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69 제물

푸른 섬 2014. 4. 27. 17:42

제물

로마서1516

인터넷에 노란리본 달기가 유행입니다. 무사히 돌아오라는 의미지요. 배가 침몰해 수많은 사람이 죽어도 사람들의 생각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살아야 된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고 하면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 생각해요.

 

요한복음 11장을 보게 되면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 나사로가 죽었다고 살아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살리셨습니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11:25-26).

예수님이 부활이시오 생명이심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나사로를 살렸을까요? 그렇다라고도 할 수 있고 아니다라고도 할 수 있어요.

 

분명 예수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말씀하시기 위해 죽은 나사로를 살린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누가 믿었나요?

 

오히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 예수님을 죽이라고 모의합니다.

상당히 당황스러운 장면이지요.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렸으면 믿어야 할 것 아닙니까?

분명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안 믿을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고 하면 죽은 자가 살아나도 자신의 이익과 상관없으면 그 일은 자신과 상관없는 일입니다.

 

제가 뉴스를 보면서 놀란 것이 무엇인고 하면 배가 침몰해 많은 사람들이 죽고, 실종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광고는 그대로 하는 겁니다. 광고를 왜 하나요? 돈 벌기 위해서 하잖아요.

텔레비전에서 광고방송하지 않으면 역시 회사를 운영하는데 도움이 안 되잖아요.

 

아무리 많은 사람이 죽어도 돈벌이는 해야 되지요.

 

제일 돈이 많이 남는 장사가 전쟁입니다. 그래서 전쟁을 일으키려고 고의로 민란을 일으키라고 골타가 지시를 하잖아요. 기황후를 보면.

 

돈이 된다면 다른 사람이 죽는 것쯤은 별 상관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처음 제가 말씀드렸던 살아야 된다는 말을 조금 바꿀 필요가 있지요.

배에 빠진 아이들이 살아야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야 되고 내 아들이 살아야 됩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생각을 배 침몰 사건을 통해 그런 식으로 표출하는 겁니다.

나는 살아야 된다.

 

아무리 마리아와 마르다가 사랑하는 오빠 나사라고 살았더라도 그것은 그 집의 즐거움이고, 오히려 나는 그 일 때문에 더욱더 죽음의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러니 이 위기를 벗어날 길은 예수를 죽이는 것 밖에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육신이 죽어도 살아도 상관없다는 말씀이지요.

죽어도 산자고, 살아도 산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나 마르다는 이 말씀이 안 들려요.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하지만 막상 내 눈앞에 사랑하는 오빠가 병들어 죽었어요. 배에 빠져 죽었어요.

믿음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주님은 꼭 우리에게 사건을 만나게 해 주세요. 그런데 이 사건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예측은 예수님이 능력 있으시니 예수님을 호출 했으니 오시면 오빠의 병이 나아 죽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입장에서는 죽으나 사나 산 자로 보시기 때문에 죽어도 자는 것이고 살아도 살아 있는 겁니다.

그래서 죽기를 기다렸습니다.

 

이것은 마리아와 마르다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사건이지요. 그러니 원망, 원망, 원망이 터져 나오지요.

왜 이제 오셨습니까? 주님이 여기 계셨다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텐데(21).

 

사건이 터지면 사람들의 본 모습이 나타납니다.

자신만 살면 된다는 입장인지 아니면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지.

 

이사야 4319-21절을 봅시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왜 하필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 마시게 할까요?

그냥 제주도서 나는 삼다수나, 백수산에서 오염되지 않은 물을 마시게 하면 안 되나요?

 

광야 이스라엘을 볼 때 이스라엘은 누구를 위해 바위에서 물이 솟았다고 생각했습니까?

자기들을 위해 물을 주셨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새 일을 행하실 때에도 똑 같은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지난주 출애굽기19장에서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 삼는다고 하셨지요.

 

예수님이 오셔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를 위해, 여호와를 찬송하게 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창조하십니다.

물론 바벨론 포로로부터 구원하신다는 말씀이 일차적입니다마는 이것은 곧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피조물을 만드신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새 이스라엘을 창조하시는 이유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해서 창조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바울은 제사장 직분을 감당한다고 하면서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일을 한다고 했습니다. 이방인이 제물이 된다는 말씀이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는 뒷부분에 나오는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에 눈이 가 버립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린 우리 구원을 챙기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누군가 복음을 전해 주었다. 그 사람이 제사장 직분을 감당했고 난 그 덕분에 구원받았다. 거룩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방인을 제물로 드린다는 표현에서 아담 안에 있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구원에 대한 탐욕을 제거해 버립니다.

