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섬 2008. 9. 10. 10:59

은혜와 연보

고린도후서8:1-5

요즘 교회나 절간이나, 어디를 가든지 돈과 관련되어 있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돈으로 통하기 때문에 돈을 많이 바치는 자야 말로 믿음이 있는 자요, 희생하는 자요, 헌신하는 자라고 인정받게 됩니다.


어떤 바람, 소망에 대한 간절함도 돈을 얼마나 많이 바치느냐에 따라 그 간절함이 얼마나 큰가를 나타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돈이라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이 땅을 살아가려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족하게 되면 죽음에 직면한 것 같은 절망을 느낍니다.


그래서 요즘 우리들이 심심찮게 들리는 것이 생활고로 인한 자살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돈만 좀 있어서면 결코 죽음을 택할 리가 없습니다.

돈이 없기 때문에 죽음을 택하는 것입니다.


돈이 없는 것은 곧 죽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귀한 돈을 교회나 절간에 바친다는 것은 여간한 마음이 아니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들 마음속엔 믿음이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바치면 신께서 더 많은 것으로 축복을 내려 주실 것이야”라는 믿음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드러내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많은 교인들 중에 자신이 헌금을 왕창 하므로 말미암아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됩니다.


야, 참으로 믿음 좋은 사람이야. 믿음이 얼마나 좋기에 저렇게 많이 헌금을 할까?

없는 중에도 저렇게 많은 헌금을 하는 것을 보니 참으로 믿음 있는 사람이구나!


돈 있는 사람이 헌금을 해도 마찬가지 입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얼마나 부러운 눈으로 쳐다 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얼마나 축복해 주셔서 저렇게 헌금을 많이 할 수 있을까?



오늘날 교회의 헌금은 남과 비교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헌금이 되어 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탐욕을 가장 적극적으로 나타내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것을 부추겨 주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바로 목회자들입니다.

이들은 헌금을 부추겨서 믿음이 얼마나 좋은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나타내 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바와 전혀 다른 헌금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연보라는 것은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라는 말은 교회에서 아마 가장 많이 쓰는 단어일 것입니다.


우리의 공로 없이 십자가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것을 은혜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연보를 은혜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너무나 당황스럽게 하고 놀라게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연보, 헌금은 무엇입니까?


내가 수고해서 번 돈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여 드리는 것을 헌금이요, 연보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내가 수고해서 번 돈을 갖고 하나님께 감사하여 드린다는 것이 아니라 은혜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은 내가 수고해서 번 돈을 갖고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이 아니라 헌금 자체가 나의 공로와는, 나의 수고와는 무관한 주님의 은혜라는 말입니다.


자시 말씀드리면 연보라는 것은, 헌금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연보를 은혜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연보를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결코 은혜라는 표현을 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연보를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냥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러니 연보 많이 한 자들이 큰 소리 치고, 연보 적게 하는 자들은 얼굴도 못 드는 교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장로가 되려면 사업이 잘 되어야 하고, 돈이 많아야 됩니다.

돈 없는 권사는 주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정말 은혜와 전혀 상관없는 헌금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니 은혜와 정반대인 행위로서의 헌금, 연보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것에 대해 신물이 나서 교회에 나가지 않거나 헌금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교회를 옮겨 버립니다.


주님을 사랑해서 교회를 옮기거나 떠나는 것이 아님에 대해서 여러분은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제 우리 자신들에 대해 한번 생각해 봅시다.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은 은혜를 받았음이 어떻게 드러났습니까?

헌금이라는 것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이들은 엄청난 환난 가운데, 시련 가운데서도 넘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이 기쁨으로 연보를 했습니다. 물론 형제들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서 한 연보입니다.

엄청난 환난이 오게 되면 우리는 남을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만 보게 되고, 그 상황에 꽁꽁 묶여 버리는 것이 우리 인간들인데, 마케도냐 성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은혜를 받은 자들임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심한 환난과 시련 가운데서 형제들을 생각하며 헌금을 기쁨으로 했습니다.


이 뿐 아닙니다. 이들은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정도가 극한 가난입니다.


쉽게 말하면 겨우겨우 밥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가운데서 이들은 풍성한 연보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했던 것은 자신들의 행위를 내세우고자 한 것도 아니요 자랑하려고 한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하게 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은혜로 행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의 마음은 간절한 마음 한가지입니다.

이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이 은혜로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 하고 싶다고 간절히 원한 것입니다.


이런 겉모습을 보게 되면 처음 제가 비판했던 그런 헌금을 열심히 하는 자들이나 별반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은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행위가 아니라 말입니다.

이들은 은혜 받은 자신들 운운하지 않습니다.

간단명료하게 주님의 은혜라고 말해 버립니다.


5절을 봅시다.

“우리의 바라던 것 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바울일행이 바라든 바가 무엇입니까? 은혜를 받았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말해 놓고 그것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과연 은혜를 받는 자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냥 연보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일행이 바란 것은 연보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은혜였습니다.


이들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연보를 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자신을 주께 드렸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이들은 심한 환난과 시련 가운데 있었고, 극한 가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믿는 것은 주변의 환경도 아니요 돈도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오직 주님만 의지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주님께 의탁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주님만 믿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연보를 했다고 해서 자기 자랑을 내 놓을 것 같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면 연보를 했기 때문에 우리 믿음이 이렇게 좋다고 으시되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교회와 비교하면서 우리 믿음이 이렇게 좋음을 자랑하겠습니까?

만일 이렇게 되면 이들의 헌금은 은혜가 아니라 자신들의 행위요 공로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지신 주님의 은혜로 환난 가운데서, 시련가운데서 기쁨으로 살고, 극한 가난 가운데서 형제를 돌아 볼 마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연보라는 것, 헌금이라는 것은 은혜입니다. 그런데 제가 앞서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돈이란 이 땅에서는 생명과 같이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라는 자가 돈에 꼭 매여 살아간다는 은혜로 사는 자가 아니라 돈으로 살아가는 자이겠지요.


연보라는 것을 통해, 성도가 과연 이 땅에서 무엇을 믿고 살아가는 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은혜로 살아가는 자인지 아니면, 돈으로, 행위로 살아가는 자인지.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연보야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입니까?

그러나 성경은 기본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형제를 돌아보는 마음이 주님의 마음이라고 말입니다.

8:8절을 보게 되면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하기 위해서 연보에 대해 권면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은혜를 받았고 주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성도입니다. 라고 백날 말해도 누가 그것을 믿어 줄 것이냐는 말입니다.

나는 그래도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말할 때 예수님을 믿는 모습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이라는 것은 반드시 겉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일전에 제가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믿음이라는 것은 반드시 우리의 몸의 행동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이 말이 되었든, 행동이 되었든 말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믿음 있는 자이다, 사랑이 많은 자라고 이미 알려 졌습니다.

그런데 연보에 대해서는 인색하다라고 해 보세요.


에이. 우끼는 자들이네. 사랑이 많고, 믿음 있는 자라고 말해 놓고, 결국 자기 잇속만 챙기는 자들이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돈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주셔놓고, 우리에게 은혜로 사는 자인지, 믿음으로 사는 자인지 아닌 지를 분별해 내십니다.


우리 중 누구도 이것에 대해 간섭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아시고 당사자만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로 살아갑니까. 아니면 돈으로 살아갑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