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21 8장1-11

푸른 섬 2013. 3. 17. 18:26

성령과 육신

로마서8장1-1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니라”

얼마나 반복해야 알아들을까요? 반복한다고 알아들을 것 같으면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실 필요가 없겠지요.

사도바울 자신을 예로 들어서 예수 안에 있는 자가 어떤 자인지를 7장7에서 25절을 통해 아주 제대로 보여 주었습니다.

7장21-24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성령 받은 사도 바울이 깨달은 내용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자신은 성경말씀을 늘 상고하며 말씀에 순종하려고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결국 자신은 말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탄식하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자신은 죄인중의 괴수로 말씀 앞에 밝히 드러나기 때문에 자신이 이제 지옥갈 수밖에 없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받은 자가 말씀을 품고 살아가는 가운데 드러나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이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는 인생이 됩니다.

사망의 몸에서 끄집어내 줄 수 있는 분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즉 사도바울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이런 상태, 즉 죄인으로 드러나는 상태야 말로 참으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를 두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라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씀을 사도 바울에게 그래도 적용시켜 보세요.

그 모습은 오히려 말씀에 의해 늘 정죄 받는 상황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이지 않습니까?

우리들은 정죄함이 없다고 하면 더 이상 정죄할 근거가 없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을 보면 오히려 정죄할 근거만 가득합니다.

죄인중의 죄인으로 드러나는 극한 상황입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예수 안에 있는 자요, 결코 정죄함이 없는 자의 모습입니다.

주님께서는 로마서를 통해 인간들이 꿈꾸는 구원, 영생, 생명, 성령을 가차 없이 부셔버립니다.

2절을 봅시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법과 법의 만남을 주선하고 계시지요. 생명의 성령의 법은 죄와 사망의 법을 품고 있습니다.

사도바울 개인의 신앙 속에 고스란히 들어있지 않습니까?

생명의 성령의 법, 즉 성령께서 적용하시는 법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는 분이 성령입니다. 그러니 성령의 법은 당연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하십니다. 2절 끝부분에 보면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라고 나와 있지요. 여기에서 너를 이라는 단어를 나를 이라고 고쳐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특히 너를 이라는 단어를 나를 이라고 고치면 1,2절 말씀의 의미가 확 더 다가오겠지요.

말씀에 의해서 사도 바울처럼 책망 받는 자, 곤고한 자로 드러나는 자야 말로 참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성도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 안에 있는 자를 정죄함이 없게 만드셨는지 볼까요?

3절입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번역이 참 애매하게 되었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신다고 하셨지요.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셨습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지요.

그다음에 나오는 육신의 죄를 정하사. 이 부분을 이렇게 고치는 것이 맞습니다. 죄에 대한 육의 죄를 정죄하셨다고 번역해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앞부분과 문맥이 맞지 않지요.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신다고 하셨으면 그 다음 나와야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했다고 나와야 하겠지요.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셔서 율법이 육신으로 하여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게 하셨다라고 되어야 하겠지요. 그래서 번역을 육신에 죄를 정하사라고 해버린 것입니다.

사실 육신에 죄를 정죄하사라고 번역을 해 주어야 하는데 8장 1절에 정죄함이 없다고 하니 번역을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을 정죄하셨다라고 번역해야 성령께서 하시는 일과 정확하게 일치가 됩니다.

사람들은 3절을 보면서 이렇게 보고 싶어 합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셨다.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셔서 육신의 죄를 없이 하셨다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번역하면 얼마나 깔끔하겠습니까?

그래서 많은 번역들이 이런 식으로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 버리면 무슨 문제가 발생합니까? 지금까지 문제 삼아온 주체문제가 또 나오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죄 문제 해결하셨으니 이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라는 질문이 나오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4절 이후에 나오는 말씀이 또 다시 자신이 주체가 되어 본문을 해석하게 되지요.

그런데 3절에서는 오히려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을 죄인으로 정죄해 버립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4절입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 바울이 영을 따라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율법의 요구가 어떻게 이루어졌습니다.

죄인으로 드러났습니다. 이것으로 끝입니까? 아니지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는 자로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은 이 땅 사람들은 모두가 다 죄인이라고 정죄하시는 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이지요. 이 사람이 영을 따라 행하는 성도입니다.

이들에겐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졌습니다.

5,6절을 봅시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앞선 7장에서 사도바울은 영을 따르는 자로 영의 일을 생각한 것을 말했습니다.

그러니 사도바울과 생각이 다른 자는 육신의 생각을 하는 자입니다.

이들에겐 사망밖에 없습니다.

로마서7장25절을 보면 생명과 평안이 있지 않습니까? 생명이 평안이 없는 자가 어떻게 감사가 나오겠습니까?

7절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의 생각은 율법을 지켜서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23장3절을 보면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지키려고 힘쓰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드러난 이들의 실상은 말만하고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의 평가지요.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그렇게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게 되면 우리들이 쉽게 알 수 있지요.

로마서8장7절을 보게 되면 육신의 생각은 어떠하다고 합니까?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고 하지요.

육신은 결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다고 덤볐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도 모두가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육신에 속한 자로서 정죄 받았습니다. 이들만 정죄 받은 것이 아니라 온 세상사람 모두가 다 정죄 받았습니다.

따라서 육신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했습니다.

육신에 속한 자가 어떤 자라고 했습니까?

남편이 죽은 줄 모르는 자입니다. 이런 자들은 죽은 남편 불들고 함께 살려고 하는 자입니다. 즉 율법대로 살려고 하는 자입니다. 자기 자신이 정죄 받은 자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9절을 봅시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영입니다.

예수님의 영이 있는 육신은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습니다. 영에 속한 자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은 반드시 육신을 품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십자가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여기에 나오는 육신을 나쁜 것이라 해서 버리려고 합니다.

육신을 버리는 순간 그에겐 더 이상 십자가가 필요 없습니다.

왜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할까요?

성령께서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10절을 봅시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이 말씀은 7장21-25절을 보면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입니다.

죽음과 생명이 공존하는 곳, 그 몸이 성도의 몸입니다.

그 몸을 영의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사도바울이 영의 사람이지요. 자신이 죄인으로 드러나고 예수그리스도만을 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을 영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11절을 다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사람들은 로마서7장8장을 보면서 인간구성을 영혼과 육체로 구분하려고 합니다. 아니면 육신, 영혼, 영, 혼 등으로 나누려고 하지요.

이런 생각을 한방에 날려 버립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이 말씀을 부활로 보시면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10절에서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러니 성령께서는 늘 죽을 몸을 살리시는 일을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지금도 자기 백성을 살리시고 계시기에 사도바울처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만 자랑하는 자들이 이 땅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 예수님을 믿는 자고 하는 사람들은 오늘 본문을 보면서 영에 속한 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따라 사는 자로 말씀을 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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