 

제물은 반드시 피 흘리고 죽어야 됩니다.

 

로마서53절에서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한다는 말을 하면서 환난을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고 했습니다.

왜 율법과 믿음이야기 하면서 환난이야기가 튀어 나옵니까?

 

믿음과 율법이 만나면 가해자와 피해자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왜 제물이 되는가? 그것은 가해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도 물론 제물입니다. 주님이 만드신 제물, 이방인들도 역시 주님이 만드신 제물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물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들에겐 가해자가 생깁니다.

어떤 종류의 가해자인고 하면 율법과 관련 있는 가해자입니다. 이들은 항상 자기가 사는 것이 우선인 자들입니다.

 

갈라디아서 417절을 보면 열심 내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갖고 나오는 것은 율법입니다. 율법이라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누가 감히 거부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열심을 내는 목적은 자기 종 삼는 겁니다.

 

배가 침몰해 사람들이 죽으면 사람들이 갖고 나오는 것이 무엇인고 하면 인지상정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감정을 끄집어냅니다. 이곳에 십자가의 피는 들어갈 자리가 없어요.

십자가의 피를 갖다 되면 어떤 꼴을 당할까요?

 

꼭 살아서 돌아오라는 리본을 달지 않으면 마치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처럼 느끼도록 만들어요.

 

그저께 어떤 학교에 갔는데 한 학생이 조문 복장을 하고 학교에 왔어요.

엄마가 입혀 주었답니다.

 

이런 분위기속에 마귀가 우리를 집어넣어요.

 

그러면서 저들은 묻습니다. 만일 네 아이가 죽었다면 어떻게 할거냐요 말입니다.

네 부모가, 네 아내가 네 남편이 죽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씀이 튀어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초상집에 가서 이런 소리 해 보세요. 미친놈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돼지에게는 진주를 던지면 안되지요.

 

사무엘상17장을 보게 되면 다윗이 골리앗을 죽여 블레셋에 대해 승리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다윗은 할례 받지 못한 블레셋 사람들이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큰형 엘리압은 다윗에게 노를 발했습니다. 너는 교만하고 네 마음은 완악하다. 넌 지금 전쟁을 구경하러 왔다고 화를 냅니다. 블레셋 사람 골리앗도 다윗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왔다고 하면서 그들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17:45)

 

이렇게 말했다면 그 다음 다윗에게 무기가 있어야 할까요 없어야 할까요? 없어야 하지요.

그런데 그가 평소 양칠 때 사용하든 물매와 돌로 골리앗을 죽입니다.

 

물맷돌을 잘 사용하는 사람이 그 당시 다윗 한 사람 밖에 없었겠습니까?

양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다 물맷돌 전문가입니다. 사사기 2016절을 보면 물맷돌 전문가들이 칠백 명 정도가 나옵니다. 그것도 왼손잡이만. 목표에 백발 백중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다윗은 별거 없는 소년일 뿐입니다.

그러니 큰형 엘리압에게 무시당하고 또한 골리앗에게도 조롱당한 겁니다.

 

제물의 모습은 이런 모습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의 모습이지요.

전쟁이 어떤 성격의 전쟁임을 아는 자입니다. 자신의 소속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임을 아는 자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평범해요. 별로 다르지 않아요.

 

성도가 이 땅에 살아가는 모습이 그렇습니다.

그냥 남처럼 똑 같이 살아요. 돈 벌고, 결혼하고, 자식 키우고.

 

그런데 사건을 만나면 달라져요. 보는 시각이 달라요.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지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을 믿어요.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이 땅에 전부라고 생각하고 살아가요. 마치 마리아와 마르다처럼. 그러니 땅의 것이 없어지면 난리 법석을 떨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이 전부니 말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 땅이 오히려 잠시 들리는 정거장에 불거합니다.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면 안개의 역할을 제대로 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안개 아니라고 자꾸 우기면 곤란하지요.

 

성령 안에서 성도는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한 제물입니다. 제물이면 제물답게 죽어야 하지요.

제물 아닌 자들은 죽지 않으려고 이 땅에서 발악하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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