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신 철지 일보 질문과 답변 이근호 목사

푸른 섬 2013. 12. 3. 15:20

①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오늘날의 목자들은 초림 때같이 핍박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성도들을 예수께 보내겠는가? 또 이단이라 하겠는가?

위 질문에서 ‘목자’란 소위 ‘목사’나 ‘신부’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하겠다. 하지만 위 질문이 성립되려면 찬찬히 조사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이 처음 오실 때는 오늘날의 목사나 신부는 아예 생기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목자’란 유대교(종교) 지도자를 말하고 ‘양’들이란 유대교 신자, 혹은 유대나라 백성을 두고 말합니다. 따라서 위의 질문을 유효하게 성립하려면 예수님이 다시 오셨다는 요건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회가 국가헌법이 구약 율법적인 형식으로 조성된 종교적 국가, 내지는 종교적 사회이어야 한다.

이런 체제 안에서만 예수님을 대면할 ‘양-목자’이라는 권력관계 갖추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에 오늘날의 교회나 교계가 율법 체제나 혹은 형식적 법적 체제 보다 더 근원적으로 돈과 자본 형상의 요건을 갖추었다고 한다면 ‘양-목자’의 관계가 아니라 투자자와 전문 경영인의 관계가 성립된다.

여기서 교회 투자자란 헌금을 정기적으로 내는 교인들이요, 전문 경영인이란 교회를 교인들의 종교적 욕구를 실적으로 내놓은 교회 사업체를 운영하는 자들이다. 교인들의 종교적 욕구란, 신이 과연 실제로 존재하는 지를 기적과 기적의 연결고리로서 목격하고 체험하고 싶어 하는데, 그것은 곧 자신들의 교회가 이 땅에서 세력을 키워보는 실적을 보고 싶어 하는 욕구하다. 교회 전문 경영인, 곧 목사나 신부는 그들의 욕망과 욕구를 현실화시키기 위해 예수 이름을 팔아서 각종 신기하고 놀라운 사회 영향력을 확장시켜 나가는 이벤트를 개발하는 자들이다.

자, 이런 교회에 예수님이 오신다면 그들에게 책망받기 이전에 먼저 그들을 책망하시게 된다. 이는 과거 예수님의 초림 때에 실제로 성경에서 예수님의 핍박받음은 예수님 쪽에서 먼저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들을 비난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예수님이 사형 당하신 것은 그들이 궁극적으로 사수하려고 한 그곳이 공격했기 때문인데 그곳은 바로 신과 교신이 유일하게 가능하고 믿고 있었던 (이곳은 기도하는 집이다) 그 성전 자체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역시 오늘날 교인들이나 목회자들이 교계들이 신과 수시로 교신과 교류가 가능한 그 무엇에 대한 공격적 언사나 발언을 쏟아내실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비(非)-복음적 종교성이 집결한 그 무엇이다. 곧 ‘지성이면 감천이다’는 사고방식이다.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한다는 무속신앙적 바탕 위에서 오고가는 돈과 신에 대한 아부성 물질이 쌓여 있는 것, 바로 그곳을 예수님께서 피 묻은 손을 내밀면서 고발하신다.

교인들의 축복에 대한 희구와 바람은 고객 만족해야 장사가 된다는 사업정신에 입각해서 목회자들도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고 보답하게 되어 있다. “성의나 정성이 드린 만큼 복을 받습니다”는 상호 인정하는 협약에 의해서 교인들은 세상 성공을 고대하면서 예배당에 엎드린다. 돈이 없는 자는 기도나 교회 봉사로서 미진한 부분을 채워서 놀라운 기적을 맛보려 한다. 하지만 마태복음 16:4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신다. “세상이 나에게서 기적이 나타나기를 원하나 내가 너희에게 보여줄 요나의 기적이다”고 말이다. 즉 십자가 죽음, 이것이 이 세상이 얼마나 악하고 음란한 세상에서 인간들이 살고 있는지를 최종적으로 밝히는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에 있어 이 세상적인 축복 기대성은 ‘자기 의(義) 추구’라는 보다 깊이 있는 죄악의 현상을 소개하고 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즉 비록 기복신앙을 정죄하고, 한국 교회의 세속화를 비난하고 스스로 이웃을 사랑하며 겸손하고 봉사하고,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고 희생하고 예수님을 본받아 겸손과 경건의 삶을 산다할지라도 말씀 앞에서는 그것마저 자기 의로 교묘히 위장되는 육신의 고유한 위선의 힘은 어느 인간도 벗어날 수 없음이 탄로 나야 한다는 말이다.

그 어떤 인간도 행함으로 의인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의 영이신 성령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말해서 예수님의 책망은 오직 십자가 흘리신 사건에 근거해서 예수님과 우리 자신을 비교하면서 책망하게 된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7-8)

모든 인간은 예수님 앞에서 누구나 죄인 중의 괴수다. 따라서 십자가 피 앞에서 자신이 죄인됨을 인정하는 자만이 성도다. 그 외는 예수님의 눈에 다 이단이다. 성도는 자신이 이단 아님을 내세우는 자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한다. 기준은 오직 십자가 피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② 추수되어 가는 자와 추수되어 가지 못하는 자 중 누가 알곡이며, 누가 가라지인가? 누가 이단이고 누가 정통인가? 추수할 밭은 어디인가?

