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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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섬 2009. 8. 7. 01:07

하나님의 뜻
고린도후서1:1-11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다 이런 생각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저도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신들의 모임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를 고민하기도 합니다.
아니면 자신이 앞으로 어떤 직업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를 하나님께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인생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인생입니까?

그리고 여기에서 한가지 또한 걸리는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들 마음속에 이런 것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내가 만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한다면 내가 가는 길이 잘 될 것이고, 앞날이 멋지게 풀릴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또 다른 부류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뜻 물론 이 뜻이 잘못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이지요. 이것과 전혀 별개로 신앙생할 하는 사람을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저만치 멀리 두고, 자신의 현실적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이 가까이 있으면 귀찮고, 무담스럽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을 행하기에 하나님은 너무나 성가신 분입니다.

그러니 적절한 경계선을 두고 신앙생활하는 것이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자로써 얼마나 지혜로운가를 스스로 생각합니다.
목사들이 이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죄, 죄, 이야기 하지 말고, 주일날 교회에 나오면 적절한 뉘우침과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설교를 내 놓으면 교인들은 너무나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헌금도 많이 되어지고 말입니다.
저 아래, 가장 잘 산다는 동네 이야기를 들어 보면, 지금 그 교회 목사가 이런 목회를 한다고 합니다.
성도들이여 성경말씀을 너무 지나치게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예를 들면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지요. 그 말씀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이 땅을 사는 인간중에 마음속으로 음욕을 품지 않을 인간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그런 말씀을 그냥 마음이 너무 깊이 세겨두지 마세고, 그런대로 그냥 사세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사실 죄인들은 마음속으로 음욕을 품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왜 우리에게 이런 엄한 말씀을 하셨을까요?
마음속으로 음욕을 품어도 지옥가야 한다는 말씀을 우리에게 왜 하셨을까요?

이 말씀이 우리에게 하나의 협박으로 들리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성경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물론 디모데도 그러하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런 말씀을 읽게 되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아하! 사도가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목사가 되는 것이, 아니면 장로가 되는 것이 하나님이 뜻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많은 교인들이 이런 본문을 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목회자가 되는 것으로, 아니면 장로가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업에 망하면 목회자가 되려고 하고, 인생의 낙오자가 되면 신학교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아마 신학이 성공의 신학으로 되지 않았을까도 생각해 봅니다.

목회 성공과 실패를 하나님의 뜻 안에 거하는가 아닌가가 아니라, 교인수 많은 것, 대형교회가 되는 것, 사람들에게 이름을 날리는 것, 이런 것들이 목회성공이요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사람 마음속에는 이미 하나님의 뜻이 결정되어 있습니다.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경험을 통한 하나님의 뜻 말입니다. 바로 성공. 실패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요 요즘도 노회를 가보면 주로 당당한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보게 되면 교회당 건물이 크고 성도가 많은 교회목사들은 자기 할말을 거의 다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조그만한 교회의 목사들, 아니면 목회지가 없은 목사들은 부끄러워서 노회참석하기도 꺼릴 정도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뜻이 목회를 하는 것, 아니면 큰 교회를 만드는 것, 성공하는 것에 있다고 보십니까?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까?
여러분 사업을 잘해서 하나님께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전도를 많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죄인들의 근본적 사고방식은 많으면 좋다라는 사고방식입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이것이 가득차 있습니다.
헌금도 많으면 좋고, 전도도 많이 하면 하나님의 뜻에 가깝고, 기도도 많이 하면 하나님의 뜻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과 디모데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마태복음6:10절을 보게 되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요한복음17:11절을 함께 봅시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승천하실 것을 미리아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내용입니다.
이 기도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시지 않을 때 제자들을 살려달라는 그러한 기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거의다가 순교를 당합니다. 그러니 무사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에베소서 1:10절을 보게 되면 그 뜻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11:36절을 봅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주님되시는 분은 바로 십자가지신 예수님이십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주님되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물론 이것을 확장해서 해석을 해 본다면, 믿지 않는자들 조차도, 지옥가는 자들 조차도 예수님이 주님으로서 지옥보내시는 것이며, 구원받는 자들도 역시 예수님께서 주님으로서 천국으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이 됩니다.

세상의 모든 만물이 십자가지신 예수님 중심으로 통일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근거로 하여 고린도 후서 1:1절을 생각해 봅시다.
바울과 디모데는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사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요 곧 그리스도 예수가 중요한 것입니다.

죄인들은 이런 본문을 보면서 어디에다가 눈을 두는고 하면 사도, 즉 눈에 잡히는 것, 자신이 할수 있는 것에다 마음을 둡니다.
그러나 고린도 후서 1:1절에서 중요한 말씀은 사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요 곧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이 말씀에 중심을 두게 되면 우리는 사도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곧 그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온 천하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인간들은 다 죄인임이 선포되어야 하며, 그런 죄인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음이 온 땅에 증거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3-11절을 보게 되면 위로와 고난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하는데 왜 위로와 고난이 따릅니까?
그 이유는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인들은 자신들의 주됨을 결코 빼앗기지 않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주님이 아니어도 자신은 살아갈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철저히 의지하는 자입니다.

이런 죄인들은 자신들의 행위의 열매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서론에서 제가 말씀드렸듯이 자신이 무엇을 행한 것, 특히 많이 행한 것을 근거로 하여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든지, 자신의 죄없음을 역설적으로 표출해 내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속에서 너무나 흔히 볼수 있는 현실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교회란 사실 교회라 보기 어렵습니다.
절간과 다른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자신의 의를 자랑하고, 자신의 행위를 내세우는 곳이 어디입니까?
그곳은 절간아닙니까?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행한다 하더라도 이런 인간이 내세우는 것은 결국 자신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행했지 않았습니까라는 사고방식이 튀어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아는 바울과 디모데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로부터 나오는 것은 자신의 행위가 아닙니다.
오히려 위로와 고난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의지하는 분은 예수님 한분 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주님이심을 바락바락 주장을 하니 사람들이 그냥 내버려 두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왜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했는데 사람들이 미워하고 핍박을 하느냐고 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할 때에 그들의 죄를 고발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당신의 악함은 어떤 나쁜 짓을 했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용서를 모르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악함이라고 고발을 하게 되니 죄인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좀더 쉽게 말하면 당신은 당신 하고 싶은데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세상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고려하지 않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것이 죄입니다 라고 하니 사람들이 좋아할 리가 없지요.

그 다음에 이들이 행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복음을 이야기 하면 왕따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이야기를 하면 끼워줍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의 구조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온 천하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일 이 사실을 인정하고 살아가신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행하던지, 어떤 직업을 가졌던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은 직장을 다니는 것이요, 놀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여러분은 많은 고난과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찬송의 이유
고린도 후서1:3-11

여러분들은 어떤 때에 하나님을 찬송합니까?
심심할 때 아니면 여러분의 일들이 잘 풀릴 때입니까?
아니면 어려움 속에 있었는데 그 어려움이 잘 해결되었을 때 찬송을 합니까?

여러분 장례식에 가 보았을 것입니다.
장례식에 가 보면 그곳은 눈물과 한숨과 슬픔이 가득 차 있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장례식장을 갔다 왔습니다.

참으로 젊은 사람이, 저와 동갑인 사람이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아타까워하고, 실력 있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슬퍼합니다.
죽음이란 사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과는 거리가 너무나 먼 내용입니다.

물론 이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가족들은 통곡을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끝이다 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겠지요.
아니면 너무 허무해서 그럴 것입니다.

죽음이 오히려 소망임을 이들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통곡하고 슬퍼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이들은 알지 못한 것입니다.
아니 알려고 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아니면 남편이, 아니면 아내가 죽었다고 생각해 보면 우리는 찬송이 먼저 나오기보다 원망이 먼저 나올 수 있는 인간들입니다.

물론 늙어서 죽는 것은 그렇다고 인정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세살, 네 살, 아니면 갓 태어나자 말자 죽는 아이를 본다면 우리의 입에서 찬송이 나오겠습니까?

사람들이 이 땅에서 안 되는 일을 만나게 되면 찬송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땅을 바라보고 살기 때문입니다. 땅을 바라본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에만 마음을 두고 산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는 마음에 두기를 거부합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세상을 물로써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주변 사람들은 오직 육신을 좇아 자신의 사람을 살 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란 존재는 자신이 몸으로 겪기 전에는 결코 그것을 수납할 마음이 없는 그러한 존재입니다.

물론 이 말은 주님과 관련해서 하는 말입니다.

만일에 이 말이 지상에서 행복하게, 건강하게 살수 있는 길이라고 말해 준다면 아마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무당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사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과학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그 이면에는 비과학적인 것이 인간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실 이 둘은 다 믿을 것이 못됩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신의 몸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자신의 몸에 유리한 것만 받아들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더 유리하고,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들은 예수님을 믿는 세계라는 것에 대해서는 안중에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몸에 도움이 안 된다고 단정을 내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죽인 본디오 빌라도나, 헤롯 왕이나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수많은 민중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 추구한 것은 눈앞이 현실. 지금 당장은 어떻게 되지 않더라도 이 고비만 지나만 행복한 날이 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을 제거해 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영 엉뚱하게 저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믿는 것이 복된 자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잘 살게 되고, 건강하고, 가정이 행복해 진다는 식의 복됨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복된 분이며, 그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만이 복된 자라고 하니 참으로 알아듣기도 힘들고, 또한 그것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이기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게 되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복된 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된 자의 모습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지 않습니까?
잘나가야 복된 자의 모습이 아닐까요?
가난하고 취업도 못하고, 일용직에 근무하면서 겨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과연 복된 자의 모습처럼 보입니까?

교회 안에 이런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어떤 사람은 사업이 잘 되어서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하루하루를 겨우겨우 살아갑니다.

여러분 보시기에 과연 누가 복된 자처럼 보입니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동일하게 믿으면서도 항상 우리의 마음속으로부터 이런 유혹을 받게 됩니다. 복된 자란 잘되는 것이란다라는 유혹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바울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를 보면서 우리가 참된 복된 자인가 아니면 마귀가 주는 그 복됨을 좇는 자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바울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많은 환난을 받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많은 환난을 받고 있습니까?
사도행전19장 23절 이하를 보게 되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바울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우상을 만들어 팔아 부자가 된 자들이 소란을 피웁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시다라는 복음 앞에 자신들이 만든 우상들이 다 사기임이 드러나니 결국 그들은 본색을 드러내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일행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서기장은 자신이 어려움을 당하지 않기 위해 바울을 보호합니다.
이럴 때 우리들은 하나님을 향해 찬송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서기장을 사용하셔서 바울을 보호하셨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있을 때에 어떻게 찬송을 불렀겠습니까?
물론 바울이 서기장의 도움으로 살아난 것도 하나님을 향해 찬송할 수 있는 대목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찬송의 이유가 바울이 살아났기 때문에 찬송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울을 부르실 때 그를 주님의 증인으로 사용하실 목적으로 부르신 그 부르심을 이루기 위해 바울을 고난도 받게 하심에 대한 찬송과 함께 그가 죽음의 위기를 넘긴 것에 대해 찬송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께서 여전히 주님으로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장면이기에 우리들은 찬송을 할 수 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환난을 받았고 또한 위로도 받았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환난은 왜 받았는지 우리가 앞서서 보았습니다.
그러면 바울 일행이 받은 위로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바울 일행이 받은 위로는 계속해서 죽음의 위기를 넘기는 것일까요?
5절을 보게 되면 우리들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함께 읽어 봅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도다”

바울이 왜 고난을 받았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승천하셔서 주님이 되시어 성령을 자신의 백성에게 부어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은 주님의 백성들은 오직 예수님이 주님이심만을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자신이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시어 주가 되시는 바로 그분이심을 증거하심과 같이, 성령을 받은 자들은 이 예수님만을 증거하게 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그 고난, 즉 동일한 성격의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위로가 성도에게 주어집니까?
고난이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나라 백성의 증거입니다.
6절을 보게 되면 바울 일행이 받는 환난이 오히려 고린도 성도들에겐 위로와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일생이 당하는 그 고난은 곧 그들 자신에겐 위로요 구원이라는 말이 됩니다.

8절을 보게 되면 아시아에서 어떤 환난을 당했는지를 말합니다.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는 것 때문에 말입니다. 이제 죽었구나 생각한 것입니다. 사실 환난이 위로와 구원이라는 말은 고난과 힘이 부칠 정도의 버거움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죽었구나 라고 생각될 정도로 심한 환난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런 죽음에 직면 했을 때 이들로부터 솟아 나오는 것은 이렇게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시는 이유가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을 알게 되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5:21-23절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함께 봅시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결국 바울 일행은 환난 받는 가운데 죽음의 위기로 몰리는 가운데 아들공경에 대한 사실을 더욱더 제대로 알아갔던 것입니다.
주님이 누구시냐?
바로 십자가 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성도의 모습이란 환난과 고난과 위로의 삶입니다.
이런 가운데 성도는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더욱더 깊이 알아가게 됩니다.

찬송이란 어떤 때 나옵니까?
그것은 환난 중에 있던 핍박 중에 있던 이와 상관없이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알아가게 하실 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몸이 건강하고 가족이 잘되고, 행복한 것, 사업이 잘되는 것, 이런 것을 두고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것은 우상을 팔아 장사하던 자들의 사고방식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사고방식입니다.
오히려 이런 자들이 바울과 같은 성령 받은 자,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는 자를 죽음의 위기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런 것이 한 세트가 되어서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여실히 보여준다는 사실입니다.








성도의 기도
고린도후서1:8-11
오늘 우리들은 흔히 말하는 중보 기도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중보 기도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11절에 나오는 바와 같이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중보 기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울도 골로새서1:8절에서 성도들을 위해 얼마나 꾸준히 기도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곳 뿐만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또한 바울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말하는 곳도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많은 사람들은 당연히 성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교회모임때 마다 중보 기도라는 말로 열심히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떤 교단에서는 중보 기도라는 말이 잘못되었다라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많은 교회에서 가족들을 위해, 아니면 교회를 위해, 목사를 위해, 나라와 민족, 세계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에 기도하라고 하는데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라고 말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알아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면, 다른 종교를 갖고 있는 자들도 다 기도를 한다는 사실입니다. 종교가 없는 자들도 자신들의 각자의 신을 향해 중보 기도를 한다는 말입니다.

절간에 가보면, 죽은 자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입시를 위해서, 사업을 위해서, 건강을 위해서, 가정의 평안을 위해서 쉬지 않고 기도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지난번 낙산사라는 곳에 갔습니다.
그곳엔 아주 큰 불상이 하나 있습니다.
그날은 아주 추운 날이었는데, 신발을 벗고, 시멘트 바닥에 올라가서 절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이들을 볼 때 우리들은 참으로 어리석은 불쌍한 인생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들과 같은 자들만이 불쌍하고 가련한 인생일까요?

사실 중보 기도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중보 하실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을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간구함으로 말미암아 그 기도의 성취로 주님의 백성들은 성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간구로 성령을 받은 자들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가정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개인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업이 잘되게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나라가 평안하기를 구하는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니지요.
우리는 먼저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모습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겟세마네에서의 기도를 보게 되면 십자가 지는 것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자신의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는 것에 순종하기 위한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 기도의 응답으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 되시어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 주님이 보내주신 성령을 받은 자들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가지 입니다.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고의로 위험의 길로 접어든 것이 아닙니다.

이들의 마음은 오직 한가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사실 말입니다.

이들은 이것을 증거하는 동안 인간들의 죄악을 낱낱이 들추어 냅니다.

이런 복음을 받은 자들의 반응은 각각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회개하였고, 또한 어떤 사람들은, 회개하는 척하여 교회에 들어와 속이는 자들도 있었고, 어떤 자들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핍박했습니다. 죽음으로 내 몰았습니다.

