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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강해 68 제사장 직분

푸른 섬 2014. 4. 20. 20:52

제사장 직분

로마서1516

이 은혜는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세상을 만들었을까요?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것은 나의 행복을 위해서일 것이다.

 

사무엘 상 8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합니다. 왕을 요구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모든 나라, 즉 다른 나라와 같은 왕이 자신들을 다스리게 해 달라는 겁니다. 참 희한하지 않습니까?

왕의 다스림을 원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렸지요. 인간들은 자신이 왕이 되고 싶다고 말입니다. 사실 인간들은 왕이 되고 싶어 합니다. 왕이 되면 라멕처럼 자기 몸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사무엘 상 8장에서는 자신들이 왕이 되려고 하지 않고 왕을 요구합니까?

왕이 있으면 다른 나라처럼 힘 있는 나라 속에서 자신도 왕 행세한다는 느낌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비록 자신이 왕이 아니라도 왕 행세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있고, 제사 드리는 성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왕을 요구했다는 것은 자신들이 왕이 되고 싶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고 하면 다른 신들을 섬겼다고 합니다. 우상숭배의 모습이 바로 왕을 요구하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상숭배를 왜 할까요?

출애굽기 32장을 보게 되면 아주 유명한 사건이 등장합니다.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받기 위해 시내 산에 올라가 있을 때 시내산 아래에서는 자발적으로 금귀고리를 빼어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그 금송아지를 여호와라고 명명합니다.

 

인도자 모세가 사라진 상황에서 왜 금송아지를 만들어 여호와라 명명합니까? 복 받기 위해서죠.

광야에서 길을 잃어버리면 어떡합니까? 자신들을 인도할 신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저주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우상숭배로 이어집니다.

 

사무엘 상 8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복 받기 위해서 왕을 요구했습니다.

다른 이방나라처럼 왕중심의 강력한 나라가 된다면 보다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잖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출애굽 시키신 목적이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서, 더 이상 고난 없고, 억압 없는 세상에서 살수 있다는 꿈으로 출애굽을 했습니다.

 

미가서35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들은 이에 물 것이 있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평강을 요구합니다. 갑자기 다 키운 자식이 수학여행 가다가 배가 침몰해 빠져 죽으면 어떡합니까? 자신의 평강이 다 깨져 버립니다. 그러면 곤란하지요.

 

그래서 선지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평강입니다. 선지자들은 백성들의 요구사항을 잘 알고 있어요.

백성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평강입니다.

교인들이 교회 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절에 다니는 사람이 절에 가서 돈 내고 절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성당에 가서 빕니까?

왜 죽은 사람들을 위해 제사지냅니까?

 

평강입니다. 그러니 선지자들은 돈만 주면 항상 평강을 외칩니다. 그런데 돈을 주지 않으면 저주를 퍼붓습니다.

 

오늘이 부활주일이라고 전 세계 교회가 지키고 있지요. 지난 주는 고난 주간이라고 어떤 사람들은 금식하고,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을 박혀 보기도 하고, 별별 짓을 다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목사들은 이렇게 하는 짓을 죄라고 말하지 않을까요?

 

이런 절기를 지키라고 왜 자꾸 조장할까요?

 

간단합니다. 평강을 원하는 자와 평강을 제공하는 자의 마음이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 자녀가 수학여행 가다가 사고를 당해 배에 갇혀 익사했다고 해 봅시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은 제발 살려만 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신의 선물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딸이 납치되어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엄마는 딸을 잃고 도저히 살수가 없어서 그 딸이 빠져죽은 호수에 빠져 죽었어요. 그런데 신이 다시 살게 해 주었어요. 딸이 죽기 두주 전부터 다시 살게 해 주었어요. 딸의 운명을 바꿀 기회가 주어졌지요.

 

수학여행가다 죽은 자녀를 둔 부모들의 심정이 그런 심정 아니겠습니까?

만일 예수 믿는 사람이 있다면, 고난 주간은 절대로 수학여행을 보내지 말아야지 이런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드라마 작가가 인간의 욕망을 제대로 보여줍니다.

 

주님은 성도들을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 하셨어요.

 

여러분 듣기에 좋아요 나빠요. 기분 좋지 않습니까?

 

출애굽기 196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조건이 붙습니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된다고 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자신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들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에 대해 어떻게 해석했을까요?

 

그렇습니다. 당연히 좋게 해석했지요. 제사장 나라라는 의미를 정반대로 해석해 버렸지요.

제사장은 자신이 죽어야 하는 자리입니다.

늘 죽음과 함께 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자들이 제사장입니다. 무엇 때문에 죽음과 함께 합니까?

무엇 때문에 피를 늘 보면서 생활해야 합니까?

 

죄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

이들은 항상 죄와 피가 만나는 자리, 죽음을 경험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신 것은 이스라엘의 죽음을 통해 이방민족들을 구원하시겠다는 주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복 받으려고 했어요. 그러니 이스라엘은 참 이스라엘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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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되셔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셨지요.

