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4장39-42 말씀과 만난 여자

푸른 섬 2013. 10. 13. 20:27

말씀과 만난 여자 요한복음4:39-42

오늘 본문은 사실43절부터38절에서 이어지는 본문입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세례요한보다 더 많아졌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 정보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의도적으로 사마리아를 통과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남쪽 유다에서 북쪽 갈릴리로 가려면 베레아 지역을 통과해서 갔습니다.

유대인들은 북쪽 사마리아 사람들을 인간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열왕기하 17장에 나와 있습니다. 아수르 왕이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후 이주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아수르 여러 지역의 사람들을 사마리아로 이주시켰습니다. 물론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를 시켰지요.

결국 북 이스라엘, 즉 사마리아는 여호와도 경외하고 이주해 온 자들이 자기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을 섬기는 곳이 되었습니다.

 

또한 남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건축을 할 때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인 북 이스라엘 사람들도 함께 성전건축을 하자고 요청했습니다. 자신들도 이곳 사마리아로 오게 한 날부터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거절했지요. 이들은 혼혈에다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도 혼합종교가 되었지요. 그러니 이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지요. 한번 멸망당해 봤잖아요. 그 느낌 알잖아요.

 

결국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전건축을 방해하게 됩니다. 그러니 500여년이 지났지만 유대인들 머릿속에 어떤 것이 남아 있을까요? 철저하게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절대 상종해서는 안 되는 자들이지요. 느낌 아니까요.

 

그 이유는 지금 자신들이 로마의 지배하에 있잖아요. 왜 로마 지배하에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서입니다.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과 놀면 안 됩니.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시면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납니다.

그런데 참으로 공교롭게도 예수님께서 만나신 여자는 보통 여자가 아닙니다.

 

남편이 몇 명입니까? 여섯 명입니다.

여자가 율법을 모를까요? 알아요. 여자가 예수님과 대화하는 내용을 보면 구약 율법을 너무너무 잘 알아. 구약성경을 완전히 꿰고 있어요. 놀랍지 않습니까?

 

놀라야 되는데..... 지금 남편이 여섯 번째라도 성경지식은 해박하지요.

 

예수님께서 만나주신 여자는 바로 죄 많은 여자입니다. 이 여자는 우리가 보기에 특별히 우상을 섬기지는 않습니다.

분명 구약성경을 보면 이들이 혼합종교로 여호와를 섬긴다고 했지요.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여자는 특별한 우상숭배가 없습니다. 오로지 율법대로 살지 않고 자기 욕망대로 살 뿐입니다. 그리고 신기한 것은 이 여자도 메시야를 안다는 것입니다. 메시야를 알지만, 즉 자신을 죄에서 구원해 주실 분은 알지만 자신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여자일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께서 이 여자의 죄를 들추어냅니다.

예수님이 참으로 얄구짖지요. 얄구짖다는 뜻 알지요? 심술 굳습니. 여자를 구원해 주시려면 그냥 구원해 주시지 왜 이 여자의 죄 문제를 꺼집어냅니까?

그런데 여자도 대단합니다. 아니 뻔뻔하지요. 그래서 여섯 번째 남편이 있는 건가요?

여자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예배에 대해 질문을 합니다.

예배란 희생 제사를 말합니다. 자신의 죄를 선지자가 지적해 주었으니 희생제사드리면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성경을 참으로 잘 알지. 죄를 깨닫게 되면 성전에 가서 제자 드리면 된다고 했잖아요.

 

지금 이 여자의 태도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자는 성경을 알아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요. 그래서 자신의 죄가 드러나면 제사 지내면 된다고 알고 있어요. 이게 사마리아 여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모든 유대인들도 동일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주 쉽게 하나님을 믿지요.

죄가 드러나면 희생제사 드리면 끝.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생각을 깨어 버립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왔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영과 진리는 죄인들, 인간들이, 죄인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의 수준이 또 돋보입니다. 메시야, 그리스도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까지도 알고 있어요. 뿐만 아니라 영과 진리의 예배는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도 알고 있지요.

 

그러면 이것 안다고 구원받습니까?

구원 못 받습니. 제가 왜 갑자기 구원이야기를 꺼집어내는고 하면 사람들은 설교를 들으면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로지 관심은 내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없는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관심은 인간구원에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만일 구원받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다면 여러분들은 진짜 구원과 상관없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믿음은 다른 종교를 가보더라도 똑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주장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저들은 우상을 섬기지 않습니까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을 보시면, 예수님을 누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까?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이 누굽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아가는 자들, 제사장들은 날마다 여호와 하나님께 희생제물을 드리는 자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사실을 잊으시면 안 됩니.

 

예수님께서 만나주신 여자의 관심은 처음에는 물 이었어지요. 육적으로 필요한 물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어디로 넘어갑니까? 죄 용서로 넘어가지요. 죄용서가 되어야 구원이 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무엇을 알려 주셨습니까?

 

예수님 자신이 메시아임을 알려주셨지요. 즉 자신이 죄 용서하시는 분임을 알려 주셨지요.

 

드디어 죄인인 여자는 메시아 되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드디어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있게 되었지요.

 

그러면 이 여자가 그 다음 하는 행동이 어떤 행동이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죄 용서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무엇인지 말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오늘 우리들이 읽은 본문을 보게 되면 여자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동네에 들어가서 자신이 행한 모든 것을 자신에게 말한 예수님을 증언하였습니다.