성령 받은 자의 관심은 오직 한 가지 뿐입니다. 바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사실 말입니다.

이들이 만일 자신의 가정의 평안과 행복을 추구하는 자들이었다면 결단코 이런 복음을 전할 수 없었고, 이런 일들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자신들의 모임의 안정을 강구하는 자들이었다 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사적으로 보면 교회가 핍박을 받는 시기가 있었고, 오히려 교회가 군림하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교회가 핍박을 받는 시기에 성도들의 관심은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님에게만 마음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군림하는 시기가 되니 교인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이 시대를 계속 지속해 갈 것인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니 그 당시 교회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 세대와 같은 평안, 이렇게 기독교를 옹호해 주는 황제는 만세수를 하옵소서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았을까요?

교회가 그 황제를 위해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을까요?
그래서 기독교가 수 백년 이상을 주도권을 갖고 있었을까요?

주님의 말씀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교회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들의 기도의 내용은 주님의 기도와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그런 내용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의 간구와도 전혀 다른 것입니다.

중보자 되시는 분은 오직 십자가 지신 주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수 없습니까?

물론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시지요.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성령 안에 있는 성도는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 안에 있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기도를 하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물론 주님의 영이 함께 하시는 기도입니다.

이제 우리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의 기도를 봅시다.
11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도대체 바울이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사도행전이나 바울 서신들을 보게 되면 바울이 가진 것들이 나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가지입니다.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 전하는 것이었고, 그로 인해 당하는 고난이었습니다.
죽음의 길을 걷는 것이었습니다.
육신의 건강, 가정의 행복, 로마제국의 평안이 기도의 제목이 아닙니다.

물론 고린도 후서 12장에 보게 되면 바울이 자신의 육체의 문제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바울도 여전히 죄인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에 자신의 잔을 옮겨달라고 기도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죄인들의 근본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시는 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지신 주님이 그런 죄인들을 어떻게 인도해 가실 것인가를 십자가 지심으로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 주셨습니다.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연약한 모습 가운데 자신을 합리화 하고 자신의 건강이나 평안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결국 이런 모습은 오히려 자신이 죄인임을 더욱더 알게 되는 과정의 모습을 보입니다. 이런 모습조차 예수님이 왜 십자가 지시고 주님이 되셔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들입니다.

바울이 만일 오늘날 우리들이 기도하는 그런 기도, 가정의 행복, 사업의 무궁한 번창, 교회의 평안 등을 위해 기도하는 자였다면, 그의 지향성이 이런 모습이었다면 스데반의 죽음을 그는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요, 야고보의 죽음을 성도들에게 떳떳이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미 바울도 역시 한 죄인임을, 주님의 용서함을 받은 자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을 위해 틀림없이 기도했을 것입니다.

어떤 환경이 닥치더라도 예수님의 주되심만 증거케 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 후서5:9절을 봅시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바울은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직 살 소망에서 끊어지든지 끊어지지 않든지 오직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 일행을 향해 많은 사람들이 기도한 결과입니다.
이것이 바울 일행이 받은 은사, 곧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오늘날 교회에서, 새벽마다 , 금요일마다, 수요일 마다, 일요일마다 기도하는 기도의 내용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내용이 아닙니까?

가족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 그렇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자신의 속한 집단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해도 기도하는 속성을 가졌습니다.
자식이 잘되기를 기도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신이 돈 바치고 땅 바친 교회가 잘되지 않기를 기도하지 않는 인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물론 돈 바치지 않은 사람, 땅 바치지 않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겠지요.

자신의 장래가 걸려 있는 사업체나 국가를 위해, 세계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기도하고 있습니까?
물론 제가 이렇게 말하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몇 시간을 기도해야 기도하는 것입니까?

기도라는 것은 성령을 받았든 받지 않았던 누구나 다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 더 타당하겠지요.

혹 여러분은 바라는 것도 없고, 그냥 되는대로 살아가는 자들이 아닙니까?
그러니 저렇게 자신의 탐심, 안위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그러니 나는 그렇게는 기도하지 않겠다. 그러면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 닥치는 일을 처리하면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만일 이렇게 된다면 성도의 증거, 즉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하는 바울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지요. 성령이 함께 함께 하는 주님의 백성인지도 궁금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늘 어떤 상황을 맞이하든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여러분이나 여러분과 함께 하는 주님의 백성들이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 증거 하는 자로 살아가기를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을 기도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이 누구를 믿고 있는 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행함
고린도후서1:15-24
12절을 보게 되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육체의 지혜로 행하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는 것이 나옵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 우리들은 당연히 이런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래 우리는 결코 육체의 지혜로 행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는 자로 살아가야 돼.

그러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면 육체의 지혜로 행하는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래서 우리들은 본문을 탐색해 갑니다.
12절 끝에 보니 자신들의 양심에도 전혀 거리낌이 없이, 진실된 말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자신들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행하는 일이 결코 육신의 지혜를 따라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였음을 자신들의 양심까지 거론 하면서 그 진실됨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것이 자신들의 자랑이라고 합니다.
무엇이 자랑입니까?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행했음이 자신들의 자랑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런 본문을 보면서 우리 자신과 많은 괴리를 느끼게 됩니다.
아니 바울 자신이 예수님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자신이 행하는 일이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행한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가?

우리 자신들은 항상 우리 자신들이 한 일을 생각해 보면 육체의 지혜로 행한 것이 더 많고, 가끔은 하나님의 은혜로 행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도 같은데 양심에 거리낌이 있고.

참 오늘을 사는 우리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는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한다고 하면서 너희가 끝까지 알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끝까지 알기를 바라는 것일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바울 일행이 주님이 강림하시는 날에 자랑이 되고,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 일행에게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이라는 것은 육체의 지혜를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행하는 자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들의 어떤 행동이 육체의 지혜를 따라 행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행했는가를 설명합니다.

15-17절을 읽어 봅시다.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에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보내줌으로 유대로 가기를 경영하였으니 이렇게 경영할 때에 어찌 경홀히 하였으리요 혹 경영하기를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 예 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에 내게 있었겠느냐”

바울의 원래 계획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사실 고린도 교회를 두 번 방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계획하는 것이 결코 육체의 지혜로 행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바울은 결코 육체를 따라 계획을 세우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8-22절을 말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어 봅시다.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이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그대로 성취하시는 분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아멘 하는 자로, 즉 육체의 지혜를 따라 행하는 자가 아니라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신 예수님께서 주님이 되셔서 성도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영을 받은 자가 육체의 지혜를 따라 행하는 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3절을 보게 되면 실제로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앞서서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는 것이 주님의 성령 안에서 행한 것임을 말해 놓고 이제 와서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지 않은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23절을 보면 우리들이 생각하기에 변명과 같이 느껴지는 말이 나옵니다.
너희를 아끼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아꼈는가?
24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려든 계획을 취소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바울 일행의 본래의 계획과 모순이 있지 않습니까?

본래의 계획이 분명 성령 안에서 행한 주님께 순종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결정한 계획이었다면 어떻게 나중에 와서 그 계획을 취소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혼돈하지 말아야 합니다.
분명 바울은 처음 계획을 세울 때에는 고린도 교회에 가는 것이 그들을 돕고, 제대로 성도를 견고하게 세우는 것이라 생각했음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결코 사사로운 자신의 감정을 앞세워서 고린도 교인들을 지배하려고 하는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분명합니다.

자신이 세운 교회이니 자신이 마음대로 주관하겠다는 의도에서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왜 이제 와서 그 계획이 취소되었는가?

자신이 주관하겠다는 마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로 행하는 것임을 안 것입니다.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에서입니다.



자 이렇게 우리가 본문을 탐색한 결과 우리는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행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어떤 일을 계획함에 있어서 주님 안에서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계획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로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계획을 취소하는 경우에라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취소하는 이런 모습이야 말로 하나님의 지혜로 행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사랑이 어떤 일을 계획함과 취소함에 그 중심을 차지 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로 행하는 것이다.

만일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이나, 탐욕 때문에 어떤 일을 결정하고 취소하는 경우가 있다면 이것은 육체의 지혜로 행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우리들은 얻었습니다.

바울의 모습 속에 십자가의 사랑이 듬뿍 담겨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꼭 주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사실 그렇지요.
왜냐하면 주님의 영이 바울과 함께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바울이 계획하고 취소하는 그런 모습 속에서 우리는 십자가 지신 주님을 바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우리들이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이 우리에게 적용되어질 때에는 어떻습니까?


서론에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렇다면 나는 육체의 지혜를 따라 행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는 자인가?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는 이런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과 나는 왜 이렇게 거리가 먼 모습을 보이는가?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바울을 부러워 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여 하나님의 지혜로 행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가?

그러면서 나도 저런 모습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런 탐심을 가지라고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물론 성령 안에서 성도는 이런 모습이 분명 툭툭 터져 나올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의 모습은 그런 모습이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지혜를 따라 행하는 모습이 연속으로 막 흘러 나옵니다.

이것이 사실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같은 본문을 보면서, 참으로 우리가 얼마나 악한 죄인이며, 얼마나 우리가 우리 자신의 육체의 지혜를 따라 행하는 그런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십자가 지신 주님께로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성도는 분명 성령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주장하는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성령을 받았으니 이제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항상 순종하는 자로, 육체의 지혜로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는 자로 살아 갑시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살아갈 자는 이 땅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느냐고 저에게 반문하시겠지요?
바울이 가능한 것은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자신의 결심이나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고백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로 행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는 말이 하나님의 은혜로 행했다는 말 이면에 깔려 있는 것이 아닙니까?

자신은 육체의 지혜로 행할 수 밖에 없었는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행할 수 있었다는 고백이 아닙니다.

우리는 또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악한 죄인인지 알고, 십자가 지신 주님 앞에 엎드리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지혜로 행하는 모습입니다.
이 모습은 바울과 같은 그런 십자가의 사랑을 듬뿍 담아내는 모습도 보일 것입니다.








사랑
고린도 후서1:23-2:11
성도는 이 땅에 관심을 두고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주식에 투자를 했다면 당연히 주식 동향이 어떻게 되는가에 온갖 마음을 빼앗길 것입니다. 특히 빚을 내어서 주식을 샀다면 더욱더 그러할 것입니다.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든, 아니든 마음은 오직 주식의 오르고 내림에만 마음이 빼앗길 것입니다.

성도란 땅에 발을 붙이고 살고 있지만 땅의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자가 아닙니다.
열왕기상12,13장을 보면 여로보암왕이 나옵니다.
솔로몬의 범죄로 인해 이스라엘은 둘로 쪼개어집니다.

여호와께서 선지자 아히야를 통해 솔로몬 시대의 큰 용사였던 여로보암에게 유다와 베냐민을 제외한 나머지 지파를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왜 여호와께서 열 지파를 여로보암에게 주시려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솔로몬이 언약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자가 아니라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믿을 것은 자신 밖에 없다는 것이 아닐까요?

결국 이 일로 인해 열지파가 여로보암에게 속하여 북 이스라엘이 됩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것이니 자신이 보존해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두었고 벧엘에서는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를 대신하여 제사장도 세우고 제사도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솔로몬에게서 열 지파를 떼어 자신에게 맡기셨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 우매한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북 이스라엘을 사용하시어 왜 이들이 멸망 받을 수 밖에 없는 자인가를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이들의 멸망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렸다는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긍휼을 멸시한 것입니다. 이것을 유다의 입장에서 보면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입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범했지만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긍휼이 덮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남유다를 통해 약속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보면서 성도란 어떤 자인가를 우리는 분명히 분별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바울의 모습이 참으로 성도의 모습임을 우리들이 알 수 있습니다.
여로보암왕 같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왕이 되었다면 얼마든지 자신의 지위를 주장하고, 그것을 이용해 남을 이용하거나 지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어떻습니까?
결코 다른 성도의 믿음을 주관하려는 태도를 갖지 않았습니다. 단지 기쁨을 돕는 자로 남아 있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이것이 어쩌면 우리들이 구분하기가 약간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 경계선이 아주 모호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바울 서신을 보면 우리들이 받는 느낌이 어떻습니까?
바울 자기 말을 반드시 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닙니까?
자신이 전한 복음만이 참 복음이라는 주장이 아닙니까?

이런 태도가 어떻게 남의 믿음을 주관하려는 태도로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의 내용을 따져 들어가 보면 결국 바울이 말하는 그 내용이야 말로 믿음에 대한 것, 즉 십자가 지신 주님에 관한 내용임을 우리들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바울 서신의 표면적인 내용만을 고려하여 그것을 목회에 적용하려고 한다거나 신앙생활에 적용하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이미 믿음에 서 있음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모두가 다 믿음에 서 있을까요?

제가 보기엔 그렇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존재 했듯이 고린도 교회도 여전히 이런 자가 있음이 확실합니다. 만일 바울의 말을 듣지 않는 자가 있다면 우리는 과연 그를 성도라 인정할 수 있을까요?

결코 그럴 수 있습니다.

바울의 관심이 하나입니다.
자신이 주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의 자리에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하는 자로 자신은 남아 있는 것이지요.

성도들이 믿음에 섰다는 사실은, 성도들의 주관자는 이미 결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결코 다른 사람의 주관을 받아서도 안 되고, 성도를 주관하려고 하는 자가 있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주님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비록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서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지만 자신의 잘남을 전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근심으로 고린도 교회에 가지 않기를 스스로 결정한 것입니다.
스스로 결정했다고 하니 우리는 여기에서 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성령을 따라 사는 자인데 바울 자신의 말로는 스스로 결정했다라고 표현하니, 인간에겐 자유의지가 있지 않느냐를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통으로 보세요. 부분으로 보면 그렇게 느껴지지만 바울이 지금 성령을 따라 복음을 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보기엔 바울이 스스로 결정한 것처럼 보이지요. 뿐만 아니라 사실 성도의 삶 자체 자체가 자신의 결정을 통해 행동하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사실 결정권은 우리 인간에게 있다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그러니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믿음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데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만일 그런 주장을 한다면 그는 믿음 있는 자가 아니라 믿음 없는 자, 오직 자신만이 믿을 대상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그런 결과가 됩니다.

제가 바울의 말을 옹호하려고 한 것도 아니요, 그의 말을 내 주장으로 끌고 오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전체적으로 읽어 보세요. 어디에 자신의 결정을 주님의 은혜로 표현하지 않는가요?

바울은 사실 자신을 기쁘게 해 줄 자들은 고린도 교인들인데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마음 아프게 하면 바울을 기쁘게 해 줄 사람들에게 슬픔을 안겨 주는 꼴이 됩니다. 그러니 그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애통한 심정으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편지를 쓴 것입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편지를 섰다는 것으로 보아, 또한 5절에서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다는 표현을 보아, 고린도 교회의 죄악을 고발하면서 회개를 촉구하는 그러한 글이었음을 우리들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결국 죄를 범한 사람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글을 통해 볼 때 죄를 범한 사람이 회개 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죄악이 아주 심했던 모양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그런 죄악이었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에게 사랑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 사랑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0,11절을 말합니다.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바울의 관심이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의 문제점이 있을 때 그곳에 끼어 들어 자신이 주관자로 행세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모두를 십자가 앞으로 나가게 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성도란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 관심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에 어떤 일의 잘 잘 못을 가리려고 덤벼들어 거기에만 마음이 빼앗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십자가의 사랑은 물 건너 가버립니다.
이것은 사단에게 속는 것입니다.

그래 그래 옳다. 옳다. 네 주장이 성경적이다. 라고 사단이 우리를 꼬이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십자가의 긍휼, 십자가 세우신 새언약을 멸시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바울이 애통한 마음으로 편지를 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니 그 애통한 마음이 긍휼로 나타남으로 그 애통함이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애통함임을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항상 십자가 지신 주님께 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가 있습니까?