추수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 벌어진 일에서 그 대표적 사례가 나온다. 즉 사마리아 여인이 물 길으러 왔다가 예수님이 오실 메시아인 것을 알게 된 경우를 말한다. 신약에서 ‘추수 때’를 언급한 것은 ‘이미’ 심판이 개시되었음을 말씀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이 알곡 생산 주체자는 오로지 예수님이라는 점이다. 비록 12제자가 추수 작업에 참여하지만 그들의 고유 능력이 아니라 모두 예수님에게 나온 능력에 의해서만 그들이 추수를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알곡 생산 자체가 이미 심판이 곳곳에 실시되고 있다는 징후가 된다는 점이 중요한 점이다.

알곡을 가라지와 비교해서 예수님이 언급하신 것은 알곡이 스스로를 알곡이라고 지칭할 수 없고 가라지가 자진해서 “나는 가라지입니다”고 최종적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점을 밝혀주기 위해서이다. 즉 알곡과 가라지의 구분은 제 3의 인물, 심판자의 손길이 개입되는 경우에 의해 결과적으로 밝혀질 상황이다. 어느 누구도 알곡과 가라지 중에 임의로 골라잡을 자격이나 권리가 주어져 있지 않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심판(분류작업)은 모든 인간의 기대와 호응과 부응을 배제하고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만이 아시는 기준에 의해서 실시되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본 자가 없다. (요 1:18) 따라서 어느 누구도 하늘의 기준을 알 자도 없다. 모든 인간은 땅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요 3:31-32)

심판은 하나님 쪽의 일방적 조치다. 누가 알곡 되었다고 해서 가라지가 그 자를 향하여 비난하고 불평할 수 없고, 누가 자신이 알곡 되었다고 해서 자신의 노력이 알곡 됨에 보탬이 되었다고 주장할 수가 없다. 알곡과 가라지는 사전에 철저하게 봉쇄되어 있고 오직 나타남으로 인하여 비로소 밝혀질 사항이다. 이 밝혀짐은 새로운 개념을 동반케 하는데 그 개념이 기존의 인간 세상에서 통용되는 그 개념과 정반대라는 점에서 사람들을 기이하게 여기게 만든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 11:25-26)

이 대목에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와 ‘어린 아이’라는 개념이 서로 대비되면서 인간 세상에서 통용되는 지혜자와 슬기자가 구원에서 탈락됨을 암시한다. 그리고 ‘어린 아이’란 세상 어느 구석에 사전에 특별이 자리 잡고 있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활동에 의해서 새로이 생겨난 자를 ‘어린 아이’라고 새롭게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자라도 자기 자신을 향하여 ‘내가 구원받은 어린 아이다’고 해서는 아니 된다. 도리어 이렇게 고백해야 한다. “예수님이 계시를 주셔야 구원받은 어린 아이가 된다”고 말이다. 즉 ‘나’에서 ‘어린 아이’로 바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경유해야 해야 하는데, 예수님을 경유하는 그 과정을 통해서 ‘나는 〜 이다’는 논리 형식은 용납되지를 못하고 탈락된다. 예수님 안에서 모든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의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로다”(롬 14:8)

알곡이나 가라지도 이와 같은 취지에서 나오는 개념이다. 추수 작업이 이미 개시되었음을 통보하고자 예수님께서는 결과적으로 모든 인류를 알곡과 가라지로 분류 지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 어떤 인간이 심판 작업에 사전에 영향을 줄 요량으로 개입할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다. “누가 알곡이냐?” 혹은 “누가 가라지냐”

이 질문들은 다음과 같이 바꾸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어떤 식으로 알곡을 만들어 내시는가?” 혹은 “예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가라지를 만들어내시는가?”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로마서 9:21-23에 나온다. “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모든 인간들이 순종치 아니했기에 은혜를 주고 아니 주고는 예수님의 고유 권한이다. 심판이란 인간이 어떤 운명이 되느냐에 주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 이런 판결을 누가 내리시는가’가 주안점으로 이해해야 한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요 5:22-23)

따라서 이 예수님만이 심판주 되심과 그분의 일방적 조치에 의해서 구원되심에 공감하고 동의하고 환영하고 찬송하는 자만이 알곡이다. 이런 자만이 천국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다.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0-11)

이로서 특정 교단이나 특정 집단이나 특정 교회를 알곡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 교단이나 집단이나 교회 자체를 구원과 심판의 근거로 내세우는 것이기에 그것이 곧 가라지 현상이 집결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핍박받는다는 것을 근거로 알곡이 되는 것이 아니다. 알곡의 근거나 가라지의 근거는 공히 오직 주되심이 언약을 완수하신 분의 고유 권한에 주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