3장16절에 대한 말씀과 동일한 의미를 갖지요.

그냥 돌아보사, 반드시 돌아보사라는 의미 보다는 늘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셨다라고 보셔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고난, 애굽에서 당한 일을 보았다는 것이 관찰자의 입장이 아니라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보게 된다면 이 말씀의 의미가 훨씬 분명해지지요.

룻기로 돌아가서 나오미가 말하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라는 말의 의미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단순히 돌보다의 의미가 아니라 그들이 당하는 괴로움을 친히 다 경험하신 상황에서의 돌봄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물론 이 말씀은 출애굽기 4장31절 말씀과 떨어져서 해석할 수도 없고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그 맹세 속에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신 일이 들어가게 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그냥 불쌍해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그 맹세로 인해 권고해 주신 것이 되지요. 결코 이스라엘 백성 자체를 위한 권고하심이 아닙니다. 결코 이스라엘 백성 자신들을 위한 돌보심이 아니지요.

지금도 여전히 사사시대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며 여호와가 왕되심을 부인하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라는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입으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리를 듣게 하신 이유는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나오미가 이런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했다는 사실은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고백 속에, 그의 며느리의 고백 속에서 이들은 언약을 이루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 속에 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나오미가 모압땅에서 부자였다면 결코 모압땅을 떠날 이유가 없습니다.

풍족하게 유대땅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땅에 갔습니다.

그러나 이방 땅 모압에서 남편 죽고, 두 아들 죽고, 빈 털털이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 보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하는 소식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먹고 살려면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두고 여호와께서 권고하사라는 표현을 쓸 수 있습니다.

사실 양식을 주신 것에 대해 여호와께서 권고하셨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지금 나오미가 처한 상황 자체가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상황입니다.

나오미는 이 소식을 듣지 말자 자부와 함께 일어나 모압지방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니 얼마나 절박한 상황임을 짐작할 수 있지요.

룻기 뒷부분을 보면 룻이 떨어진 이삭을 주어 생계를 유지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거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돌아 오는 중에 나오미가 갑자기 두 며느리에게 축복하면서 모압땅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8절을 한번 볼까요.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나오미가 참으로 이상한 말을 하지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한다라는 말 말입니다.

지금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자신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남편 죽고 두 아들 죽고 거지가 되었지요.

그런데 이런 말이 무슨 의미를 갖겠습니까?

물론 두 며느리가 자신과 죽은 자들에게 선하게 대한 것은 사실이지요.

그런데 듣는 며느리 마음이 어떨까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대하시는 것을 눈으로 보았습니까? 저주하시는 것만 보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사실 지금 나오미가 처한 상황이 여호와께서 선대하시는 일이지요.

그러나 몰라요. 나오미도 몰라요. 여기에서 나오는 선이라는 말은 헤세드라는 단어입니다.

은총이라는 의미로 잘 알려져 있지요. 자비, 선행 등의 의미로도 사용되어집니다.

두 며느리는 죽은 아들들과 자신에게 자비, 은총, 즉 선행을 베풀었지요.

문제는 여호와께서 이들에게 베푸실 은총이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9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로 각각의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축복을 빌어줍니다.

그러니 나오미가 이들에게 비는 축복의 내용이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나오지요.

나오미는 여호와의 은총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구약시대에는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이렇게 된다면 나오미 자신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은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러나 우리들은 나오미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은총이 장맛비처럼 줄줄 흘러내리고 있음을 보고 있지요.

10절입니다. 그러자 두 며느리가 나오미에게 말합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라고 하지요.

얼마나 효성이 지극한 며느리입니다. 시어머니 모시고 살겠다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고향을 떠나 고생하는 시어머니를 따라 나서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왜 하시는지 알겠지요.

1장1절을 기억하신다면 이방여인 모압여인 둘의 이런 말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분명해지지요.

그러자 나오미는 다시 말합니다. 나에겐 너희 남편이 될 아들들이 없다. 뿐만 아니라 자신은 늙어서 남편을 둘 수 없을 뿐 아니라 혹 남편을 두어 아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그들이 어느 세월에 자라서 너희 남편이 되겠느냐고 말합니다.

어찌 그런 불가능한 일을 두고 너희들 남편 두기를 멈추겠느냐?

그러니 나를 떠나 너희 고향으로 가서 다시 남편을 얻어라라는 것입니다.

더욱더 중요한 사실을 13절 끝부분에서 나오미가 말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이게 무슨 의미지 아시겠지요. 나에겐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에겐 아무런 희망이 없기 때문에 너희 고향으로 돌아가 좋은 남편 얻어 행복하게 살아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다는 말은 자신은 지금 저주받았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겐 헤세드가 없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더 이상 볼 것 없는, 소망 없는 나를 따라 유대 땅으로 갈 이유가 너희들에게 없다라는 말입니다.