생명과 사망의 향기
고린도후서2:12-17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떤 일을 계획하고 실행함에 있어 그것을 성취하지 못했을 경우 그 사람은 실패했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 속에서 사람들이 맡을 수 있는 냄새는 곧 실패의 냄새입니다.

아니면 그 일을 이루었을 경우에는 그 사람은 성공자의 냄새를 풍기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겐 이런 냄새가 납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겐 성공자의 냄새, 실패자의 냄새가 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서 나는 냄새는 곧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향기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잠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냄새라는 것, 향기라는 것은 홀로 존재할 때에는 알 수가 없습니다.

냄새라는 것, 향기라는 것은 상대편에 존재할 때 나타는 것입니다.

과거에 믿음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이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산 속으로 들어가서 믿음을 증진한답시고 기도하고 성경보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요즘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른 보기에는 믿음이 좋아 보이고, 세상사와 단절해서 사는 모습이야 말로 참된 믿음을 가진 듯이 보이지만, 이들에겐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놓여 있을 때에 그 향기라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될 것이 아닙니까?
16절을 보게 되면 그리스도의 향기란 다름 아니라 생명과 사망을 구분 짓는 향기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바울 일행을 통해 증거되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입으로 증거하면서 드러나는 현상입니다.
만일 바울 일행이 복음을 입으로 전하지 않고 그냥 돌아만 다녔다면 그 향기란 발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스무 살 때 즘에 경주 쪽에 있는 절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 한 중이 있었는데 그는 말을 하지 않고 몇 년을 지내는 도를 닦는 중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만났을 때 처음에는 벙어리인줄 알았습니다.
그 사람이 지팡이로 땅에 글을 쓰기 전 까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글을 읽은 후에야 그 사람이 도를 닦는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은 우리가 이 사실을 알든 알지 못하든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싸움은 자신과 하는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남이 자신을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던지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깊은 산속으로 들어온 것뿐입니다.

이런 사람도 분명 어떤 향기를 발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만났을 때 말입니다.

자기와의 싸움을 열심히 하는 구나라는 향기를 말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이와 전혀 다른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영적 싸움입니다.

이것은 자신과의 싸움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의 싸움도 아닙니다.
오직 공중권세 잡은 마귀와의 싸움입니다.

12절에 보게 되면 드로아에서 복음의 문에 열렸는데 그곳에서 디도를 만나지 못한 까닭으로 저희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런 장면을 보면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이 듭니까?
주안에서 복음을 전할 문에 바울에게 열렸는데, 디도 때문에 복음은 전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갔다라고 생각해 보세요.

디도 때문이라는 것은, 즉 어떤 근심 때문에 복음을 전하지 않고 마게도냐로 갔다는 말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바울을 보고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분명 복음의 문이 열렸다고 했으니, 드로아에서 복음을 전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마케도냐로 떠나 버립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이 과연 바울을 어떻게 생각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복음 전하는 것이 우선인데 디도를 못 만났기 때문에 마게도냐로 떠난다. 그것이 말이 되느냐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태도가 과연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의 태도냐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디도가 주의 복음을 위해 고린도 교회로 가서 소식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럴 수 있느냐고 따지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도 생각해 보세요.
어떤 목사가 복음을 전하다고 갑자기 다른 곳으로 가버립니다.
지금 복음을 계속 듣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다른 곳의 성도들 때문에 가버린다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에이, 뭐 저런 목사가 있으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저렇게 무책임 할 수 있을까 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에 바울이 이런 모습을 보였다면 성도라고 하는 자들 중 몇이 바울의 행동을 비난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보기로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성도라고 하는 자들은 워낙 고상하고, 합리적이고, 상식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과연 바울의 말을 동의할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이뿐 아닙니다. 바울이 자신의 행동을 무책임하게 해 놓고 하는 말이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합니다.

바울의 그러한 행동으로 인해 아마 많은 말이 있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것에 낙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말에 절망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자신의 행동을 통해 복음의 향기,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타나는 계기가 되었고, 이로 인해 참 성도와 그렇지 않은 자가 갈라지는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런 괴변이 어디에 있습니다.
물론 바울이 14절 이하에서 말하는 것은 바울 사역전반을 다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뿐만이 아니지요.

바울이 어떤 일을 결정하는 것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1장15,16절을 보게 되면 바울의 원래 계획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계획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미 그 계획을 알고 기다리든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울은 너무 자기 마음대로야, 저런 바울을 어떻게 믿을 수 있으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결코 자신이 사사로이 그 일을 결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일을 결정함에 그리스도 안에서 순종하는 차원에서 행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까지 들으면 듣는 사람이 화가 나겠습니까 나지 않겠습니까?
상식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들이 화를 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일들이 오히려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향기입니까?

여러분, 바울이 말하고 행동하고, 무엇을 결정함에 있어서 사람들은 그것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그의 행동과 결정, 말들을 생각할까요. 아니면 다른 입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입장에서 바울을 볼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그 사람이 사망에 속하였는가 아니면 생명에 속하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십자가 정신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복음을 상식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사에 맞춘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런 것에 기준하여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17절을 보게 되면 바울은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는 자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순전함으로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한다고 합니다.

얼마나 간단합니까?

무엇을 결정하고 행동하고 말함에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합니다.
그러니 이런 것을 보는 자들도 똑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순전하게 바라보게 된다면,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를 중심으로 바울을 바라보게 된다면 오히려 바울이 참으로 순전하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인 것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바울의 이런 행동을 통해 또한 복음은 위력을 발휘합니다.

우리들 생각에는 말로만 복음을 잘 전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이라는 것이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에 있어서, 사람이 반응하는 것을 통해 그 사람이 과연 생명의 냄새를 맡고 사는지, 아니면 사람의 냄새를 맡고 사는 지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자고 설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거꾸로 과연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제대로 맡고 사는 자인지, 아니면 사망에 이르는 그러한 냄새를 맡고 사는 자인지를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그것을 해석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상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상식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영을 받은 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상식적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저주한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정신입니다.

성도는 이런 주님의 영을 받은 자입니다.
성도의 마음속에, 생각 속에 이 십자가 정신이 가득 차 있는 자입니다.
그러니 단순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기준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확신과 믿음
고린도후서3:1-18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믿지 못할 경우에 우리들은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자신을 믿어달라고 여러 가지 이유를 말합니다.

그래도 믿지 않을 경우 우리는 너무나 답답해하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우리와는 사뭇 다른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성도들은 지금 바울의 사도직을 믿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과연 그가 예수님의 사도일까?

우리 같아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바울이 예수님을 믿는 자를 잡아 가두는 일을 했는데, 이런 일에 대해서는 추호의 의심없이 다 믿어 버립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다는 말은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 나쁜 이야기를 듣게 되면 우리는 그 말을 대부분 믿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이야기를 들으며 그냥 그렇구나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특히 나쁜 짓을 한 사람이 이제 그 과거의 일을 버리고 좋은 일을 한다고 했을 때 우리는 쉽게 그 사람을 믿지 못합니다.

특히 바울의 경우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함께 했던 사람들조차도 그냥 빛만 보았고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하신 말씀은 듣지 못했다고 하니 어떻게 바울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바울에 대한 소개장, 즉 예수님의 사도들의 소개장도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바울을 믿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생각하는 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사실 이 한마디로 모든 의문을 잠재워버립니다.

지금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누구를 믿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까?
아니면 율법을 믿고 있습니다.

3장 후반부를 보게 되면 물론 여전히 율법에 매여 사는 자들이 있음을 우리들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여전히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들입니다. 물론 이들은 표면상으로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실제로는 율법을 중심으로 생활하는 자들입니다.

물론 이들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이러한 믿음, 즉 예수님도 믿고 율법을 중시하는 자들이 고린도교회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 있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고 말입니다.

편지란 무엇입니까?
편지 쓰는 사람의 뜻을 다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모습 속에서 이미 바울의 참 뜻, 즉 바울이 믿는 바, 증거하는 바가 다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런 확실한 증거를 갖고도 여전히 의심을 갖는 다는 사실입니다.

옆에서 자꾸 엉뚱한 소리를 하니, 처음에서 그렇지 않겠지 생각하다가 자꾸 들어보니 그런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확실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의 모습은 이런 모습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곧장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편지를 썼다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겐 너무나 중요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이 성도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앞서서 분명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변론을 시작하듯이 보였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그가 증거하고자 한 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너희들이 성도가 되었다는 말은 비록 바울이 수고하여 복음을 전하여 그들이 예수님을 믿어 성도가 되었지만 이것은 바울의 수고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영의 능력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바울은 자신이 말하는 것이 너무나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또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4절을 보세요.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 같은 확신이 있으니 ”

이렇게 말하면 우리는 또 이렇게 비꼴 수 있습니다.
그래 너 혼자 스스로 그렇게 확신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바울은 이미 사람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알아주느냐? 이해해 주느냐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이런 말을 합니다.
5절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이 말을 통해 바울이 누구를 믿고 사는 지가 분명히 밝혀집니다.

확신이 있게 되면 사람들은 스스로 만족하게 됩니다.
만족한다는 것은 교만하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자신들의 만족이 자신들의 수고, 애씀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라고 말합니다.

바울자신이 수고하여 복음을 전해서 믿는 자들이 생겼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만족스럽겠습니까?
흐뭇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주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모습이 아닙니다.

모든 공로를 주님께 돌려드리는 모습이야 말로 진정으로 주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의 모습니다.

가끔 우리는 소위 간증이라는 것을 듣게 됩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이러이러 했는데, 이제는 그러한 나쁜 버릇들을 버리고 제대로 살고 있다라고 말입니다.

이런 말을 보게 되면 마치 바울의 간증을 보는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늘날 교인들이 간증을 바울의 간증과 같이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간증을 들으면서 감동 받으면서 은혜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간증과 오늘날의 간증은 성격상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무슨 차이입니까?

바로 오늘 본문에서 언급하는 것입니다.
확신의 문제입니다.

바울은 확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돌립니다.
그러나 오늘날 간증은 자기가 이렇게 훌륭한 인간이 되었다, 괜찮은 인간이 되었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런 간증을 듣다보면 사람들의 관심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 가는 것이 아니라, 간증을 하는 인간에게 모든 초점이 모아져 있습니다.

결국 이것은 어디로 흐르는고 하면, 인간의 행위로 흐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자신의 과거 행실이 이러이러했는데, 지금의 행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에 대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 즉 행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새언약의 일군되기에 만족케 하셨다고 말입니다.
새언약의 일군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행위를 내세우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새언약의 일군은 오직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하는 자들입니다.

실상, 의문, 즉 율법, 즉 행위를 주장하는 것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만이 사람을 살리십니다.
영생을 주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세의 수건을 언급합니다.
모세가 수건을 얼굴에 쓴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은 장차 없어질 것임을 알려 주기 위해서입니다.
즉 율법이라는 것은 죄를 범함으로 더한 것일 뿐임을 알려 주기 위해서 모세는 얼굴에 수건을 쓴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그 수건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율법을 준수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확신이라는 것을 근거로 자신의 믿음을 내세웁니다.
그런데 그 확신의 내용을 따져 들어가 보니 그 속에 있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율법임을 우리들은 오늘 설교를 통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님께로 돌아 온 자는 다 수건을 벗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믿는다고 해 놓고 여전히 수건을 덮어쓰고 그 수건을 덮어 쓴 상태에서 남을 협박하고 기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는 자들이 오늘날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16절에 보면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행해지는 설교를 보게 되면 자유함의 설교가 아니라 율법에 꽁꽁 묶어 매는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인간들이 율법을 지킨다고 해 보아야 얼마나 지킬 수 있겠습니까?
죄인들끼리 보기에는 그럴싸하고 꽤 괜찮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러한 행위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가 못 박는 결과로 나온다는 사실을 오늘날 성도라고 하는 자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사복음서를 열심히 읽고 또 읽어 보고, 설교를 듣고 , 또 들어도 도통 무슨 소리인지, 마음속에 남는 것은 오직 하나, 그래 착하게 살자. 나쁜지 하지 말자, 예수님을 믿으면 행실을 잘해야지, 이런 율법의식 만이 가득 차 있습니다.

자신이 십자가 앞에서 얼마나 죄인이며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알아가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행위를 통해 안심하고, 확신도 가지도, 남을 기죽이고, 그것 가지고 회개하고, 또 보충하는 모습이야 말로 아직도 모세의 수건을 벗어버리지 못한 모습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미 말했습니다.
성도는 주님의 영으로 말미암았다고 말입니다.

이제 18절을 봅시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9절에서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지금 의의 직분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영광이 바울과 비교할 때 어떻습니까?
현실적으로는 영광스럽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영광은 그렇게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장에 나타난 독생자의 영광이란 십자가 지신 하나님의 아들, 순종하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것이 영광된 직분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이 주님과 영원히 거할 때 누리는 영광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영광의 직분이란 십자가의 길로 나타납니다.

18절에서 우리도 주님의 형상으로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과 동일하게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의 영을 받았기에 주님의 길을 동일하게 걷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길과 영광스러운 부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주의 영이 이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고린도후서4:1-6
사람은 언제 낙심을 하게 됩니까? 여러분들은 언제 절망하고 좌절하며 슬픔에 잠기게 됩니까?
이 땅에 사는 인간들, 즉 죄인들은 항상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두기 때문에, 자신의 바라는 바를 이루지 못할 때 낙심합니다.

또한 자신이 소망하는 바를 이루지 못할 때 절망을 하게 됩니다.

어떤 경우는 자신은 성심을 다해 봉사하고 일했는데 남이 알아주지 않을 때 낙심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경우에 절망하고 낙심합니까?
성도에게도 분명 이런 마음이 들 경우, 환경을 만나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서는 사사로운 개인사의 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생각해 보면 성도에게 이런 낙심의 위험이 항상 들이닥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성도를 넘어뜨리려고 우는 사자와 같이 덤벼들려고 합니다.
낙심이라는 것을 가져다주어서 결국 참 소망을 잃어버리게 만들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바울은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직분이란 의의 직분, 즉 영광의 직분, 생명을 전해 주는 직분입니다.

그런데 이 직분을 어떻게 받았습니까?
긍휼하심을 입었기 때문에 이 직분을 받은 것입니다.

바울이 본래 어떤 자였습니까?
예수님을 자를 잡아 가두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뿐만 아닙니다. 율법대로 사는 자라고 자처하면서 살아가는 자였습니다.
십일조도 잘하고, 구제도 잘하고, 금식도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긍휼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보기에 좀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 자를 잡아 옥에 넘기고,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 사람이 긍휼을 입었다면 그런 대로 이해가 갈 내용입니다. 그런데 십일조도 잘하고 구제도 잘하고, 금식도 잘하고, 십계명도 지키는 사람이 긍휼을 입었다는 것이 이해가 가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단순하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하, 그래 십계명도 잘 지키고, 십일조도 잘하고, 구제도 잘하고, 금식도 잘하는 것에 대해서는 긍휼을 입을 것이 없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를 옥에 넘기고, 죽이는 일에 대해서는 긍휼을 입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사실 바리새인들이니 율법사들이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율법을 준행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십일조도 제대로 하였고, 안식일도 제대로 지켰고, 구제도 제대로 했고, 기도도 남들 보기에 모범이 될 정도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들을 향해 욕할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세리나 창기와 같은 자는 감히 접근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거룩해 보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너희는 죄인이라고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성경에 그 구절이 어디에 나오느냐고 물으실 터인데, 사복음서 전체가 그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병자들을 고치시면서, 아니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면서, 아니면 자신의 제자가 되려고 하는 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산상설교를 말씀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을 누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까?

그것은 이방인들만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주동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율법을 생명과 같이 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겐 예수님이 눈의 가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자신의 행위들을 깡그리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지금까지 지켜온 하나님의 말씀,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까?

여러분들 생각에는 어떻습니까?
교회에 출석 잘하고, 헌금 잘하고, 기도 열심히 하고, 금식도 자주 하고, 구제도 잘하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들이 무슨 죄인입니까?

