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교회와 꿈꾸는 교회
고린도 전서 1장1-3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형제가 되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 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았다.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이라고 했을 때 우리들 마음속에 그려지는 교회상은 어떤 모양입니까?
칼빈은 그의 고린도전서 주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만이 오로지 본성적으로 부정한 인간들을 성화시킬 수 있다’
‘우리가 복음으로 부르심을 받아 부끄러움 없는 생활을 하게 될 때에 실제로 우리가 성화되어야만 우리의 소명이 유효적이 될 것이다’
칼빈은 고린도 전서 1장1-3절을 주석하면서 하나님의 교회를 규정할 때 이런 식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복음으로 부르심을 받아 부끄러움 없는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의 부르심이 유효하게 되는 걸까요?
부끄러움 없는 생활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이 떳떳하다는 말이지요.
꼭 누구를 보는 것 같습니까?
바리새인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누가복음 15장1,2절을 보면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이렇게 평가하는 기준이 무엇일까요?
자신들은 죄인과 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자신들은 의롭다는 것이지요. 다르게 표현하면 자신들은 결코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누가복음16장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들을 때 저들이 비웃었지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린 그렇게 불의하게 살지 않는다는 겁니다.
어떻게 주인의 돈을 자기 마음대로 조작해서 자기 살길을 찾을 수 있는가?
그런 짓은 하나님 말씀에 어긋 난 짓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영역에서는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행위라는 겁니다.
누가복음18장9절 이하에서 바리새인들의 그 당시 모습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감사의 대상이 분면 하나님이지요. 그 뿐만 아니라 그의 삶은 누가 보아도 부끄럽지 않는 삶입니다.
저는 담배도 피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고, 십일조 정확히 내고, 주일날 예배 빠지지 않고, 하루에 성경 두 장씩 읽고, 삼십분씩 기도하고, 한주에 한 끼는 금식하고, 불의를 행치하고, 간음하지 않고, 술집에 가지 않고, 뇌물을 받지도 않고 주지도 않는 삶을 살게 해 주셔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마 우리 가운데 이렇게 사는 사람이 있다면 부끄럽지 않는 성화의 삶이 아닐까요?
그런데 주님의 평가가 어떻습니까?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은 자신을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는 세리였습니다.
칼빈처럼 성도를, 교회를 그런 식으로 정의 내린다면 주님의 평가는 간단합니다.
그런 모습이 자기를 높이는 모습이다.
이렇게 말하면 칼빈은 이렇게 반박하겠지요.
바리새인은 교만했지만 나는 오로지 주님의 은혜로 그렇게 살았노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부끄러움이 없는 생활이라는 용어를 끄집어냈다는 것 자체가 십자가의 피를 조롱하는 겁니다. 비웃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8장에서 하신 비유는 단지 바리새인의 교만을 지적하기 위한 비유가 아닙니다.
이것은 바리새인의 교만의 문제를 지적한 것이 아니라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이 갖고 있는 본성, 죄의 모습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우린 쉽게 바리새인들의 교만에 대해 문제 삼으면서 우린 교만하지 말자라는 식으로 이 말씀을 적용할 수가 있지요. 그러나 이 말씀은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항상 자신을 높이는 자라는 것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성도는 부끄러운 없는 생활을 사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늘 부끄러운 생활이 드러나는 삶을 사는 겁니다.
제가 고린도 전서를 시작하면서 왜 칼빈 이야기를 끄집어냈는고 하면 사람들은 교회라는 것을 생각할 때 아주 완벽한, 정말 부끄러움 없는 모습을 꿈꿉니다.
예를 들면 예배당을 생각해 봅시다.
지난번에 터키를 갔을 때 성소피아 성당과 그곳에 있는 이슬람 사원을 구경했습니다.
성소피아 성당은 화려함과 웅장함이, 이슬람사원은, 웅장함과 신에 대한 경외감이 담겨 있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터키 지역을 이동하면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각 동네마다 있는 이슬람 사원이고, 그리스 지역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리스 정교 예배당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그리스정교당을 들어가 보니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 줍니다.