자신의 죄를 예수님께서 낱낱이 들추어 내셨지요. 죄를 들추어내시는 예수님을 증언했습니다.

 

참으로 희한하지 않습니까?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할까요? 나 죄용서 받았습니다를 전하게 않겠습니까?

 

오늘날 교회 다니는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예수님의 피로 죄용서함을 받았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이 여자도 이렇게 말했으면 자신에게 얼마나 좋을까요? 부끄러운 과거를 덮어버리고 구원받은 자신만을 드러낸다면 자신이 얼마나 자랑스럽겠습니까?

 

듣는 사람들도 모두 이 여자에게 집중하지 않겠습니까? 간증을 들어 보면 다 이런 식이지.

자신이 얼마나 죄인이었는데 이제 용서 받아서 이렇게 의롭게 되어 구원받았다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듣는 사람들은 그 사람을 부러워하지요.

 

그런데 이 여자가 사는 동네 사람들은 이 여자에게 관심을 가집니까 안 가집니? 이 여자에게 관심 없어요.

 

이상하지요. 오늘날 간증 하는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사람들이 관심이 많을까요? 그러니 그런 사람들은 이 여자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만나 주신 적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만나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 입에서는 이 여자와 전혀 다른 간증이 나오는 것입니다.

42절을 보면 여자는 빠지라고 하지요. 물론 이들의 신앙이 진정한 신앙이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들을 사용하시기 때문에 여기에서 이들의 행동을 통해 예수님께서 만나 주신, 구원을 베풀어 주신 여인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를 미리 앞당겨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 여자의 삶이 이후 베드로나, 스데반 집사님이나 사도바울 같은 삶이 되겠지요.

 

이사야 38장을 보면 히스기야 왕이 병들었다가 다시 회복된 사건이 나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히스기야 왕이 죽을 것이라고 예언을 하지요. 그러자 히스기야 왕이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했습니다. 자신이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해 달라고 하면서 심히 통곡했습니다. 그러자 이 기도를 여호와께서 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수한을 15년 연장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히스기야기 신이 났습니다. 바벨론 왕 므로단 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나았다 함을 듣고 글과 예물을 보냅니다. 히스기야 왕이 더욱더 신이 나서 이들 사신들로 말미암아 기뻐하여 유대의 모든 소유를 이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결국 이 일로 히스기야 왕이 보여준 모든 것이 바벨론으로 옮긴바 될 것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고 결국 유다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목사들이나 성도들은 이 본문을 보면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본받자거나 아니면 겸손을 배워야 한다고 설교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본문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교만하지 않아야지라고 생각한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38,39장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히스기야 왕이 곧 여기 있는 우리 자신이라는 말입니다.

죽음에 처하면 살고 싶다고 기도하고 통곡하는 인간들, 그러면서 자신이 주님 앞에 어떻게 행했는지를 쏟아내는 인간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살려 주시면 어떻게 할 인간들이라는 말입니까?

자기 자랑할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모습은 앞서 언급한 간증하러 다니는 자들에게서 쉽게 찾아 수 있지요. 겉으로는 겸손한 것 같지요. 그러나 그들이 전하는 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자처럼 희생제물 되시는 예수님입니까?

 

무슨 말인고 하면 자신들이 죄인임을 전합니까 아니면 자신들이 의인임을 전합니까?

여자는 동네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임을 전했습니까?

예수님을 만났는데 예수님이 내 죄를 말씀하시더라를 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는 자들은 자신의 죄를 꺼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용서받아서 지금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 되었는가를 전하지요.

 

오늘 설교 제목이 말씀을 만난 여자입니다. 예수님이 여자를 만나 주셨지요.

예수님께서 만나 주신 여자는 어떤 모습으로 드러납니까?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모습으로 드러났습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모습이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자신의 죄를 말씀하신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즉 자신의 죄를 말씀하시는 분이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심을 전한 것입니다. 이 여인은 구원받은 자신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죄인을 찾아오신 예수님께 관심이 있지요.

그러나 자신의 체면 차리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까?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이미 예수님을 믿으면 어떻게 되어야 된다는 기준을 갖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았는데도 이미 기준이 있어요. 이 말은 곧 이들이 갖고 있는 예수님을 믿는 모습은 다 무엇이다. 우상 숭배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사람이 차분하고, 점잖고, 착하고, 손해 줄 알고, 봉사 잘하고, 기도 잘하고, 전도 잘하고, 성경 열심히 읽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사람이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습니까?

 

성령 받지 못한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성경에 나옵니다.

이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래새인들은 누가 봐도 먼저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 누구나가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 앞에 날마다 자신의 죄가 드러나는 자는 예수님 앞에 나의 죄인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고 합니다.

 

동네사람들이 여자, 너는 빠져라고 해도 여자는 삐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용서받은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는 지옥가도 마땅하다고 해도 네 그렇습니다. 저는 지옥가도 마땅합니다. 천국갈 자격없습니다라고 할 자들입니다.

 

그러나 나는 죄용서함을 받아서 이렇게 예수님을 믿고 삽니다라고 하는 자들은 예수님께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동네사람들이 너는 빠져라고 하면 삐질 사람들입니다. 너는 지옥가라고 하면 화를 낼 사람들입니다.

난 당연히 천국갈수 있다고 확신하는 자들입니다. 오늘날 이런 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 예수님을 핍박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만나주신 사람들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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