저주받은 자를 따라 나서보아야 저주밖에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러자 두 며느리가 소리 높여 웁니다. 그리고 오르바는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작별인사를 합니다.

그러나 룻은 나오미에게 짝 달라붙었습니다. 처음에는 둘 다 시어머니의 백성에게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경험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라 가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오미의 말을 들어보니 너무나 현실적인 이야기를 한다 말입니다. 그래서 오르바는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룻은 여호와의 손이 나오미를 치신 것을 알면서도 이제는 아예 나오미에게 착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나오미가 룻에게 말합니다.

15절입니다.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여기에 보라는 말이 나오지요. 보라라는 말을 함으로 룻의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해 줍니다.

오르바가 돌아간 곳은 그 백성과 그 신입니다.

그 백성과 그 신을 동시에 말하지요. 모압신은 여호와하나님과 다르다는 의미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런 식으로 치지 않는 신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왜 자신을 치는 이런 신을 따라나서느냐, 왜 이런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을 따라 나서느냐?

따라 나서보아야 너만 손해다. 그러니 너의 동서처럼 너도 그 백성, 그 신에게로 돌아가라고 말한 것이지요.

그러나 룻이 뭐라고 말합니까? 16-17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정말 놀라운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행동과 전혀 다른 신앙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모압백성과 모압백성의 신을 따라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나오미를 치신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것이지요. 어떤 일이 있어도 나오미를 떠나지 않겠다고 합니다. 나오미를 떠나지 않겠다는 것은 단순히 효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룻은 어머니, 즉 나오미의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경험했습니다.

그런 하나님 백성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오르바가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 간 것과 비교해서 룻의 말을 보게 되면 룻이 말하는 것이 단순히 나오미를 따라 효성을 다하겠다는 의미가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오르바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엘리멜렉집에 시집을 와서 모압과 그 신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다시 원래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룻은 돌아 간 것이 아니라 죽음의 길로 기꺼이 따라 나선 것입니다.

나오미는 룻의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쳤습니다. 룻의 결심은 어떤 말을 하더라도 바꿀 수가 없음을 안 것입니다.

대단한 역전이 일어났지요.

엘리멜렉과 나오미, 말론과 기론은 약속의 땅에 흉년이 들자 뒤돌아 보지도 않고 이방땅 모압땅으로 이사가 버립니다. 비록 약속의 땅,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지만 이들은 아주 풍성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흉년이 들자 곧장 모압지방으로 가 버립니다. 가버린 이유가 뭘까요?

모압땅에 가면 훨씬 더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던 모양입니다. 모압땅은 풍년이 들었을 가능성이 높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룻은 어떠합니까?

나오미에게 가진 것이 없어요. 거지입니다.

뿐만 아니지요. 흉년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가정이 박살나는 것을 목격했지요.

시아버지가 죽고 자신의 남편뿐만 아니라 동서의 남편도 죽는 것을 목격했어요.

재산도 다 날아가고 남은 것은 시어머니 나오미와 룻 자신과 오르바입니다.

여기에서 오르바도 떠나가 버렸지요.

이젠 아무것도 소망이 없고 희망이 없는 시어머니 나오미와 자기 자신밖에 없어요.

그런데 룻은 어머니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그래서 그는 앞도 안 보이는 아무것과 없는, 아무것도 모르는, 단지 아는 것이라고는 나오미의 여호와 하나님만 알고 베들레헴으로 들어갑니다.

여호와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권고하셨다는 이 말씀이 어떻게 활동하시는지를 오늘 말씀을 통해 목격했습니다.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는, 권고하셨다는 이 말씀을 통해 나오미를 움직이시고, 오르바를 원래자리, 우상숭배자리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룻을 엘리멜렉의 자리, 여호와께서 참으로 왕이심을 인정하는 자로 드러내셨습니다.

룻은 이방여인입니다. 모압여인이지요. 그런데 사사시대에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다 자기 소견에 옳을 대로 행하는 가운데 이방여인 룻만은 여호와가 왕이심을 인정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들어옵니다.

이렇게 되면 룻을 통해 이스라엘은 어떤 자들로 규정되어집니까?

여호와가 왕이심을 부정하는 자로 확연히 드러나 버립니다.

검은색 속에 한 개의 흰점이라고 할까요?