이들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뿐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감을 잡으셨을 것입니다.
이들은 믿음이 필요 없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될 경우 바리새인과 같은 쪽에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을 믿기에 지금 그 말씀대로 순종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하나님을 믿기에 그 말씀대로 순종한다는 말은 결국 믿을 것은 자신의 행위, 믿음에 대한 의지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 참된 표적은 이들에겐 죄가 드러나는 정점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들에게 능력만 주시든가, 아니면 새로운 가르침, 무엇인가를 행할 수 있는 그러한 가르침을 주시면 되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깡그리 무시하고, 너희는 죄인중의 괴수들이다라고는 말하지 말고, 적절하고 우리의 마음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지요.
모세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준 율법이란 사실 인간이 죄로 인해 가입된 것입니다. 죄를 더욱 죄 되게 드러나게 하는 것이 모세가 준 율법인데 이것을 지키려고 덤벼들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십자가의 영이 없이 성경을 보게 되면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 없이 되는 것입니다.
민수기 11장31-34절을 보겠습니다.
“바람이 여호와에게로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 곁 이편 저편 곧 진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쯤에 내리게 한지라 백성이 일어나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십 호멜이라 그들이 자기를 위하여 직 사면에 펴 두었더라 고기가 아직 잇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기브룻 핫다아와라 칭하였으니 탐욕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

하나님의 긍휼,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속받은 후 이들은 다시 옛날 애굽에 있을 때를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는 것이지요.
마음껏 고기를 먹었을 있었다는 것입니다.
탐욕을 마음껏 부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생활이 무어거리 재미있겠습니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만나 밖에 없다고 불평합니다.

만나도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긍휼로 베풀어 주신 것이지요. 그런데 이들은 이런 것을 잊어버리고 다시 탐욕을 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본문을 보면서 우리는 무슨 생각이 듭니까?
그래 과거를 기억하고 이제는 탐욕을 부리지 말아야지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의 성경해석이 그렇습니다.
왜 우리 조상들이 광야에서 멸망당했는가? 그것은 말씀을 순종하지 않아서이다.
보아라. 민수기 11장만 보더라도 그렇지 않는가?

그래 이제는 우리들이 탐욕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
이런 결론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이런 결론이 왜 나오게 됩니까?
그것은 살기 위해서입니다.
망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5:3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마음속 근본을 읽고 계셨습니다.

이들은 절망이 생기지 않게, 이 세상에서의 삶이 낙심되지 않기 위해서는, 희망이 있기 위해서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향해 죄인이라 하시고 자신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너희를 살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말씀을 누가 듣고 순종하겠습니까?
이 땅에 사는 인간 중에는 이럴 인간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절망할 바에야, 낙심 할 바에야 너 같은 놈 죽여 버리자 라고 한 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 땅의 죄인들은 희망을 먹고 삽니다.
낙심이란 참으로 싫은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낙심치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들 보기에는 바울이 충분히 낙심할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사도가 되었는데,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뭐 그리 낙심할 문제까지 되느냐라고 하실지 모르지만,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확신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무리 확신을 가지고 전해도 상대방은 들은 체도 하지 않는다고 해 보세요.
뭐, 원래 그런 사람들인데 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조차 여러분이 전하는 복음에 대해서 의문을 갖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낙심하지 않겠습니까?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여러분을 인정해줄 만한 예수 믿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렵다고 해 보세요. 절망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주님의 긍휼을 몸에 담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그 긍휼하심에 풍덩 빠져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긍휼하심이 자신에게 어떻게 덮쳐 왔는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십자가의 긍휼로 사도가 되었고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는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가운데 행하지 아니한다고 말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숨은 부끄러운 일은 무엇이고, 궤휼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울이 어떤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숨은 부끄러운 일이란 무슨 음탕한 생각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궤휼가운데 행하지 아니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이 말의 의미는, 율법을 지키는 것, 즉 인간의 행위를 내세우는 것을 말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물론 음탕한 생각도 인간의 행위를 내세우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의 의미는 그렇게 보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행위, 율법 준수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는 것은 모세의 수건을 얼굴에 쓰고 말씀을 전하고 어떨 때는 모세의 수건을 벗고 말씀을 전하는 태도입니다.

바울은 진리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즉 진리 되신 예수님입니다.
요한복음8:32절을 보게 되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십니다.
즉 진리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너희를 죄에서 자유케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지금 십자가의 도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바울이 고린도 전서1:23절에서 말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어떤 사람들은 이 진리를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들은 여전히 모세의 수건을 쓰고 성경을 보려고 합니다.
율법에 매여 있습니다. 자신의 행위에 매여 있습니다.

왜 그런가. 그것은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데 율법에 매여 있는 자들, 즉 행위에 매여 있는 자들의 형편이 지금 이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인데, 이들은 십자가지신 예수님을 자꾸 옆으로 빼돌리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옆에 살짝 돌려놓고 자꾸 직접 하나님과 대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딱 못을 박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전하는 것은 오직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그 이어 한 말, 즉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한다는 것은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이 말이나 앞서한 말이나 동일한 말이라고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만일 예수님을 위하여 종이 되지 않고 주관자가 된다면 결국 증거하는 것은 증거자 자신밖에 되지 않습니까?
즉 자신이 주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만드는 행위입니다.

그러니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어떻게 돌아갑니까?
어느 교회이든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은 잘도 접합니다.
그런데 목사든, 장로든 집사든, 이들은 어떤 모습을 가집니까?
교회에서 주관자가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종이 될 마음이 별로 없습니다.
섬김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높임을 받으려고 하는 심보를, 탐욕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나를 인정하고 높여주겠지라고 말입니다.
이제 결론 맺겠습니다.
우리는 본래 어둠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긍휼을 입었습니다.

긍휼을 입은 자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긍휼하심을 입은대로 자신의 행위를 내세우지 않고, 오직 순전하고 십자가의 은혜만 바라보고 사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러니 낙심이 있을 수 없겠지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절망적이고 소망이 없어 보인다 할지라도 긍휼하심을 담고 살아가는 자는 참된 소망이 있는 자요, 참 빛이신 주님의 빛,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받은 자입니다.









죽음에 넘기우는 성도
고린도 후서4:7-11
만일에 어떤 사람이 자신의 손가락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있다고 합시다.
그 다이아몬드 반지는 수억이 간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이 반지를 끼고 다닐 때와 반지를 끼고 다니지 않을 때의 행동이 어떻게 다를까요?

옷도 만찬가지입니다.
온 한 벌이 수백만 원, 수천만 한다고 합시다.
이런 값비싼 옷을 입고 다닌다면 그 사람의 행동이 어떨까요?

매우 조심스럽지 않겠습니까?
혹 다이아몬드 반지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옷에 얼룩이 묻지 않을까, 옷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자신에게 이렇게 값비싼 것들을 해서 다닐 경우에는 일상생활하기에 매우 부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떨까요?
매우 의시대거나 자랑하고픈 마음이 속에서 나오지 않을까요?

내가 이렇게 부자다고 외치고 싶지 않을까요?

한국은 자동차로 그 사람의 지위나, 부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이곳도 마찬가지지요.

그저께 어디를 갖다 오는데, 고속도로 상에서 멋진 차가 달리고 있었습니다.
저 차 가격이 얼마정도 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는 말이 한 7천,8천만원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저께 한국뉴스를 보니 6억인가, 7억짜리 자동차를 판매한다고 나오더라고요.
이런 값비싼 차도 수십대는 팔린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값비싼 차나, 옷이나 액세서리를 하려고 할까요?
그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잘 살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어서이지요.

편리하기 위해서 옷도 입고, 차를 구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예쁘게 보이기 위해서 반지를 구입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과 비교할 때 내가 이렇게 잘 산다, 나도 그래도 이 정도는 된다는 것을 나타나고 싶어서입니다.

여자들이 이런 경우가 많지요.
결혼하게 될 경우에, 반지를 값비싼 것을 하고 싶어 한다든가, 집의 가구들을 아주 비싼 것들을 하고 싶어 하지요.

물론 시집되는 쪽에서도 이런 것들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이혼하는 경우도 있고요.

이렇게 요구하고, 이런 것들을 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집은 적어도 이 정도는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통해 남과 비교하면서 쾌감을, 즐거움을, 인생의 낙을 느낍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생각합니다. 내가 이렇게 고귀한 사람이다라고 말입니다.

고귀함의 기준이 돈을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로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예의도 갖춰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예의를 잘 갖춘 사람이라 할지라도 돈이 없으면 그 사람은 고귀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실 가난한 사람이 자신을 아주 고귀한 사람이라고 느낍니까?
자신의 몸이 그렇게 귀한 존재라고 느낍니까?

이렇듯 이 땅에 살아가는 죄인들은 돈을 얼마만큼 가졌느냐로 자신의 가치가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돈이 없으면 자신의 아무것도 아니요, 배설물보다 더 못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돈만 많으면, 있으면, 떳떳하고, 당당하고, 큰소리치고, 남한테 꿀릴 것이 없는 그런 모습을 보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모습이야 말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그러한 태도입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들 중 그 주동자들이 누구입니까?
물론 모두가 주동자라고 볼 수 있지만, 가룟유다를 생각해 보면 그는 은 삼십 냥에 예수님을 팔아 버렸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 제사장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현 상태, 현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예수님을 죽이려고 결정을 내립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강생하셨을 때에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두 살 아래 아이들을 다 죽인 사실은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지위, 돈, 이것이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 주기 때문에 이런 것이 없어지면 자신은 정말 쓸데없고, 가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어떨까요?
바울의 모습을 한번 봅시다.

사람들이 보기에 바울은 정말 고귀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보였을까요. 아니면 참으로 불쌍하고, 천한 그런 인생으로 보였을까요?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바울은 참으로 고귀하고 괜찮은 인간으로 보였습니까?
사람들이 존경할 만한 그러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그 인생이 불쌍한 인생이 되어 버렸습니다.
거지처럼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형제들의 헌금을 통해 생활을 하게 되고, 매도 맞고, 굶주리고, 헐벗고, 옥에 갇히고.
우리도 생각하기 싫은 그런 모습, 꺼리는 그런 모습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왜 그렇게 미움을 받고, 쫓겨 다니는지.
답답한 일은 얼마나 자주 당하는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이런 일은 겪지 않아도 되는데.

바울의 모습은 우리가 정말 싫어하는 그런 모습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4:7)

보배란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질그릇에 가졌다고 합니다.
즉 우리가 질그릇이라는 것입니다.

질그릇이란 볼품없는 고귀하지 않는 그릇이지요.
금그릇 정도 되어야 고귀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질그릇도 어떤 장인이 만들면 고귀한 그릇이 될지 모르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존재, 성도를 질그릇과 같은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 이유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값비싼 다이아몬드나, 값비싼 차량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가치 없는 존재인가를 생각지 않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인간인가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정말 고귀하신 분, 값비싼 분, 어떻게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보배이신 예수님을 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귀하시고, 귀하신 주님께선 우리의 존재를 참으로 가치 없게 보이는, 천박해 보이는 모습으로 만드셨습니다.

여러분 기분 나쁘기 않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고귀하고, 존경할 만한 존재로 만드시지 왜 그렇게 멸시받고, 천대받을 만한 존재로 만드셨는가라고 말입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한가지 입니다.
능력의 심히 큰 것이 주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땅에서 성도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사람들로부터는 멸시 받고, 무시당하고, 미움 받는 모습, 전혀 본받고 싶지 않는 그런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니 누가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겠습니까?


예수님을 믿게 되면 무언가 고상해 보이고, 존경해 볼 만한 그런 모습이어야 하는데, 이는 노상 사람들의 입에 조롱거리고, 심심풀이 땅콩 정도로 여겨지니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런 성도의 모습을 살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오직 능력은 십자가 지신 주님께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가를 알게 하기 위해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질그릇 같은 인생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답답한 모습, 가치없는 모습, 연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도의 입에서는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8절부터 봅시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바울을 볼 때 미친놈이라 하지 않겠습니까?
우겨쌈을 당했는데 자신은 싸이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여러분 돈이 없는데, 가난한데, 자신은 가난하지 않다고 해 보세요.

그걸 믿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하, 저 사람은 그냥 스스로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저렇게 말하는 구나라고 생각지 않겠습니까?
답답한 일을 당해 정말 낙심할 만한데 낙심치 않습니다.
핍박을 받지만 주님으로부터는 결코 버림을 받지 않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미움 받고 핍박을 받아 버림을 받은 인생이라 여겨지지만 주님으로부터는 결코 버림을 받은 인생이 아닙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이런 말을 들을 때 이해가 갈까요?
저런 미친놈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제가 지금까지 여러분들에게 이런 말씀을 전했습니다.
십자가만 믿읍시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혹시 이런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십자가가 밥이 나오나 떡이 나오나, 그것이 무슨 능력이 되나. 돈을 벌어야지, 돈이 능력이고 힘이지.

십자가는 그냥 외침일 뿐이요, 그것이 능력이 된다는 것은 이 땅 이야기가 아니라 저 땅 이야기고, 이 땅에서의 능력은 오직 한 가지, 돈 밖에 없다라고 생각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히려 우리들을 자꾸 연약한 존재로, 힘이 없는 존재로 세워나가십니다.
이것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난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정말 불쌍해 보이는 존재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주님께선 우리에겐 능력이 없고, 오직 십자가 지신 주님만이 능력 있음을 이 땅에서 알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돈이 능력이요, 건강이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결코 십자가의 능력에 대해서는 능력이라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10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의 죽음을 항상 자신의 몸에서 반복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것, 없어지는 것, 이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항상 없어지는, 죽음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렇게 살아감으로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성도란 결국 이런 모습을 보입니다.
함께 11절을 읽어 봅시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주님께서는 주님의 피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습니까?
그런데 영생을 주셔놓고 이 땅에서는 우리를 항상 죽음에 넘기우십니다.
우리를 죽을 육체임을 날마다 절감하게 하십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를 통해 증거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생명의 빛을 우리에게 던져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정말 귀한 존재, 고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왜 이렇게 성도를 귀한 존재를 만드셨을까요?
그것은 생명을 주신 주님,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이 땅에서는 고귀한 존재의 모습이 아니라, 참으로 답답한 인생, 불쌍한 인생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빛을 주신 것은 ‘그래 너희들 영생 얻었으니 이제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아라’ 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너희들 보배를 가졌으니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면서 살아라고 보배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 보배가 제대로 드러나려며, 어떻게 되어야 하겠습니까?
자신은 보배가 아니어야 하고, 이 보배가 더욱더 진가를 발하려면 철저하고 그 보배와 대조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으로 모습이야 말로 보배를 정말 보배답게 보여 주는 모습니다.
자살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 때문에 성도는 이런 길을 걷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보배를 가졌는데, 그 사람의 실제 모습은 어떻습니까?

두 가지의 모습을 보입니다.
한 종류는 그냥 보배를 받았던 받지 않았던 상관없이 이 세상 인생처럼,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지 않고 살아가는 자칭 성도라고 하는 자들입니다.

또 한 부류는 어떻습니까?
자신이 보배를 받았으니 교회 안에서 자신이 존경을 받고 높임을 받으려고 하는 모습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믿는 주님과 상관없는 자들입니다. 이런 인간은 값비싼 옷을 입고,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 좋은 차를 타고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 그런 인생과 같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선 보배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보배를 더욱 빛내시기 위해 우리를 죽음 가운데로 몰아가실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능력은 오직 십자가 지신 주님께 있음을 알아가게 하시고, 주님을 증거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의 기도제목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마음
고린도 후서4:12-18

믿음의 생활이란 어떤 것일까요?
즉 예수님을 믿는 삶이란 어떤 삶 일까요?

12절에서 주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우리는 무슨 생각이 떠 오릅니까?
예수님께서 명하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떠오르지요.

