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강해

창세기43장1-15

푸른 섬 2007. 7. 16. 12:44
 

잃어버림

창세기43장1-15

하나님은 참으로 우리 인간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꿈을 통해 7년의 풍년과 7년의 엄청난 흉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머물고 있는 야곱과 그 아들들에게는 풍년에 대한 언급이 없이 곧장 흉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41장5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온 세상에 기근이 심함이었더라.


42장1절에서는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서로 관망만 하느냐?”


가나안 땅에도 7년간의 풍년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애굽이 흉년이 들때 주변 국들이 모두가 다 기근이 심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런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왜 하필 요셉이 애굽 땅에서 총리가 되어 애굽 나라를 이롭게 하는가?

왜 하나님도 믿지 않는 바로 왕에게 이런 축복을 내려 주는가?


그냥 가나안 땅에 머물게 하시면서 그곳에서 이러한 일을 행하시면 되지 않겠는가?

물론 아직 야곱과 그 아들들이 차지하고 있는 지역이 좁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하신다면 못하실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의 편리대로 일을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그 아들을 선택하신 목적은 결코 그들 삶을 윤택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그 아들들을 선택하신 목적은 오직 한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것을 어떻게 이루시는가를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놓쳐버리면 항상 어디에 마음이 빼앗기는고 하면 내 존재 자체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그래서 하는 질문이 왜 애굽 바로왕에게 그러한 엄청한 복을 내려주는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계속해서 야곱이 머무는 곳에 기근이 심했습니다.

시므온을 잃어 버린 댓가로 곡식을 사 왔지만 그 곡식 마저 다 먹어 버렸습니다.


야곱 입장에서는 시므온도 잃어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즉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아마 야곱이 요셉과 베냐민 다음으로 사랑한 자식이 시므온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베냐민마저  죽게 할 수 없다고 하여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내려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에 대해 르우벤이 자신의 두 아들의 목숨을 담보로 내 놓지만 야곱은 베냐민마저 잃을 수 없다고 강경하게 말합니다. 42장38절을 보면 야곱이 요셉과 베냐민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가나안땅에 기근을 내립니다. 결국 곡식을 다 먹게 되니 야곱이 자식들에게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라고 요청합니다.


시므온을 구하고 양식을 더 구할 수 있도록 이전엔 자식들이 아버지 야곱에게 요청하였지만 이젠 야곱이 자식들에게 양식을 사오라고 요청합니다.


아마 베냐민이 굶어 죽는 것에 대한 걱정이었을까요?


그러나 유다가 대답합니다.

아우 베냐민이 함께 하지 않으면  결국 총리의 얼굴을 보지 못하며, 베냐민이 함께 가면 아버지를 위하여 양식을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6절에서 야곱이 역정을 냅니다.

왜 아우가 있다고 해서 나를 해롭게 하느냐라고 말입니다.


이제 유다가 나섭니다.

르우벤이 자신의 두 아들의 목숨을 내 놓았지만 야곱은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유다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내 놓습니다.

9절입니다. 

“내가 그의 몸을 담보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 그를 물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그러자 야곱이 허락을 합니다.

그러면서 야곱은 선물과 이전 자루에 든 돈의 두배를 갖고  자식들을 애굽으로 내려 보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14절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야곱이 어떤 인물입니까?


어떻게 잃게 되면 잃으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여기까지 몰아가신 것입니다.


라헬을 잃어 버리고, 요셉도 잃어 버리고, 스므온도 잃어 버리고, 이제 먹을 것이 없어 하나 남은 베냐민 마저 잃어 버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야곱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야곱으로부터 모든 것을 뺏앗아  버립니다.


왜 이렇게 모든 것을 뺏앗아 버릴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이 인간이 이루는 것이 아님을 알려 주십니다. 인간은 눈꼽만큼도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시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이런 야곱을 사용하셔셔 자신의 언약을 어떻게 성취하시는지를 보여주십니다.

잃어버림을 통해 언약을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창세기38장에서 유다와 다말 사건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다말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유다의 관심은 오직 셀라의 생명입니다.


