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17 6장1-14

푸른 섬 2013. 1. 20. 15:47

새생명 가운데서 행함

로마서6장1-14

1,2절을 보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

이 말씀을 보게 되면 그 다음에 어떤 말씀이 나올 것인지를 짐작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또한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라는 말씀이 있다는 것은 성도이든 아니든 누구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복음의 말씀을 듣게 되면 이런 생각이 툭 튀어 나올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5장 말씀을 살펴보았듯이 아담이 죄인이 되어 사망이 왕노릇하는 세상을 가져 온 것이 오실자의 모형으로 제대로 살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5장20절에서 말씀하셨지요.

그러니 여러분, 십자가 복음을 안다고 하는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들으면 무슨 생각을 합니까?

그래 그럴 것 같으면 범죄를 더 저 지르자. 그래야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지 않겠느냐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아담을 보니 오실자의 표상, 제대로 보여 주고 있으니 우리도 아담처럼 사는 것이야 말로 예수님의 순종의 의미를, 은혜를 제대로 증거하지 않겠느냐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보는 것이 5장12절 이하를 제대로 본 것입니다.

그래야 6장1절 말씀이 나오는 것에 고개를 끄덕하지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태도는 성령을 받은 자만 나오는 태도가 아니라 성령 받지 못한 자도 동일하게 나오는 태도입니다. 우리가 죄인으로 드러나야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은 의를 전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면 오늘날 교회 다닌다고 하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당연히 성경을 잘못 보았다라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6장 1절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6장 1절 이하를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그야 뻔 하지요.

은혜를 더하려고 죄를 지을 수 없다.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로마서5장까지 살펴 볼 때 인간 개인이 율법을 지킬 능력이 있었습니까?

유대인이 등장했고, 이방인이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다윗, 아브라함, 아담이 등장했습니다.

이들 개인들의 행위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모든 인간들이 죄아래 가두어져 있다는 사실만 드러났지요.

물론 아브라함의 믿음에서는 믿음이라는 것이 아브라함의 주체적인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그의 믿음을 만드시고 그의 행위를 믿음으로 간주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금 로마서에서는 어떤 개인이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고, 율법을 지키지 않아 저주받는 말씀을 하지 않습니다.

공동체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담공동체, 다르게 말하면 다윗공동체, 또한 아브라함 공동체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실 아담공동체는 사망 아래 가두어진 인생임을 보여줍니다. 다윗을 통해 드러나는 공동체는 사망아래 있는 자가 죄의 가리우심을 받아 복 받은 공동체를 보여줍니다. 아브라함 공동체는 오히려 완벽한 믿음의 공동체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라는 것이 철저하게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만들어낸 믿음의 공동체임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물론 여기에서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세상 모든 사람을 이 속에 집어 넣어버립니다.

따라서 아담의 자손이 아닌 자가 있을까요?

없지요. 그렇다면 그들이 어떤 개인적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율법을 지킬 수 있을까요?

없다고 했잖아요.

열왕기상15장5절을 보면 “이는 다윗이 헷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

놀랍지 않습니까?

그런데 로마서를 살펴보니 다윗이 어떤 자로 드러납니까?

모태에서부터 죄인입니다. 그의 삶 전체가 죄인이라는 말이지요.

시편과 로마서, 열왕기 상의 말씀과 서로 맞지 않지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런 평가를 내리십니다. 그러나 다윗 본인은 평생 어떤 자로 살아갈까요?

죄를 가리움 받은 자로 살아 갑니다. 물론 우리아를 죽이고 나단 선지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이런 마음 눈곱만큼도 없어요.

그러나 주께서 다윗의 죄를 알게 하시고 그리고 장차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음을 알게 하셨지요.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평가와 같이 내릴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 본인은 다르지요.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들이 죄인이라고 전합니다. 다윗을 통해 유대인이나 헬라인 모두를 죄인이라고 해 버립니다.

그리고 나온 것이 바로 아담입니다.

결국 다윗도 아담 공동체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모두 죄 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역할을 다윗이 했습니다. 다윗이 회개해서 용서받은 것이 아니에요.

그렇게 된다면 이것을 율법에 순종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율법을 알잖아요. 죄범하면 희생제사 드리면 죄가 용서 됩니다. 그 간단한 것을 왜 다윗은 하지 않고 자신을 죄덩어리라고 말할까요?

율법에서 말하는 제사로는 죄용서가 안 된다는 것을 다윗은 우리아 사건을 통해 알게 되었지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고, 주께서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이 복 있는 자임을 다윗이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누구에게 해당되는고 하면 아브라함에게 해당이 되어요.

자 정리해 봅시다.

인간의 행위로 의롭게 될 인간 있습니까?