바울은 지금 그 말씀을 온 몸으로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 자신이 희생하여 남을 살리는 것이 과연 예수님께서 명하신 이웃 사랑인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렇게 사는 사람이 어디 이 세상에 한 둘이겠습니까?

그러면 이들이 모두가 다 주님의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일까요?

이것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그렇게 살아간다면 그것이 이웃사랑, 즉 믿음의 삶일까요?

우리는 이런 삶이 믿음의 삶이 아님을 단호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실상 믿음이라는 것은 사람의 온 몸으로 나타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몸에서 어떤 행위, 남을 돕는 행위, 자기를 희생하는 행위가 나왔다고 해서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하기는 곤란합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히브리서11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자신의 몸을 통해 보여 주는 자가 참 믿음이 있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너무나 쉽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사 주가 되셨습니다.
이제 주님되신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자는 이 주님의 지시를 받고 삶을 살아갑니다.
따라서 이런 성도의 삶은, 그 삶을 통해 만유의 주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는 자로, 증인으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분, 사람들이 무시하는 그 분을 위해 일생을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 중 한 사람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입니다.

죽음이 항상 자신들, 즉 바울 일행들 안에서 역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한다고 말합니다.
무엇 때문에 죽음이 자기들 가운에서 역사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위하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너희 안에서 라는 표현에서 이것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 만이라고 생각지 않기를 바랍니다. 물론 편지가 고린도 교회에서 보내는 편지이기 때문에 그렇게 볼 수 있지만, 이것을 우리들을 일반화 시켜야 합니다.

바울이 왜 죽음에 넘기운다고 합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위해 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을 위해 살았습니까?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전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생겼고 이들은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전함으로 말미암아 바울 일행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로부터 핍박과 미움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12절에서 하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시편 116편10절을 인용하면서 자신도 믿는 고로 이렇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함께 시편 116편을 잠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만을 믿는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죽음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음을 말하면서 결국 성도의 죽음 조차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고 계심을 믿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여호와께서 주신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물론 이러한 믿음은 그가 죽음에서 벗어났을 때에도 여전히 그 믿음을 사람들에게 보여줍니다.

바울은 이런 시편을 인용하면서 지금 자신의 상황이 이런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에 직면한 상황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시편 116편을 이런 식으로 해석해 냅니다. 즉 116편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고린도 후서 4:14,15절입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성도의 죽음이 왜 귀합니까?
그럼 성도가 왜 죽음에 넘기웁니까?
그것은 믿음 때문입니다.

그러면 죽음이 왜 귀합니까? 그것은 이 죽음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널리 전파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믿음 있는 자란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는 자가 믿음 있는 자입니다.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시는 분이 주님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만일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이런 믿음이 없으면 그 사람은 가짜 믿음입니다.
시편 116편 8.9절을 좋아하겠지요.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도다 내가 생존 세계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아마 이 본문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여, 이 세상에서 어떤 죽음의 위기나, 슬픔이나 넘어짐에서 여호와께서 건져 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서 낙을 누릴 것을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에겐 환난이라 슬픔이나 죽음의 위기란 그저 스쳐가는 바람이라 간주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항상 죽음에 넘기운다고 말합니다.
디모데 후서3:12절을 보게 되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경건하게 산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경건하게 산다는 것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이들이 믿는 것은 이 땅의 돈이나 명예나 권세가 아닙니다.

오직 죽음에서 부활하시어 주가 되신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싫어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사람들이 싫어합니까?
그것은 자신들이 좋아하고 기뻐하는 것을 예수님 쪽에서는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것이 죄라고 지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 허상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당연히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이 이들이 평소 갖고 있는 믿음인데 이와 전혀 다르게 예수님의 복음이 다가가니 거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부할 뿐 아니라 미워하고 핍박을 가합니다.

오늘날 교회를 보면 그렇습니다.
교회가 더욱더 부하게 되어 가고 있습니다.
물론 부하게 되어가는 것이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신봉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부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실 성도는 이미 축복을 다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복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 즉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믿음을 축복이라고 간주하고 싫어합니다.

그것도 축복은 축복입니다. 그러나 그 축복이 이 세상에서 나타나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가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는 진정 믿음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역지가 없다고 해 봅시다.

수년을 사역지가 없이 논다고 가정해 봅시다.
물론 주님보시기에는 노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 없는 자들이 보기엔 늘 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를 향해 어떻게 말할까요?

예수님을 믿는다면 왜 저렇게 살까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왜 길을 열어주시지 않을까라고 비웃지 않겠습니까?

성도라고 해 봅시다.
그 사람의 사업을 한다고 했을때 망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하나님께서 다시 성공시켜 주실것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계속해서 어렵다고 할 때 결국 사람들은 그를 향해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왜 저럴까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저 사람은 믿음에 문제가 있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게 이 땅에서 통하는 믿음의 상식입니다.

여러분의 부모님들이 다 계시지요.
그런데 여러분들의 경제생활이 나아지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 간주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이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 동일하게 하는 고백입니다.
15절을 보게 되면 “모든 것은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게 되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지 모릅니다.
그래 복음 전하는 자는 고생을 죽도록 하지만 복음을 듣는 자들은 은혜로 인해 감사함이 넘친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 은혜와 감사함은, 이 땅에서 그럴듯하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큰 잘못입니다.
이런 은혜는 없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바울의 삶을 반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영이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 계속해서 환난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잠시 받는 환난이라고 합니다.
무엇과 비교할 때 그렇습니까?
영원과 비교할 때 그렇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자의 고백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결코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지요.

그래서 1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이런 고백을 하며 살아가는 자가 참된 성도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자의 모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고백을 하는 성도이기를 바랍니다.








두려움
고린도후서5:1-10
사람이 진정 무엇을 두려워하고 살아가는가가 중요합니다.
사람은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들로 인해 결국 그거에 굴복하게 됩니다.

그 두려운 것에 매여 일평생 종노릇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히브리서2: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은 죽음을 그렇게 두려워할까요?

사람이 처음 만들어 졌을 때 죽음이라는 것이 생소했을까요. 아니면 익숙한 것이었을까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죄를 범하기 전에는 결코 두려움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말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나 짐승들이나 어떤 것 앞에서도 두려움이라는 것이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들은 두려움을 아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창세기3:10절을 보세요.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이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창2:17).

아담과 하와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은 이들이 죽음에 직면한 존재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선악과를 따먹은 후 자신들이 벗었음을 알게 되었고, 이것은 곧 죽음 앞에 자신들이 서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급히 취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역어서 입었습니다.

이들은 이렇게 행동함으로 말미암아 죽음에서 벗어날 줄로 생각했습니다.

이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의 눈을 피해버리면 자신들이 두려움에서 벗어날 줄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치마를 해 입든, 숨든지 이들은 여전히 죽음의 공포 속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숨기고 감추고, 덧입어서, 이런 공포를 물리쳐 보려고 합니다.

창세기 11장1-9절을 보면 인간들이 바벨탑을 쌓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들이 왜 바벨탑을 쌓으려고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어떻게 하시지 못하게 하려고 자신들의 힘을 함께 모아 보자는 것입니다.
창11:4절을 보세요.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대적합니다.
창세기 11:4절에서 나오는 인간들의 단합된 말의 내용은 창세기 1:28절에서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말씀과 정면으로 위배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아담이 죄를 범한 후 사람들은 흩어지면 죽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죽음의 공포가 그들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들에겐 하나님의 축복이 축복으로 들려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을 죽음의 자리로 몰아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사력을 다해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오늘을 사는 인간들은 어떻습니까?
당연히 성경말씀과 일치하겠지요.

사람들이 왜 자꾸 돈을 끌어 모으려고 하고, 아들을 낳으려고 하고, 사업을 더욱더 번창하게 하려고 할까요? 그것은 죽음이 두렵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들은 무언가에 쫓기고 있고, 압박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런 것들을 떨쳐 버리려고 더 많이 더 많이 모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이 두려움 속에 사로 잡혀 있습니까?
그것은 첫째 아담이 죄를 범한 후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자가 마귀가 되었습니다.
마귀의 종이 되다 보니 마귀가 자꾸 인간들을 부추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죄인들은 자꾸 하나님과 한판 붙어 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조장해 내신 그 두려움을 완전히 깨부수자는 것입니다.
이 일이 되던 되지 않던 말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지 못하고, 그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 하면서 그 하나님과 한판 승부를 벌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땅에 있는 장막집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이유로 인해 장막집이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발악을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 하게도 예수님을 믿는 자를 핍박할 때에는 이 장막 집을 없애려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예수님을 믿는 자도 두려워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신약의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죽음으로 이들을 위협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공포, 죽음의 공포를 없애 버리려고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만 없으면 자신들의 세상, 죽음의 공포가 없는 세상이 될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한다고 해서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참으로 딴 세상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는 인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한다고 합니다.
죽는 것이 소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이야 말로 죽을 것이 생명에서 삼키우는 순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바울은 한 가지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습니다.
죽는 것이 소망은 소망인데 죽음이 이 땅의 인간들에게 허무하게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바울 일행이 사지로 자꾸 몰려가는 것을 볼 때에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별수 없구나 생각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야 말로 생명에게 삼키우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인간의 노력과 애씀, 죽음으로 달려가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항상 담대하게 살아갑니다. 죽음의 자리로 몰아붙이우면서 말입니다.
이런 가운데 성도는 무엇을 인식하고 살아갑니까?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한다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이런 가운데 성도가 이 땅에서 사는 삶은 믿음으로 사는 삶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붙들고 사는 자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믿고 살아간다면 바울의 모습이야 말로 참으로 믿음 없는 자가 됩니다.

여러분 성도는 믿음으로 행하며 사는 자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는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눈에 보이는 것 중의 하나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몸입니다. 이 몸을 위해 온갖 노력과 정성을 기울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습니다. 두려움을 없애는 방법입니다. 죽음으로 두려움을 없애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에겐 죽음이라는 것이 오히려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는 일임을 아는 자입니다.

장막에 있을 때에 성도도 여전히 짐 진 것 같이 탄식을 합니다.
왜 탄식을 합니까?
그것은 빨리 육신을 벗어 던져버리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고난이 빨리 끝나버렸으면 하는 바람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죽을 것이 생명에서 삼키우기를 바램에서 하는 탄식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성도의 유일한 소망이기에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8절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실제로 우리는 이 땅에서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주님과 함께 살지 않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보기에 헛짓하는 것이라 생각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도는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사실 하나 있습니다.
성도가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글자 그대로 유일한 소망이 되어 버리면 어떤 결과가 초래 될까요?
모두가 다 빨리 죽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것이 아닙니다.
성도가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살아 있든지, 죽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 되지 못할 경우,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과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결코 그럴 수 없지요.

믿음이 없이 어떻게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바울은 10절을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 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성도는 믿음으로 산 자입니다.
심판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주님되신 예수님을 믿고 살았느냐 아니면 믿지 않고 살았느냐가 그 기준이 아닙니까?

주님을 믿고 산 자들은 자신의 몸으로 그 믿음, 즉 주님을 증거하면서 살았습니다.
죽음에 넘기우면서도 늘 믿음으로 산 자야 말로 생명의 부활에 참여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10절을 오해할까 싶어서 한 말씀 더 드립니다.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는다는 표현을 두고 인간들은 또 믿음으로 생각지 않고 행위, 즉 눈에 보이는 것으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바울이 한 말이 믿음에 대한 이야기 였음을 깜빡 잊어버린 자들이지요.

5절을 보면 성령을 보증으로 우리에게 주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제발 여러분 믿음으로 사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시도다.
고린도 후서 5:11-21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산다는 것은 이 땅에서 어떤 식으로 나타날까요?
제가 어느 인터넷 홈페이지를 보았는데, 그곳에 이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자신과 친구가 대화를 하는 중에 믿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행함이 없는 믿음이란 있을 수 있느냐라고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질문을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행함을 믿음으로 해석할 수 있고, 행함을 행함 자체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행함을 믿음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아니라 자신의 애씀과 노력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나 행함을 믿음으로 해석할 경우엔 그로부터 나오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주되심만 증거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주님을 믿고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한번 보겠습니다.

11절에서 바울은 주의 두려우심을 안다고 합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 성도가 살아가는 삶의 기본적이 태도입니다.
성도는 진정으로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를 아는 자입니다.

지난 주 말씀드린바와 같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는 성도라 볼 수 없습니다.

왜 이렇게 제가 단정적으로 말씀드리는고 하면 성경 말씀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0:28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은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는 자들은 무엇을 두려워합니까?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는 분이 아니라 이 썩을 것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 공허하게 들립니까?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몸을 죽이려는 자를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직접 이러한 일에 부딪힌다면 과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자꾸 믿음 없이 생각하니 이런 두려움 속에 사로잡혀 버립니다.

마태복음 10장 20절을 보게 되면 핍박과 죽음 가운데서도 성령님께서 말할 바를 말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7장에서 스데반이 죽음 앞에서도 주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볼 때에 스데반이 대단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사실 이미 주님 되신 예수님께서 이 모든 사실에 대해서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니 성도는 조급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 되신 예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도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이미 주님께서는 누가 믿음이 있는 자인지 없는 자인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주님을 두려워하는 모습이 이 땅에서 어떤 식으로 드러나는가를 살펴봅시다.
물론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의 한 면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13-15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관심이 오직 한군데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엔 너무나 꽉 막힌 사람입니다.
융통성이 조금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보기에 얼마나 답답한 인생이며, 불쌍하게 보이는 인생일까요?

미쳐도, 정신이 온전하여도 모두가 다 주님을 위하여 그렇다는 것입니다.
13절에서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 이것은 같은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너희가 도대체 누구들입니까?
성도들입니다.
주님의 피로 사신 자들입니다.

그러니 이들을 위한 것은 곧 주님을 위한 것입니다.

이 내용은 조금 있으면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시기 때문에 미쳐도 주님을 위해, 정신이 온전하여도 주님을 위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성도에겐 항상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저가 모든 사람을 위해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이 죽으심의 의미는 성도에겐 동일한 죽음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이미 성도는 죽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산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이제 살아가고 있다면 그 삶은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대신 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신 분을 위해 사는 인생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런 식으로 곡해해 왔습니다.

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 사랑.
아주 이기적인 사랑을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은 우리 자신을 결국 죽은 자로 간주하십니다. 그리고 오직 살아가는 이유를 주님을 위해 사는 것으로 보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주 단정적으로 말해 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모든 것을 육체대로 보지 않고 믿음으로만 보고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다 새로운 피조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이 없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러니 원래 피조물들이 갖고 있는 사고방식, 즉 눈에 보이는 대로 살아가는 자가 아닙니다.

이렇게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은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새로운 피조물의 역할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화목제물 되심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사람들의 핍박과 미움 속에 사는 것이 곧 예수님의 화목제물 되심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하심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물론 고린도 교회 성도들로부터 불신을 받는 것도 다 화목제물 되신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들의 화목케 하는 직책을 사용하여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고민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한다고 화목 되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결국 이 말씀을 듣는 상대는 주님의 택한 백성임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21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도의 존재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강권이 있을 때에는 그의 관심은 오직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로 드러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고 어떻게 되던 다 좋은데 오직 예수님이 주님 되심만 증거되어진다면 괜찮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 마음을 가진 자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 새로운 피조물은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며 살아가는 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살아가는 믿음의 태도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고린도 후서6:1-10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듣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힘든 일을 당할 때,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럴 경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는 너무나 개인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집니다.
개인적인 건강이나 재물을 많이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지면 하나님은 절간에 있는 부처나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부처야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인간을 만드신 분을 부처수준으로 알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많은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자들이 이런 식으로 이해를 합니다.

오늘 분문1절을 보게 되면 바울이 자신들이 하는 일은 결코 자신들 독자적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일합니까?
옆에 오셔서 도와주시는 것입니까?