이렇게 되면 여호와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님이 분명해 지지요. 왜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들의 죄를 부각시키시고 이방여인 룻의 의로움을 드러내십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려주시기 위해서 이런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려 주시기 위해서이지요.

마가복음7장25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치신 사건이 나옵니다.

함께 보실까요?25절부터30절까지 봅시다.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방인입니다. 이들은 개 같은 자들입니다. 구원이 없는 자들이지요.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하지 어느 누가 자녀들이 먹을 떡을 취해 개들에게 던져주느냐라고 하시지요.

지금이야 개들이 상전 아닙니까?

개를 안고 사람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어디 한 둘입니까?

예수님 당시에는 이것이 당연했던 모양입니다. 자녀의 떡을 취해 개들에게 주지 않습니다.

그러자 여자가 뭐라고 합니까?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말하지요.

예수님께서는 자녀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지요. 그런데 이 여인은 아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말합니다.

자식에게서 아이로 넘어 갔다는 말은 감히 자녀가 먹는 부스러기는 먹지 못해도, 아이들이 먹는 부스러기를 먹을 수 있지 않습니까라고 자기 자신을 완전히 낮추지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은 개 같은 자로 말하면서 자녀의 떡부스러기가 아니라 그 다음 아이들이 먹는 부스러기도 먹을 수 있다고 말하지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이 부인되는 것입니다.

자신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고 오직 긍휼만 바란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런 믿음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서 주신 믿음에서 나오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이것만 말씀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27절에 자녀로 먼저라는 말이 있지요.

이 말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성경을 구원중심으로 본다면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본받자, 아니면 룻을 본 받자라고 하면 끝나지요. 그러나 그렇게 보면 지옥 갑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사건에서 중요한 사실은 자녀로 먼저라는 말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여기에 개라는 단어가 나오지요. 마태복음 7장6절에 보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라는 말씀도 나오고 누가복음16장에 거지 나사로가 나올 때에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핥더라라는 말씀에서 개가 나오지요.

그런데 마가복음7장에서 사용하는 개와 마태복음7장6절과 누가복음16장21절에서 사용하는 개의 단어가 달라요.

쉽게 말하면 수로보니게 여인사건에서 사용하는 개라는 단어는 강아지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7장6절이나 누가복음16장21절에서의 개는 사냥개, 즉 사나운 개라는 의미의 개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면 왜 수로보니게 여인사건에서 마가가 강아지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요?

이것은 유대인들이 개라고 하면 다 지옥 갈자, 저주받은 자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사건이 벌어지는 주변에 유대인들이 있을 것 아닙니까? 당연히 있겠지요.

그래서 이 말씀은 그냥 수로보니게 여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전하기 위해 하시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자녀들이 누구입니까? 유대인들이죠. 그런데 먼저 이들에게 떡이 가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신이 나겠지요.

이방인을 개라고 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마가가 이 본문을 기록하면서 예수님의 주되심을 제대로 전하고 있습니다.

개라는 단어를 강아지를 말하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 너희들이 아주 악한 사냥개 같은 자들임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유대인들이 사냥개가 되는고 하면 먼저라는 단어 때문입니다. 먼저가 있으면 뒤가 있다는 말이지요.

뒤에 뭐가 나왔습니까? 개가 나왔지요. 먼저는 자녀였는데, 후는 개였습니다. 그런데 개의 의미가 본문에서 더 부각되어지지요. 그래서 개가 후라면 먼저는 뭐가 되겠습니까? 당연히 개가 되겠지요. 그런데 상황이 역전이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면 수로보니게 여인, 즉 강아지는 사랑받는 개가 되고, 자녀는 미움 받는 사나운 개가 되어 버리지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강아지라는 단어를 사용하심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 너희들이 곧 개다, 즉 강아지가 아니라 사나운 개, 사냥개다. 즉 지옥갈 자들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이 개인데, 십자가의 긍휼로 구원받는 개 즉 강아지가 있는가 하면, 십자가의 긍휼을 거부하는 사냥개들이 있음을 이 말씀을 통해 알려 주십니다.

룻의 고백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십자가에 나온 고백입니다.

모든 것을 부인하는 자리에서 나오는 고백이 룻의 고백이지요.

붙들 것이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다. 그가 붙드는 하나님은 나오미를 치시는 하나님, 자신의 남편을, 시아버지를, 동서의 남편을 죽이신 하나님입니다.

죽어야 마땅한 죄인인데 예수님의 주님 되심을 전하게 하시기 위해 룻과 같은 고백,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은 고백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성도를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룻처럼 주님 되신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 주님께서 만드신 상황 속에서 십자가의 피만을 자랑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사용되어지는 자는 복 받은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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