구약성경을 보면서 이스라엘은 제사장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났고, 오직 예수님만이 대제사장입니다. 그런데 로마서와 베드로 전서에서는 다시 성도를 제사장, 그것도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명명합니다.

 

역시 구약의 반복입니다. 우린 구원받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구원이라는 것이 내가 천국가게 하기 위한 구원이 아니라는 겁니다.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게 하기 위한 구원입니다.

이것은 사도바울 개인의 직분이야기가 아닙니다.

 

주님의 기능을 사도바울이 받아서 행하는 겁니다. 즉 은사라는 말입니다.

로마서 자체가 문제가 생기지요. 의인이 없다고 했잖아요.

 

사도 바울은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일을 제사장 직분이라고 했습니다. 우린 이 부분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그냥 전도하면 된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사도바울을 보게 되면 전도한 것은 맞아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셨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중요하지요.

 

로마서를 보게 되면 무엇을 전했습니까?

피를 전했지요. 예수님의 피를 전했습니다. 무엇을 지적하면서 전했습니까? 죄를 지적하면서, 죄를 하나하나 끄집어내면서 예수님의 피 능력을 전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분이 주님이심을 전했어요.

 

그런데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하니 자신의 신분이 마치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분의 변화가 있다고 착각합니다.

왕같은 제사장은 예수님이셨지요. 예수님이 왕같은 제사장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생이 예수님보다 나아야 할 이유가 없어요.

왜 나의 자녀는 수학여행 가다가 죽으면 안 됩니까?

왜 나의 부모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셔야 합니까?

왜 나의 자녀는 공부를 잘해야 하나요. 왜 나의 사업은 잘 되어야 합니까?

 

이미 주님의 피로 영생을 받았다면 어떤 일이든 왕같은 제사장의 일로 주님이 보시겠다는데.

무엇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믿지 못할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할 때 자신들이 율법을 어겼다고 생각합니까?

생각하지 않아요. 그들은 자신들이 우상숭배자라고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지요.

이런 모습이 물에 빠져 죽는 아이들, 부모들을 목격하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저들은 자신들이 반드시 행복해야 하고, 천국은 꼭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보세요.

말씀이 영생의 길이다고 아무리 외쳐도 말씀 보는 사람 없어요. 십자가의 피가 영생으로 인도합니다라고 아무리 외쳐도 저들은 외면해요.

십자가의 피를 믿지 않으면 지옥 갑니다 하면 조롱하고 비웃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 배를 타면 배가 침몰합니다라고 하면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할까요?

역시 안 믿지요. 지금 여행의 즐거움이 앞서는데 무슨 미친 소리 하느냐 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말이든 현재의 행복이 중요합니다.

신의 선물을 보게 되면 미리 경험한 여자 주인공이 아무리 이야기해도 남편은 제발 정신 차리라고 합니다.

 

사도바울의 외침이 그렇습니다. 성도의 삶이 그렇습니다.

믿음의 세계는 이미 경험한 세계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이 말씀을 안 믿어요.

 

말씀을 안 믿으니 지금 눈앞에 펼쳐진 사건 앞에 한탄하며, 하나님을 저주하며 원망할 뿐입니다.

살아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주장이지요.

 

이미 불 심판받아야 마땅한 자를 햇빛 보게 하시고 자식 키우게 하시고, 결혼생활하게 하시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 지 몰라요. 오히려 하나하나 제거해 가시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성도는 이것을 믿어요. 그래서 감사해요.

하나하나를 제거해 가시는 것에 대해 원망하다가 그것에 대해 오히려 감사합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제사장의 모습입니다.

 

제사장은 핏속에 묻혀 사는 사람입니다. 늘 죄와 만나는 역할입니다.

 

만일 우리가 말씀을 대하면서, 하루하루 살면서 십자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난다면 그런 삶이 바로 제사장의 삶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을 보세요. 죄가 드러난다고 해서 기 죽습니까? 왕처럼 말합니다. 두려운 게 없어요.

성도가 그러합니다. 주님이 따로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라는 주체가 성도에게 말씀 앞에서 자꾸 사라져요. 그러니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는 두려움이 없지요.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왕같은 제사장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자신의 피로 구원하신 것은 우리 행복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뺏어가면서도 주님은 자신의 피 흘리심을 헛되지 않게 하십니다.

 

수백 명이 죽었는데 사람들의 관심은 그들의 천국 가는가 지옥 가는가에 있지 않아요. 그들의 관심은 안됐다. 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 아들은 아니니 괜찮지. 이런 것 밖에 없어요.

판단 기준은 오직 땅입니다. 땅이 입을 버리고 우리의 몸을 삼켜 흡수하는 것이 진정한 현실임을 믿지 않아요.

 

얼마 전에 한국에 갔다 왔다고 했지요. 병원에 가니 그곳에 늙은 분들이 많아요. 한 분은 전 재산을 팔아 병원에 들어 왔대요. 병원에서 인생 끝낸다는 말이지요.

병원밖에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 주님의 주되심을 드러내시기 위해 긍휼의 그릇으로 우리를 부르신 그 부름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시지요.

물론 이 말씀 앞에 또 한 번 주님의 피 흘리심과 만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