복음을 전할 때 옆에서 힘내라, 힘내라, 이렇게 응원하시는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5장 6절에서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죽음에 직면하면서 항상 몸으로 체험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과 따로 거하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을 믿고 살아가기에 죽음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기대와는 전혀 다른 식으로 이 땅에서 몸 가운데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들의 특징을 이제부터 살펴봅니다.

1절을 보게 되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살아가는 자의 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당장 이런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래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자. 자 보자,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는 것이지. 그러면서 성경을 계속 읽어내려 갑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6장에서는 우리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말씀이 튀어나옵니다.

2절을 보세요.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여러분 이 말씀이 여러분의 기대를 충족시켜 줍니까?

우린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는다는 것은 주님께서 베푸신 구원에 재빠르게 손 내미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2절을 이해하려면 이사야서를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이 구절이 본래 있던 이사야 49장으로 가서 이 말씀의 의미를 먼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8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로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케 하리라”

고린도 후서 6장 2절에서 인용된 것은 메시야 사역, 즉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말씀임을 우리들은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메시야를 통해서 구원,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9,10절을 보세요.
“ 내가 잡혀 있는 자에게 이르기를 나오라 하며 흑암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라 하리라 그들이 길에서 먹겠고 모든 자산에도 그들의 풀밭이 있을 것인즉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니라”

9절을 자세히 보시면 이들은 본래 사로잡혀 있던 자라는 것입니다. 즉 흑암에 놓여 있던 자들이랍니다. 이사야 39장을 보게 되면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갈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문자적으로 이 본문을 보게 되면 바벨론 포로에서 자유케 되는 일이 메시야로부터 되어 진다는 말입니다. 오직 메시야의 긍휼로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본문의 참 의미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한 사건을 사용하셔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소개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죄인들은 항상 그 사건에 눈을 고정하고 그 사건에 온 마음이 빼앗겨 버립니다.
이것은 죄인들의 본성인데, 이런 본성으로 인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성경을 그렇게 잘 알던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죽였습니까?
바로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이런 모습이야 말로 전형적인 긍휼을 입지 못한 자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이 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이들의 상황은 완전히 흑암 속에 갇힌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는 자가 되었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들에게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외쳐도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직접 오셔도 알아 볼 수 없는 소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사야 선지자가 이들을 향해 아무리 외쳐도 알아들을 인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긍휼을 베푸신 것입니다.
메시야를 통해서 말입니다. 물론 이사야 48장에서는 고레서 왕을 말씀하고 있지만 실은 예수님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이 없으면 성경을 보아도 완전히 이해하는 입장에서 성경을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메사야를 통해 흑암에 놓인 자, 갇힌 자, 바벨론 포로된 자, 즉 죄악에 사로잡힌 자,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를 긍휼로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데 어떻게 긍휼을 베푸시는가 이것이 오늘 설교에서 핵심되는 내용입니다.

그냥 긍휼로 구원해 주셨다가 아닙니다.
메시야가 어떤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십니까?
그 내용이 이사야 52장13절에서 53장에 걸쳐 나타나고 있습니다.

긍휼을 베푸시는, 죄에서 자유케 해 주시는 메시야의 꼴이 말이 아닙니다.
이사야 53장 14절을 보세요.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야의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믿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런 몰골을 하고 나타났는데 누가 믿겠느냐는 것입니다.

15절을 보세요.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도저히 믿을 수 없는데, 긍휼로 믿게 된 자들이 왜 메시야가 이런 모습으로 오셔야만 하셨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53장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인간들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주님의 권능이 너무나 희한하게 이 땅에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은혜 베푸심이 인간들이 감히 상상도 못하는 모습으로 이 땅에 나타난 것입니다.
자기백성의 죄를 담당하는 모습으로 메시야가 오신 것입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은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참으로 암담하고, 소망 없던, 인생에게 참 소망이 생긴 것입니다.
바로 잡혀던 자가 놓여지게 된 것입니다.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자가 참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렇게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그러니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말씀의 의미는 우리게 이해하는 것과는 너무나 거리게 먼 의미입니다.

그것은 너희들은 처음부터 은혜를 모르는 자였다. 너희들이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말을 듣는다고 해서 그 말씀을 알아듣고 순종할 수 있는 그런 인간들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본래 그런 자였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긍휼로 너희들을 구원해 주셨고, 은혜를 베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이 구원을 얻지 않았느냐는 말입니다.

2절 하반절에 나오는 말씀도 그렇습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너무나 희망차게 들리는 말씀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이 말씀을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정말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누구에게 해당되느냐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다 해당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오직 택한 백성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택한 자만 예수님을 떠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2절 하반절 말씀이 너무나 희망에 찬 말씀이지만 이 말씀에 해당사항이 되지 못하는 자들은 너무나 절망적인 말씀입니다.

그러나 지금 바울의 편지를 받는 자들이 성도임을 전제할 때에는 이 말씀이 분명 희망적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이 말을 왜 할까요?

그것은 바로 너희들이 과연 성도가 맞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성도라고 하는 자들이 왜 은혜를 헛되이 받는 자의 모습을 띄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무로 돌려 버리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3-10절을 말합니다.
우리 함께 읽어 봅시다.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 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바울이 지금 이렇게 말하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자신들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의 근거를 이렇게 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메시야의 사역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십자가의 고난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말이요, 그 고난을 자신의 온 몸에 담고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어떤 본은 너무 흑백으로 갈라서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말씀하실 지로 모르지만, 주님이 지금 고린도 후서를 통해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음이 좁아짐
고린도 후서 6:11-18
성도가 성령 안에 살면서도 주님 말씀과 멀리 하며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지난 주 우리가 살펴본 6:1-10절을 간단히 생각해 봅시다.
은혜를 제대로 아는 자란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는 자입니다.

자신이 흑암에 놓여 있었고, 예수님께서 속죄 제물이 되심으로 죄용서함을 받아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입니다.

그러니 이 땅에서의 삶이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과 동일함을 몸으로 체험하면서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거절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은혜를 헛되이 받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과연 어떨 경우에 이런 상황이 발생할까요?

그것은 마음이 좁아 질 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귀에 거슬립니다.

우리도 이럴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언제 입니까?

세상 것이 좋을 때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좋을 때 입니다.

이럴 경우 주님의 말씀이 귀찮아 지고, 말씀이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경우입니다.
우리 하는 말로 양심에 털이 났다고 하지요.
전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에 대해서 철저하게 무시하며 살아갑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으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보는 고린도 후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바울을 통해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하는데, 도무지 잘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이 하는 말이 고깝게 들립니다. 너무 듣기 싫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반대로 이들을 향해 마음이 활짝 열려 있고, 이들에게 속이거나 하는 일이 전혀 없이 자신이 받은 바를 가감 없이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싫어합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다.

그 원인은 그들의 실제 생활가운데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14-16절 상반절까지 봅시다.

다시 함께 읽어 봅시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십자가의 은혜를 무로 돌리는 경우가 바로 이럴 때 발생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사고방식의 경우 발생하는 것입니다.
왜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합니까?
왜 의와 불법이 함께 조화롭게 지내려고 합니까?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서 재미있고, 즐겁게 살아가고자 하는 데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하려면 자신이 갖고 있는 복음을 포기해야 합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숨기지는 않을 지라도 그 예수 믿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도록 상대편에서 인식을 심어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려면 믿지 않는 자들과 함께 놀아야 합니다.
그들의 즐거움에 함께 참여하고, 즐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 안에 살아가는 기쁨은 별 의미가 없어집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오직 눈치 보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눈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결코 성도의 모습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주님의 은혜를 멸시하는 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이 이런 사람의 귀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자꾸 주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고 거부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하는 직장에 다니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과 함께 밥을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된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전서에서 분명 말합니다.

이런 것은 고린도전서 5:10절에서 말했습니다.
결코 세상 밖으로 나가서 살아가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말입니까?
바로 방금 전에 제가 말씀드린 그런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사고 방식 말입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별거 아닌 것이냥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방식 말입니다.
성도란 어떤 자입니까?
지난 주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십자가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큰 은혜를 우습게 여기면서 살아가느냐는 말입니다.
여러분들 어떻습니다.
물건하나 더 팔기 위해서, 아니면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십자가의 복음을 우습게 만들지 않습니까?
믿지 않는 자들에게 잘 보이려고 복음이고 무엇이고 상관없는 자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면 결국 말씀은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필연적입니다.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그 말씀은 귀찮은 말씀이며, 뭐니 뭐니 해도 돈이 최고며,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주일마다 십자가의 은혜 은혜라고 외쳐 보았자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이 즐거움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그것이 돈을 가져다 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들과 동화되어 살아가는 것이 최고가 아니겠습니까?
제 친구 아들 이름이 동화인데, 이름의 뜻은 밝고 밝은 뜻의 의미인데 이 동화란 전혀 다른 의미이지요.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땅에 살아가는 자입니다.
이 자녀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땅에서 그 삶을 살아라고 십자가의 은혜를 베풀었는데, 그 사는 꼴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를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모습이라면 이런 자를 누가 하나님의 자녀라 하겠습니까?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자라 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잘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이 땅을 살아갑니까?
예수님만 믿으면 되지, 우리의 모습이야 어떠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
말은 맞습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죄를 범하는 자로 살아갑니다.
은혜를 멸시하는 자로 살아갑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오늘 본문을 왜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이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목표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다시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자로 살아가는 자가 성도임을 분명히 다시 한번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 자신을 합리화 하는 자가 아니라, 참으로 죽을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기회만 있으면 주님의 은혜를 멸시하는 그런 악한 죄인임을 다시 한번 알게 됩니다.

여러분 참으로 우리는 오늘 말씀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의 긍휼이 아니라면 우리는 구원과 상관없는 자, 지옥불에 떨어져야 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만일 오늘 말씀이 천국백성의 커트라인이라면 우리는 어느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미친 자가 이렇게 오늘 본문을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거룩하게 구별되게 사세요 라고 말입니다.
만일 오늘 본문을 이렇게 보게 된다면 이런 자는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의 성경관과 일치하는 자입니다.
이런 자는 십자가의 은혜를 전하는 자를 조롱하고 멸시하며, 비판할 것입니다.
이런 자가 십자가의 이름으로 십자가를 전하는 자를 핍박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악한 죄인임을 지적받으면서 십자가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알아가는 성도입니다.










함께 죽고 함께 산다
고린도 후서7:1-4

오늘 본문을 보면서 참으로 어쩌면 그렇게 오늘날 교회라는 집단과 거리가 먼 이야기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날 목회자와 교인들과의 관계를 보게 되면 서로의 주님이 따로 존재함을 알 수 있습니다.

목회자는 자신이 주이고, 교인들 역시 자신이 주입니다.

이들의 공생관계는 서로에게 상처만 주지 않으면 문제가 없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목사가 설교시간에 어떤 교단 목사가 잘못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마침 그 설교를 듣고 있던 사람이 그 목사를 아주 존경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화가 나서 그 교회를 떠나 개척교회를 세웠습니다.
이것을 막기 위해 목사는 자신의 말이 잘못되었다고 빌었다고 합니다.

이런 목사에겐 주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목회입니다. 성도가 빠져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입으로 성경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말해 놓고, 성도가 빠져나가려고 하니 그 말을 취소한다고 한 것입니다.

얼마나 웃긴 것입니까?
여기에서 오늘날 목사가 어디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진리엔 관심이 도무지 없습니다. 예수님께 관심이 있다면 결코 이런 짓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목사임을 아는 사람들은 어떤가? 장로들 집사들은 어떨까요?
이들은 그저 이 목사가 계속 교회에 남아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속으로는 저놈 하면서도 겉으로는 그 속내를 드러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민중들이 두려워서입니다. 조금 더 생각해야 보면 나는 나의 종교취미생활을 즐기고, 너는 너의 종교취미생활을 즐겨라 이거지요.

십자가 십자가 이야기 하지만 이들에겐 진리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보게 되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자신들을 마음으로 영접하라고 부탁을 합니다.
이런 것을 보게 되면 우리는 고린도 교인들이 사도바울 일행을 지금 마음으로 영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 단단히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라고 말해 버립니다.

이것을 보게 되면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 일행을 향해 왜 불만을 갖고 있는지, 왜 마음으로 영접치 않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지금 바울 일행을 삐딱하게 보고 있습니다.
바울일행은 불의를 행하는 자들이다. 아니만 남을 괴롭게 하는 자다. 속여서 남의 것을 빼앗는 자다라는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바울 일행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정도만 되어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요즘 교회는 어떻습니까?
불의를 행해도, 남을 괴롭게 해도, 속여서 남의 것을 빼앗아도 눈을 꼭 감아 줍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면 진리를 전하지 않아도, 진리에 대해 사기를 쳐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만 해롭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니 오늘날 목사들이 탐욕을 부려도 성도들은 별로 상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도 여전히 탐욕을 부리는 자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이것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대충 전하고, 듣고 그렇게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바울 일행에 대한 잘못된 견해이지만, 그런 태도로, 그런 행동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는 결코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태도야 말로 성도가 가져야할 기본적이 태도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살아간다면 그 기준이 목사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십자가의 복음 중심이어야 합니다.

그러니 오늘날 교회는 이런 문제 있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로부터도 책망을 들을 수준에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이러한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단호히 말합니다.
나는 결코 불의를 하지 않았고, 어떤 누구도 해롭게 하지 않았고, 속여 빼앗은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결과가 발생합니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정죄 받는 꼴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잘못되었다고 비판을 가했는데 나는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고 하면 그 비판을 한 사람의 악의가 드러나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도라면 바울의 이 말을 제대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3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내가 정죄하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로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고자 함이라”

바로 이것입니다.
바울이 잘못을 지적하는 이유는 바로 함께 죽고 함께 살고자 하는 이유에서입니다.

성도란, 바울이든 고린도 교인들이든 모두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들입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자들입니다.

바울이 잘못된 것을 단호하게 지적한 이유는 성도란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사는 자임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에베소서 2장을 보게 되면 성도들이란 한 새사람으로 지으심을 받은 자입니다.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된 자들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잘못을 지적함으로 말미암아 함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하나 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죽고 함께 살 자들입니다.
목회자와 성도들과의 관계, 아니면 성도와 성도와의 관계는 함께 죽고 함께 살 자들입니다.

그러니 아닌 것은 분명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낙심할까 하여서 해야 될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자란 의식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나는 나대로 살고, 너는 너대로 살아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라가 아니라 불로타 없어질 이 땅에서 각자의 영역을 고수하면서 살자는 것입니다. 나는 너에게 간섭을 하지 않을 테니 너도 나를 간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설교를 할 때 대충 우리 귀에 거슬리지 않게 하시고, 그러면 우리도 당신을 나쁘게 대우하지 않겠습니다, 의 관계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하나되는 일에 대해선 관심도 두지 않습니다.

그저께 어떤 분이 저희 집에 놀러 왔습니다.
와서 자기 교회 목사의 잘못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 목사에게 그 잘못을 말할 마음도 없고, 뿐만 아니라 그 교회에서 나올 마음도 없습니다.
오직 그는 자신이 맡은 봉사의 일을 열심히 할 뿐입니다.

개 xx라고 욕을 하면서까지도 그는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려고 하고, 그 목사를 속으로는 욕하지만 겉으로는 인정하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너무 우습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 앞에서 두려움이란 전혀 찾아 볼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남이지요.

7장 1절을 보게 되면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주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이 없다는 말은 어떤 것입니까?
두려워 하는 것은 오직 죽음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살기 위해서 나는 나의 방식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만난 그 사람은 그 조직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가 칭찬해 주고, 장로가 칭찬해 주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서 속으로는 욕합니다.
그러나 살아야 하지요. 자신이 그래도 쓸모 있는 자임을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니 이 사람에겐 진리란 없습니다.
이런 모습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입니다.