사람들이 왜 예배당을 이렇게 화려하게, 웅장하게 지을까요?
절간도 마찬가지이지요.
이번엔 러시아 정교회건물을 들어갈 볼일이 있어서 들어가 보니 역시나 마찬가지입니다.
가톨릭성당도 그렇습니다.
그러면 루터교는 어떨까요?
내부는 매우 소박한 듯하지만 역시 신이 함께 한다는 느낌을 인간들에게 주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어요.
그렇게 멀리 갈 필요가 없지요.
우리 주변에 있는 예배당을 들어가 보면 기도하고 싶어지고, 하나님이 여기에 함께 하신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지 않나요?
혹시 기회가 되신다면 꼭 한번 들어가 구경해 보세요.
그곳을 안 들어가 본다고 의인되는 것도 아니고, 들어간다고 의인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한번 들어가 보면 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어떤 식으로 발악을 하는지 목격할 수 있는 현장이 됩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도 부끄러움 없는 장소가 되어야 되겠지요.
감히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이 내가 사는 곳 보다 형편없으면 부끄럽잖아요.
우리들이야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없지요. 그러나 상황이 되면, 즉 돈과 권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죄인의 본성을 발휘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라 할 때 하나님의 교회는 분명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그들이 사는 지역이나, 민족이나, 직위와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주님이시오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주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이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요한복음6장53-58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이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말씀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죄인들은 교회상을 자꾸 정형화 시키려고 합니다. 규격화 시키려고 하지요.
어떤 법을 정해서 그 법대로 살아가면, 그 규칙대로 살아가면 교회라 부릅니다.
그런데 교회는 은혜와 평강이 있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민수기14장20-25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 그러나 진실로 내가 살아 있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온 세계에 충만할 것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골짜기에 거주하나니 너희는 내일 돌이켜 홍해 길을 따라 광야로 들어갈지니라”
출애굽기 4장2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장자라 하셨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장자입니다.
그렇다면 갈렙만, 여호수아만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마가복음1장11절을 보면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아들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장자는 오직 예수님 뿐이지요.
로마서에 의하면 성도는 양자들이지요. 장자를 증거하기 위한 양자입니다.
그렇다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장자가 아닙니까?
분명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장자라 하셨잖아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맞아요. 하나님의 장자 맞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역할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진짜 아들이 아님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아들역할, 하나님의 진짜 장자가 아님을 보여주는 장자 역할이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바로 왕처럼 열 번이나 여호와를 시험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애굽의 바로 왕과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과정이 광야생활이었습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만 너희들이 출애굽 했다는 말씀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만 높이기 위해 이스라엘을 광야로 내모신 겁니다.
이스라엘의 여호와의 아들, 장자됨의 역할은 바로 이것을 보여주기 위한 출애굽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성도를 출애굽 시키셨습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께서 먼저 마태복음2장에서 출애굽을 하시지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렇게 말하니 사람들은 죄에서 구원되었으니 이제는 죄와 상관없는 자로 살아가겠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죄에서 구원하심의 목적은 죄에서 구원하신 분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세우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성도에게 항상 죄에서 구원하신분이심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란 항상 죄인으로 드러나야 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물론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도 주님의 몫입니다.
성도의 몫은 없습니다.
출애굽기에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신분이 여호와셨습니다.
그렇다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는 이스라엘을 만드신 분도 여호와입니다.
우리들이 고린도 전서를 보면서 생각해야 하는 것은 교회의 완정성이라든지 아니면 우리 삶이 부끄럼 없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지신분이 지금도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십자가로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마귀는 이일을 방해합니다. 그 방해 방법은 철저하게 선악과를 따먹은 티를 팍팍 내게 하는 방법입니다.
꿈꾸지 마세요. 꿈이 산산조각 나야 합니다. 아름답고, 신이 존재할 듯한 예배당처럼 나의 모습이 그런 모습이 될 거란 꿈이 깨어지는 자리가 은혜가 있는 자리요 평강이 있는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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