율법을 지켜 의롭게 여김을 받을 자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3장10절을 봅시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러니 이것을 다윗에게 적용하면 다윗은 그 순간에 범죄했지만 저주아래 있는 자입니다.

세상 모든 인간이 저주아래 있습니다. 그 대표자가 아담입니다. 아담이 아들을 낳아도 아담일뿐입니다.

그러니 인간은 죄아래 가두어져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오직 예수님의 피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한다는 말씀을 믿는 자들이지요.

그런데 문제가 발생하지요. 이렇게 되면 우린 죄만 지어야 하느냐? 다른 말로 하면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해야 하지 않느냐 라고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어떤 개인의 믿음이 있었습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브라함이 주체가 된 믿음이었습니까?

아니지요. 오히려 누가 주체입니까?

죄가 주체가 되어버립니다. 아브라함에겐 은혜가 왕노릇하지요.

그러니 어떤 개인이 죄속에서 은혜 속으로, 은혜에서 죄 속으로 왔다 갔다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지금 6장1절에서 14절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주님이 하실 일임을 믿어야 하는 말씀이지 너희 개인이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1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자라고만 말씀하시면 되는데 왜 자꾸 죄에 대해 죽은 자임을 각인시키느냐 말입니다.

그 이유가 간단합니다. 죄에 대해여 죽는 것이 우리가 노력했습니까?

기도했습니까? 전도했습니까? 금식했습니까? 헌금했습니까? 아니지요.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기라는 말씀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믿어라는 말씀이잖아요.

자 12-14절을 한번 봅시다.

이 본문을 사람들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성도는 이미 죄에 대해 죽었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자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래 ,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지요.

성도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 주지 말라.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우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지금까지 죄가 왕노릇했고, 다르게 말하면 마귀가 왕노릇 해서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었고, 저주아래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가운데 사는 자를 예수님의 피로 의롭게 하셔서 영생을 주셨습니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할 수 없는 존재인데, 왕이 따로 있는데 어떻게 이 말씀을 따라 살 수 있느냐 말입니다.

죄가 왕노릇 한때 인간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기도하고, 금식하고 십일조 하고, 어떤 것을 해도 죄의 종으로 살 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피로 의롭게 된 자들은 어떨까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기도, 금식, 헌금, 봉사, 전도,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않는것.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요.

다윗처럼 자신이 죄인임을 증거하면서 예수님의 피만을 전할 뿐입니다.

개인적 행위 이야기를 절대 끄집어내지 못하도록 14절에서 다시 율법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행위를 하자고 하면 반드시 법아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런 자는 은혜 아래 있지 않는 자입니다.

은혜를 더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라고 했을 때 그래 우리가 예수님처럼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되자라고 해 버리면 로마서5장까지 하신 말씀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 버립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자신의 피로 의가 왕노릇하는 세상을 만드셨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행위가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행하라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너희 몸을 통해 예수님의 피를 전하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많은 목사들이, 아니면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이 오늘 본문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하고 가르치고 적용하는지 아시지요? 예수님의 피로 의롭게 되었으면 우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지요. 이것이 성경대로랍니다. 그러면서 의의 무기로 드리는 방법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랍니다. 다른 말로 하면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랍니다.

그래서 말씀을 지켜보려고, 어떻게든 말씀에 순종해 보려고 애를 씁니다.

이들에겐 십자가 사건은 아주 먼 옛날 과거의 일이요, 자신이 예수님을 믿을 당시에만 유용한 십자가의 피였을 뿐입니다. 이제는 자신의 노력과 애씀으로 의의 무기로 드리는 일만 남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한번 물어 봅시다.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죄의 종으로, 사망이 왕노릇하는 세상에서 살았지요. 이들은 사망의 명령을 따라 살았습니다.

자신들 나름대로 결정권이 있었고, 착한 일도 하고 했지요. 그런데 그 모든 행위가 사망에게 종노릇하는 행위였습니다. 과연 이런 말씀을 받아 드릴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피로 의롭게 된 성도는 무엇에 관심이 있을까요?

사망이 왕노릇 하는 자는 무엇을 해도 그 중심이 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로 의롭게 된 성도는 무엇을 중심으로 살게 될까요?

바로 예수님의 피입니다.

죄를 더 짓자고 하는 자의 중심은 자기 자신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중심이 아닙니다.

그와 동시에 죄를 짓지 말자라고 하면서 의의 종으로 살자고 하는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저에게 그들은 이렇게 반박할 것입니다.

분명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지 않느냐? 새생명 가운데 산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렇지요. 바로 예수님의 피를 전하는 자가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입니다.

그 모습이 바로 새생명 가운데 사는 삶입니다.

 

*홈페이지에 오셔셔 음성설교로 들어 보세요

http://www.woorigarak.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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