4절을 봅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성도들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에 대해서 자랑할 것도 많다고 합니다.
문제가 많은 교회이지만 이들이 믿는 바는 분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잘못을 지적하면 들을 수 있는 자들이며, 십자가로 즐겁게 나아가는 자들임이 확실합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어떻게 바울이 이들을 신뢰할 수 있고, 이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이들의 중심에 오직 십자가밖에 없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물론 이 말은 이들의 생활이 완전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들이 비록 실수하고, 잘못하고, 죄를 범한다 하더라도 십자가의 사랑이 이들을 완전히 뒤덮고 있습니다.

그러니 바울이 비록 이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지만, 환난 가운데서도 이들을 통해 위로를 받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뿐이 아니라 기쁨이 넘친다고 말합니다.


성도와 성도의 관계란, 물론 목사와 성도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떠나 자신의 탐욕을 위해, 자신이 살고 싶음을 위해 살아가는 자가 있다면 이런 자는 성도라 부를 수 없습니다. 이들은 남의 잘못을 지적할 마음도 없고 지적 받을 마음도 없는 자들입니다. 십자가로 함께 나아갈 마음이 근본적으로 없는 자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십자가로 함께 나아갈 마음이 있습니까? 함께 죽고 함께 살 마음이 있습니까?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고린도후서7:5-16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도란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어떤 일을 결정한 후에는 더 이상 후회가 없어야 된다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사는데 인생에 있어서 무슨 후회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마치 성도의 인생이 완전하게 살아가는 인생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삶이라는 것은 참으로 평범한 삶입니다.
무슨 일을 결정했다가 후회도 하고, 때로는 그 방법을 바꾸기도 하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 쓴 것에 대해 후회했다고 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장 이런 생각이 들지요. 후회할 것 같은 짓을 왜 했느냐 말입니다.
조금 더 심사숙고하여 편지를 쓰는 것이 옳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함으로 말미암아 고린도 교인들은 큰 근심에 사로잡혔습니다.
이렇게 큰 근심에 사로잡히게 되다보니 바울은 자신이 괜히 편지를 썼구나 생각한 것입니다.

바울이 왜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까?
그들로 회개케 하기 위해 편지를 쓴 것입니다. 그런데 회개를 이루기는커녕 큰 근심에 성도들이 사로잡혀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이런 경우를 당하게 되면 괜히 편지를 썼구나. 참으로 후회가 막심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지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보냈는데 그것이 역효과가 나타나니 후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왜 후회하는 가입니다.
바울이 지금 왜 후회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고린도 성도들이 완전히 실족해 버릴까 해서입니다.
바울의 편지를 받고 낙담할까해서입니다.

주님을 더욱더 간절히 붙들어야 한다고 편지를 보냈는데, 주님을 간절히 붙들기는커녕 오히려 근심만 가득하게 사이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이 지금 후회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일을 행하고, 후회하는 모습은 우리들이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 그 마음의 중심이 어디에 가 있는 가입니다.

지금 바울의 관심은 오직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어떤 일에 대해 결정을 내리든지 아니면 그 결정 내린 일에 대해서 후회를 하든지 오직 관심이 주님 되신 예수님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더욱더 주님께 가까이 나아간 사실로 인해 바울은 너무나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 마음은 곧 주님의 마음입니다.
누가복음15장을 보면 집을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에 대해 나와 있습니다.
11-32절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습니다.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내 재산을 내게 주세요.
아버지가 두 아들 각자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후 며칠 지나지 않아 둘째는 나누어 받은 재산을 다 모아 먼 나라로 갑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그는 그 재산을 다 써 버렸습니다. 그런데 재수 없게도 둘째가 머무는 곳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러니 먹을 것을 구하기가 쉽지 않겠지요. 결국 가는 돼지 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돼지치는 자인데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도 먹을 수 없는 처지입니다.

사람들이 돼지에게는 먹을 것을 주어도 그 둘째에겐 먹을 것을 주지 않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 사람은 돼지보다 못한 처지에 놓인 것입니다.

그때서야 둘째는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로 갔습니다.
아버지는 둘째를 성대하게 맞아 주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첫째가 알게 됩니다.
여러분이 만일 첫째 아들이라면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아버지는 해도 너무 하시다. 어찌하여 저런 놈을 저렇게도 성대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라고 말입니다.
미운 짓만 골라서 하는 놈을 속을 하나도 썩이지 않는 자신에게는 생전 해주지 않던 대우를 해 준다고 해 보세요.

이거 열 받는 일이 아닙니까?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죽었다고 살아난 아들, 잃었다고 얻은 아들이기에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어떻게 세리나 죄인들을 가까이 하고 계신 가입니다.
너무나 꼴 보기 싫은 것이지요.

지금 고린도 교회의 모습이 꼭 둘째 아들과 같은 짓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열심히 전했는데 그 하는 짓이 심기를 아주 불편하게 하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마음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이들을 향한 마음이 분노의 마음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갖고 이들을 대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세요. 바울이 왜 편지를 썼는지가 나와 있습니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바울 일행을 향한 마음이 어떤가를 하나님 앞에서 들추어내기 위해서 편지를 썼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들의 마음의 중심에 누가 자리를 잡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 편지를 쓴 것입니다. 주님이 그들의 중심에 계신가 아니면 그들 자신이 그들 중심에 있는가 말입니다.

결국 고린도 성도들이 바울의 편지를 받고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11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 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이들의 중심에는 주님께서 자리를 잡고 계심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방금 읽은 본문에서처럼 말씀 앞에서 요동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요동침에 모두가 다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어떤 행위를 나타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이렇게 역동적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이 다이나믹 코리아를 선전하고 있지요.
성도란 선전선종한다고 해서 역동적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믿음 없는 자들이 하는 짓거리입니다.
성도란 늘 말씀 앞에서 살아가는 자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하루하루를 사는 자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도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나는 왜 말씀 앞에서 저들과 같이 요동치지 못하지. 이런 생각은 당연히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라면 오히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가질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면 나는 주님과 정말 상관 없는 자이구나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요동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또한 오늘 말씀을 주님께서 그대로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 주심을 믿으며 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동치는 삶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가 별나다고 생각합니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마음을 가진 자의 태도는 항상 꿈틀거립니다. 주님을 향해.

그러나 믿음 없는 자도 역시 꿈틀 거릅니다. 생존을 위해.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게 되면 우리는 늘 생존을 위해 꿈틀거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성도는 주님을 향해 꿈틀거립니다.
이런 모습이야 말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는 모습입니다.










은혜와 연보
고린도후서8:1-5
요즘 교회나 절간이나, 어디를 가든지 돈과 관련되어 있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돈으로 통하기 때문에 돈을 많이 바치는 자야 말로 믿음이 있는 자요, 희생하는 자요, 헌신하는 자라고 인정받게 됩니다.

어떤 바람, 소망에 대한 간절함도 돈을 얼마나 많이 바치느냐에 따라 그 간절함이 얼마나 큰가를 나타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돈이라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이 땅을 살아가려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족하게 되면 죽음에 직면한 것 같은 절망을 느낍니다.

그래서 요즘 우리들이 심심찮게 들리는 것이 생활고로 인한 자살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돈만 좀 있어서면 결코 죽음을 택할 리가 없습니다.
돈이 없기 때문에 죽음을 택하는 것입니다.

돈이 없는 것은 곧 죽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귀한 돈을 교회나 절간에 바친다는 것은 여간한 마음이 아니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들 마음속엔 믿음이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바치면 신께서 더 많은 것으로 축복을 내려 주실 것이야”라는 믿음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드러내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많은 교인들 중에 자신이 헌금을 왕창 하므로 말미암아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됩니다.

야, 참으로 믿음 좋은 사람이야. 믿음이 얼마나 좋기에 저렇게 많이 헌금을 할까?
없는 중에도 저렇게 많은 헌금을 하는 것을 보니 참으로 믿음 있는 사람이구나!

돈 있는 사람이 헌금을 해도 마찬가지 입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얼마나 부러운 눈으로 쳐다 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얼마나 축복해 주셔서 저렇게 헌금을 많이 할 수 있을까?


오늘날 교회의 헌금은 남과 비교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헌금이 되어 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탐욕을 가장 적극적으로 나타내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것을 부추겨 주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바로 목회자들입니다.
이들은 헌금을 부추겨서 믿음이 얼마나 좋은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나타내 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바와 전혀 다른 헌금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연보라는 것은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라는 말은 교회에서 아마 가장 많이 쓰는 단어일 것입니다.

우리의 공로 없이 십자가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것을 은혜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연보를 은혜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너무나 당황스럽게 하고 놀라게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연보, 헌금은 무엇입니까?

내가 수고해서 번 돈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여 드리는 것을 헌금이요, 연보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내가 수고해서 번 돈을 갖고 하나님께 감사하여 드린다는 것이 아니라 은혜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은 내가 수고해서 번 돈을 갖고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이 아니라 헌금 자체가 나의 공로와는, 나의 수고와는 무관한 주님의 은혜라는 말입니다.

자시 말씀드리면 연보라는 것은, 헌금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연보를 은혜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연보를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결코 은혜라는 표현을 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연보를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냥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러니 연보 많이 한 자들이 큰 소리 치고, 연보 적게 하는 자들은 얼굴도 못 드는 교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장로가 되려면 사업이 잘 되어야 하고, 돈이 많아야 됩니다.
돈 없는 권사는 주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정말 은혜와 전혀 상관없는 헌금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니 은혜와 정반대인 행위로서의 헌금, 연보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것에 대해 신물이 나서 교회에 나가지 않거나 헌금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교회를 옮겨 버립니다.

주님을 사랑해서 교회를 옮기거나 떠나는 것이 아님에 대해서 여러분은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제 우리 자신들에 대해 한번 생각해 봅시다.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은 은혜를 받았음이 어떻게 드러났습니까?
헌금이라는 것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이들은 엄청난 환난 가운데, 시련 가운데서도 넘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이 기쁨으로 연보를 했습니다. 물론 형제들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서 한 연보입니다.
엄청난 환난이 오게 되면 우리는 남을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만 보게 되고, 그 상황에 꽁꽁 묶여 버리는 것이 우리 인간들인데, 마케도냐 성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은혜를 받은 자들임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심한 환난과 시련 가운데서 형제들을 생각하며 헌금을 기쁨으로 했습니다.

이 뿐 아닙니다. 이들은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정도가 극한 가난입니다.

쉽게 말하면 겨우겨우 밥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가운데서 이들은 풍성한 연보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했던 것은 자신들의 행위를 내세우고자 한 것도 아니요 자랑하려고 한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하게 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은혜로 행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의 마음은 간절한 마음 한가지입니다.
이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이 은혜로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 하고 싶다고 간절히 원한 것입니다.

이런 겉모습을 보게 되면 처음 제가 비판했던 그런 헌금을 열심히 하는 자들이나 별반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은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행위가 아니라 말입니다.
이들은 은혜 받은 자신들 운운하지 않습니다.
간단명료하게 주님의 은혜라고 말해 버립니다.

5절을 봅시다.
“우리의 바라던 것 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바울일행이 바라든 바가 무엇입니까? 은혜를 받았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말해 놓고 그것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과연 은혜를 받는 자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냥 연보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일행이 바란 것은 연보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은혜였습니다.

이들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연보를 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자신을 주께 드렸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이들은 심한 환난과 시련 가운데 있었고, 극한 가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믿는 것은 주변의 환경도 아니요 돈도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오직 주님만 의지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주님께 의탁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주님만 믿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연보를 했다고 해서 자기 자랑을 내 놓을 것 같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면 연보를 했기 때문에 우리 믿음이 이렇게 좋다고 으시되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교회와 비교하면서 우리 믿음이 이렇게 좋음을 자랑하겠습니까?
만일 이렇게 되면 이들의 헌금은 은혜가 아니라 자신들의 행위요 공로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지신 주님의 은혜로 환난 가운데서, 시련가운데서 기쁨으로 살고, 극한 가난 가운데서 형제를 돌아 볼 마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연보라는 것, 헌금이라는 것은 은혜입니다. 그런데 제가 앞서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돈이란 이 땅에서는 생명과 같이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라는 자가 돈에 꼭 매여 살아간다는 은혜로 사는 자가 아니라 돈으로 살아가는 자이겠지요.

연보라는 것을 통해, 성도가 과연 이 땅에서 무엇을 믿고 살아가는 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은혜로 살아가는 자인지 아니면, 돈으로, 행위로 살아가는 자인지.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연보야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입니까?
그러나 성경은 기본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형제를 돌아보는 마음이 주님의 마음이라고 말입니다.
8:8절을 보게 되면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하기 위해서 연보에 대해 권면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은혜를 받았고 주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성도입니다. 라고 백날 말해도 누가 그것을 믿어 줄 것이냐는 말입니다.
나는 그래도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말할 때 예수님을 믿는 모습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이라는 것은 반드시 겉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일전에 제가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믿음이라는 것은 반드시 우리의 몸의 행동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이 말이 되었든, 행동이 되었든 말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믿음 있는 자이다, 사랑이 많은 자라고 이미 알려 졌습니다.
그런데 연보에 대해서는 인색하다라고 해 보세요.

에이. 우끼는 자들이네. 사랑이 많고, 믿음 있는 자라고 말해 놓고, 결국 자기 잇속만 챙기는 자들이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돈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주셔놓고, 우리에게 은혜로 사는 자인지, 믿음으로 사는 자인지 아닌 지를 분별해 내십니다.

우리 중 누구도 이것에 대해 간섭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아시고 당사자만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로 살아갑니까. 아니면 돈으로 살아갑니까?








남음이 없고 모자람이 없는 세계
고린도 후서8:6-15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역시 연보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행위를 통해 그 믿음을 드러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제가 지금까지 행위를 강조하는 자들의 잘못을 지적한 것에 나도 해당되지 않는가 라는 의문을 갖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지적한 것은 그들은 믿음은 없고, 행위로서 믿음을 보이려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기도도 하지 않고, 성경도 보지 않고, 전도도 하지 않고, 맨날 내 육신의 일에만 매여 사람들을 만나고, 돈을 벌 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합니까?

내가 정말 예수님을 믿는 자일까라고 생각하지요?
이러면서 그 다음 취하는 행동이 무엇입니까?
기도를 시작하거나 말씀 보는 것을 시작하거나 예배에 꼬박꼬박 참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동을 시작하게 되면, 이제 안심을 합니다.
이제 내가 믿음이 있구나라고 말입니다.

사실 믿음이란 이런 것, 즉 내 쪽에서 무엇인가를 해서 이루는 것, 얻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앎에도 불구하고, 자꾸 내 쪽에서 무엇인가를 해서 믿음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적한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딴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주되심의 피공로에 대해 생각하기 보다는 내가 무엇을 어떻게 그 피공로에 조금이라도, 미력하나마 보탬이 될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자이지요.
주되심을 무시해도 이만저만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공로를 결코 남에게 빼앗기는 일은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주님이 너무 옹졸하고 치사해 보입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바리새인들 아닙니까?
우리도 할 수 있는 일, 지킬 수 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다고 덤벼든 자들이 아닙니까?
이들에게 믿음이 없었습니까?

이들은 주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익히 아는 자들입니다.
출애굽의 경험, 유월절의 경험을 생생히 기억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철저한 믿음 있습니다.

이들은 이 믿음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믿음으로 살겠다는 것이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니 이들의 죄악이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이들은 공로를 주님께 돌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주시는 은혜를 도저히 그냥 받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피 흘리심, 즉 유월절 어린양의 피는 기념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지, 결코 우리가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에 마땅히 당해야 하는 자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유월절 어린양의 피공로가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의 피공로가 지나 갔는데 내가 어떻게 그런 악한 죄인인가?
이제는 믿고 행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주장합니다.