엘과 오난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죽었다는 것을 몰랐던 모양입니다.

알았다면 자신이 동일한 범죄를 저지르겠습니까?


무슨 범죄 말입니까?

셀라를 통해 자식을 나아 엘의 씨를 잇게 해야 하는데 유다는 오직 셀라마저 죽을까 염려하여 다말을 쫓아 버리지요.


그렇다면 사실 유대도 하나님 목전에 악을 행했기 때문에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유다는 죽이지 않으십니다.


결국 며느리 다말은 모든 수치를 무릅쓰고 엘의 씨를 이어갑니다.

이 일에 대해 유다가 뭐라고 합니까?

38장 26절입니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기 아니하였음이로다.”

옳다는 말을 의롭다라고 해석해도 되고, 더 낫다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유다는 다말의 윤리적 문제를 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다말을 셀라에게 주지 않은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말이  창녀의 모습으로 자신과 동침하여 자식을 가진 것이 더 옳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두고 윤리를 거론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수혼제도 문제를 삼아야 하고, 야곱이 두 아내와 첩 둘을 거느린 것도 문제 삼아야 합니다. 유다가 창녀와 동침한 것도 문제 삼아야 하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을 문제 삼지 않습니다.


문제 삼았다면 다 죽어야 하지요.

죄가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죄입니다.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다 죄인입니다. 그 당시 수혼제도가 없이 일부 일처로 살더라도 역시 지옥가야 할 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윤리를 꺼집어 내어 자신이 저들보다 옳다, 의롭다는 것을 내세우려 하는 것이 죄입니다.


지금 야곱과 그 자녀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지금 엘과 오난은 죽이셨지만 유다는 살려 두신 것입니다.


유다는 다말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알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이렇게 외부에서, 또한 희생, 즉 잃어버림으로 이루시는가를 조금 알게 된 것입니다.


다말은 가나안 여인입니다. 진멸의 대상인 가나안 여인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알아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 희생으로 우리가 잘 알듯이 다윗이 태어나며 예수님께서 태어나십니다.


그래서 지금 유다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내어 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요셉을 통해 요셉과 동일한 마음을 야곱과 모든 아들들이 갖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과연 야곱이나 야곱의 아들들이 주로부터 구원을 얻을 자격이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야곱도 드디어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라고 합니다.

자신이 마지막 붙들고 있는 것도 내어 놓습니다.


이제 야곱은 모든 것을 잃어 버렸습니다. 특히 유다는 셀라의 죽음을 염려하던 모습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습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주로부터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 자들입니다.


요셉을 누가 죽였습니까?

형제들이 죽였습니다.

왜 죽였습니까?


꼴보기 싫으니까 죽였지요. 왜 꼴보기 싫습니까?

자신들의 자존심을 건드렸지요.


그런데 그런 요셉이 오히려 형들을 살려 줍니다.

무엇을 근거로, 자신의 죽음, 희생을 근거로 말입니다.


야곱이 이전 얍복강가에서 만났던 하나님, 자신에게 져 주시기까지 낮아지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 저 주신 하나님으로 인해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축복을 받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축복은 바로 이렇듯 하나님의 낮아지심 희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축복을 받는 자들의 모습도 여전히 자신의 희생, 낮아짐으로, 자신의 죽음, 잃어 버림으로 그 축복받은 증거물을 내 놓더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그러합니다.


고린도후서5장17절에서19절을 보겠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누구든지, 가난하든 부유하든 건강하든 병이 들었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피조물은 자기 구원받았다를 자랑하는 피조물이 아닙니다.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자랑하는 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화목케 하는 복음은 예수님께서 저들의 죄를 대신하셔셔 죽으심으로 주어진 복음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은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을 위해 사는 자가 됩니다.


그 삶은 고린도 후서 4장11절에 나옵니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너무나 절묘한 말씀이지요.


예수님께서 성도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시기 위해 죽으셨듯이 새로운 피조물은 항상 예수님을 위해 죽음에 넘기우는 일을 당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4장12절입니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여러분의 삶이 늘 사망이 역사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되신 예수님의 증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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