해아래 새것이 없다는 주님의 말씀이 얼마나 정확하신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어도 인간의 죄악성은 겉옷만 바꿔 입을 뿐, 그대로입니다.

야곱을 생각해 보면, 은혜 속에 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얼마나 설쳐 댑니까?
자신이 주의 말씀을 이루어 보려고 얼마나 약삭빠르게 행동합니까?

그러나 그의 힘의 근원, 행동의 근원이 상실 된 후에야 축복 속에 사는 것, 은혜 속에 사는 것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라고 하는 자들이 어떻게 합니까?
날마다 주님의 피공로의 은혜의 깊이를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예수님 믿고 괜찮은 존재인가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행위로 사는 자의 전형적이 모습입니다.

그러면 당신이 말하는 행동으로 믿음이 나타난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
말장난이 아니냐 라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겉으로 보게 되면 믿음이 없는 자의 행위나, 믿음이 있는 자의 행위를 통해서는 믿음이 참 믿음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힘듭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앞서서 제가 말씀드린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면 행위로 자신의 믿음을 유지하려고 하는 자들은 버럭 화를 냅니다.

나의 믿음이 믿음이 아니라 말입니까 라고 대들지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죄악을 구석구석 파헤치시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가만히 놓아 둘때는 굉장한 믿음을 가진 것 같았고, 어느 누구보다도 믿음이 좋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개입되시니 그들이 얼마나 강퍅한 자들인가가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만히 놓아두면 누구보다도 믿음이 좋아 보이지만, 십자가를 말하게 되면 왜 그리 싫어하는지.
제발 십자가만 이야기 하지 말로 우리의 인격도 좀 이야기 해 달라고 발광을 합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좀 건전하다, 괜찮다고 하는 사람들은 오늘 본문을 어떻게 해석할까요?

헌금은 미리 미리 준비하는 것입니다. 헌금이란 주님을 본받는 모습입니다. 연보란 평균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생각하시기에 이 말이 맞습니까 맞지 않습니까?

맞지요. 왜냐하면 성경대로 말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일전에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경대로 하다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유대인들이지요.

이들은 구약 성경을 외우는 자들입니다.
누구보다 말씀 말씀, 말씀대로 사는 삶을 강조한 자들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니 서신서를 해석할 때에도 주님께서 구약을 보신 눈으로 우리가 신약을 보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에서 주님되신 예수님이 보이지 않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우리의 삶의 원리, 방향이 보이는 것입니다. 물론 은혜와 행위를 조화롭게 생각하려고 발부둥 칩니다.

우리는 주님의 눈으로 오늘 본문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은혜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 주십니다.

바로 성도의 존재란 9절에서 어떤 존재인지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왜 십자가 지셨습니까?
너희를 위하여 입니다. 즉 성도를 위하여 입니다.
그러면 왜 성도를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셨습니까?

그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만유의 주님이심을 온 천하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15-18절을 읽어 봅시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에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 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예수님을 주님으로 내세우시기 위해 천지창조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제대로 보여주는 곳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피조물들도 다 이것을 보여주긴 보여줍니다 마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심이 십자가 지심이요, 십자가 지시고 부활 승천하시어 주가 되심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부요하신 자로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케 되신 목적입니다.
그러니 헌금이나 강요하라고 오늘 본문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주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주가 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까?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하라고 삼으셨습니다.

이런 자의 모습이 어떤 모습으로 지상에 나타납니까?
헌금이라는 것을 통해 나타납니다.

15절을 보시겠습니다.
“기록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가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출애굽기 16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광야생활의 시작에서 여호와께서 매추라기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희한 하게도 많이 거둔 자나 적게 거둔 자나 남음이 없고 부족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에서는 바로 이런 모습이 나타납니다.
십자가의 긍휼이 강같이 흘러넘치는 곳이 주님의 나라입니다.

자신의 수고와 상관없이 은혜로 사는 곳이 주님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불청객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은혜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으로 살지 않습니다.
이들은 내일 일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래서 미리 미리 준비하는 사는 자들입니다.
매일 식량대로 거두라는 말씀이야 들을 수 없지요.
만일 여호와께서 메추라기를 내리시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그래서 이들은 남음이 없는 양식을 보관해 두어 내일 먹으려고 했습니다.
결국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고, 모세는 노했습니다.
믿음이 없는 자의 모습이 이런 모습입니다.
우리가 볼 때에는 얼마나 훌륭한 모습입니까?
내일을 미리 미리 대비하는 모습.
-
그런데 이런 모습이 바로 우리들이 알다 시피 믿음이 없는 모습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연보라는 것은 믿음에 대한 것입니다.
무엇을 믿고 있는가? 은혜로 살아가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연보입니다.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라라지 아니하였느니라는 출애굽기의 말씀이 성도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됨으로 십자가의 은혜는 성도 가운데서 풍성히 증거되어집니다.








연보의 증거
고린도후서9:1-15
지금 고린도지역의 성도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그 형편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상태입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지역 성도들은 이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풍성합니다. 이런 사랑이 풍성하다는 사실에 대해 바울과 그 일행은 마케도냐지역의 성도들에게 막 자랑하고 다녔습니다. 그러자 마케도냐지역 성도들도 성도 섬기는 일에 더욱더 열심을 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지금 디도와 다른 두 형제를 고린도 교회에 보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랑을 엄청나게 했는데, 실제로 연보를 하지 않다는면 어떤 모양이 되겠습니까?
4절을 보게 되면 믿음에 대한 부끄러움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도 포함됩니다. 물론 고린도교회성도들에 대한 신뢰, 그들이 그렇게 사랑이 풍성하다는 사실을 자랑했던, 그 믿었던 것에 대한 부끄러움입니다.

얼마나 사람들로부터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겠습니까?
물론 마게도냐성도들이 연보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을 웃음거리로 여긴다면 이것도 문제가 있겠습니다 마는, 이런 일은 우리에게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까?

예를 들어 봅시다.
지금 우리와 함께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제가 여러분들을 믿음이 좋은 형제자매라고 소개 했다고 합시다.

아마 그분들은 저를 생각해서 여러분들이 참 주님을 믿는 자임을 인정할 것이고, 참으로 제대로된 신앙생활을 어렵게 하시겠구나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만일 여러분이 어떤 형제의 어려움을 들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아무도 그 형제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믿음 좋아하네. 자기 배만 채우고, 신앙생활을 자기 편한 위주로 하지 않는가라고 조롱하지 않겠습니까?
동일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진정한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형제들은 돌아볼 마음 없고, 자기 편한데로, 자신의 생명과 같은 돈은 결코 한 푼도 내 놓지 않는 인간들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럴 경우 제가 여러분들을 자랑한 것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에 대한 저의 믿음뿐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조차도 웃음거리가 될 공산이 아주 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바울의 상황이 지금 이런 상황입니다.
자랑을 했는데 자랑한 것이 현실로 나타나지 않을 경우 바로 이런 결과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래서 전에 약속한 그 약속을 이루게 하기 위해 지금 디도와 다른 두 형제를 보낸다는 것입니다.

5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여기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들이 신앙 생활하던 것과 좀 다른 말씀을 듣게 됩니다.

연보에 대해서 권면한다는 말씀 말입니다.
우리는 연보, 헌금이야기만 나오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킵니다.

연보, 헌금 이야기는 다 사기꾼들이 하는 말이다라고 단정을 해 버립니다.
하기야 대부분이 그런 식으로 헌금을 말했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을 우리들은 그런 식으로 매장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왜 권면하게 되었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이미 고린도교인들의 마음이 바울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성도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풍성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연보를 하겠다고 바울 앞에서 결심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순간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믿음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을 향해 그 믿음을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돈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그 믿음의 증거로서 약속한 그 약속을 이루라는 권면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헌금 권면은 무엇입니까?
돈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복음도 없으면서 교회를 더욱더 견고하고 거대하게 만들기 위해 수단으로서 헌금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물론 말로는 주님을 믿는 믿음을 보이라고 말은 하지만, 그 설교의 내용과 그 중심성에 있어서는 돈을 사랑하는, 세상 권세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니 설교시간에 예수님의 십자가는 양념이 되어 버리고, 인간의 의가 잔뜩잔뜩 증거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연보에 대한 권면이 돈에 대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대한 것임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창피를 당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이 얼마나 사람들로부터 우습게 여김을 당하게 될 것입니까?
여러분 제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고 해놓고, 술집에 가서 아가씨를 두고 술을 마신다고 해 보세요.
복음이 얼마나 우습게 되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주님이심이 증거되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지 않겠습니까?
제가 지금 윤리적으로 깨끗하게 살아라는 말씀입니까?
그런 것이 아니지요.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하라고 우리를 구속하셨는데, 이렇게 살면 어떻게 예수님을 주님으로 증거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이런 모습의 목사를 보시면 그를 과연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자임을 인정하겠습니까?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악함을 날마다 알아간다고 해 놓고, 그 믿음을 전혀 볼 수 없는 모습이라면 과연 십자가가 어떻게 증거되겠습니까?

세리와 창녀들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회개자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지금 고린도 교인들도 이런 모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자신을 부인하는 모습, 곧 연보하는 모습이지요.
연보를 한다고 하긴 했는데 그 약속을 어떻게 지킬까 염려 되지 않겠습니까?
마귀가 잠자고 있겠습니까?

자꾸 우리를 부추깁니다.
야, 돈이 없으면 안돼. 지금 네가 헌금 해 버리면 이 후에 무얼 먹고 살지. 네가 하고 싶은 것 못하지. 그렇지.

자꾸 내일일을 염려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만히 놀고 계시지 않지요.
바울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6절을 한번 봅시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연보를 미리 미리 준비하는 것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는 것은 우리의 소유와 관련된 말씀이 아닌가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돈을 많이 벌고 적게 버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을 연보에 적용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는 것이 어떻게 해석되어야합니까?
연보를 미리미리 준비하여 많이 하게 되면 그 연보가 많아진다는 말입니다.
적게 준비하면 적게 연보를 거둔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인간의 탐심이 어떤가를 고발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살아가는 자의 사고방식과, 그렇지 않은 자의 사고방식이 얼마나 다른 가를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연보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자들이 내어놓는 것입니다. 만일 억지로 내어 놓는 자가 있다면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자들이지요. 이런 자들은 죽음밖에 기다리지 않습니다. 연보란 흉내 낼 수 없는 하나님의 은사인데, 이들은 믿음으로 연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체면으로 연보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를 증거하기 위해 연보를 하는 것입니다.

연보란 오직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즉, 연보라는 것을 통해 주님의 의가 널리 증거됩니다.

이것이 제대로 된 연보입니다.

이제 10절을 봅시다.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너무나 놀라운 말씀입니다.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의 본래적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연보를 풍성하게 하시고, 그 연보를 통해 십자가의 의를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억지가 어디 있습니까?

농사꾼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신 것이 이것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존을 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을 보면서 탐욕을 부추기는 것으로 설교를 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제 결론을 봅시다.
13절입니다.
연보하는 것을 통해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이 드러납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이것은 형제들간의 사랑이 더욱더 풍성하게 되고, 하나님께 감사의 제목이 됩니다.

오늘날 연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 같이 보여지지만 실제로는 형제들간 위화감만 조성하고, 질투와 시기만 더욱더 부추기는, 경쟁만 부추기는 연보가 되어 버렸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연보를 통해 십자가가 풍성히, 널리 증거되어지고, 형제들간의 사랑이 더욱더 풍성해 지며, 주님께 더 많은 감사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자랑
고린도후서10:1-18
교회 안에 자랑을 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요?

사람이 어떤 경우에 자랑을 하게 됩니까?
자신이 가진 것을 남과 비교할 때 자랑이라는 것이 튀어 나옵니다.
또한 자신이 노력하여 얻은 것이 있을 경우 자랑할 것이 있겠지요.

어떤 사람은 돈 많은 것을 자랑합니다.
아니면 돈을 많이 버는 것을 자랑합니다.
이런 사람의 경우엔 돈 없는 사람을 무시하기 일쑤입니다.
자랑을 하는 사람은 항상 육신에 속하여서 육신의 싸움을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별론 놀라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성도의 출발이 어디입니까?
바울이 고린도 전서1장에서 분명히 말했습니다.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로 출발해서 십자가로 끝을 맺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십자가로 출발해서 자기 자랑으로 나아가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 자기 자랑이 나옵니까?
남과 비교해 보니 자랑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한번 봅시다.
오늘 본문에서 어떤 사람들이 바울을 비방합니다.

그 비방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떠나 있으면 너무나 담대하게 글로 편지를 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굴을 대면하면 너무나 겸손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에 어떻습니까?
이런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두 얼굴을 가진 사람이다라고 말입니다.

사람이 일관성이 있어야지, 얼굴을 안보면 담대하고, 얼굴을 보면 겸손한 모습을 보인다면 누가 이런 사람을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까?

고린도 교회에 이런 생각을 가진 자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바울을 심하게 비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생각하는 자들이야 말로 어떤 싸움을 하는 자들인가를 분명히 밝힙니다.
그것은 육체대로 싸우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들이 싸우는 싸움은 비록 육체에 거하여 살고 있지만 혈과 육에 속한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늘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기 쉽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육체대로 싸움을 하는 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지금 고린도 교인들 중에 이런 자들이 있습니다.
바울이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흔히 이런 판단을 많이 합니다.
육신대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육신대로 판단하는 것이 너무 쉽고, 간단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육체대로 싸움을 하는 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도한 육체대로 싸움을 하는 자들의 모습은 많은 이론, 견고한 이론을 갖고 있습니다.
너무나 논리적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긍할 만한 논리를 갖고 다가옵니다.

하기야 그럴 것이 인간들이 만들어낸 이론이야 그렇지 않겠습니까?
인간 이성에 가장 부합한 것들로 짜 집어 만들어 놓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이 학교에서는 아니면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인간들의 이론들을 한번 보시면, 모든 것이 수긍할 만한 논리가 아닙니까?

물론 이 이론들이 다 통일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이론들이 공통적으로 공격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이런 이론들은 자신들을 굉장히 높입니다. 즉 자랑할 것이 많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복음은 이런 것들을 완전히 부수어 버립니다.
자랑할 것이 없도록 만들이 버립니다.

결국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게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위력입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다양하게 이론을 꺼집어내고, 그것을 주장한다 할지라도 복음 앞에서는 모든 것인 산산이 부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부수어 집니까?
바로 성도들입니다.

성도라 할지라도 이런 고집과 세상의 이론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 복음을 통해 이런 것들은 박살나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께 복종하는 일만 남게 됩니다.

성도들이 가장 갖기 쉬운 문제가 무엇인고 하면, 바로 7절입니다.
자기만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십자가 복음이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삶, 즉 믿음으로 사는 삶이 기준이 되어 남을 판단하게 되니 자신만이 참 복음을 믿는 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하나의 현상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을 향해 강하게 질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강하게 질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망하게 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편지를 쓸 때 이미 주님의 영을 받은 자들만이 자신이 말에 복종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편지의 목적이 영생과 관련 있는 자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당연히 세우는,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영생과 관련 없는 자는 어떻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 글을 읽으면서 망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아무리 일관성이 없다 할지라도 그렇게 하는 사람은 한 사람입니다.
즉 주님의 영을 받은 ,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항상 십자가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랑을 하는 자들은 십자가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와 관련 없는 것을 보고 비교하며, 자랑하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15절을 보면서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복음이 위대해 져야 하는 데, 바울 일행이 위대해 지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나 이 말은 바울을 섬기고 높인다는 뜻이 아닙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인 것이 높이 알려지면 얼마나 널리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의 관심은 오직 하나, 복음이 전파되어지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주안에서 자랑하는 자의 제대로 된 모습이 아닙니까?

이제 18절을 보고 마치겠습니다.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아무리 좋은 이론을 갖고 있고, 올바른 행동을 한다고 할지라도 주님께서 인정치 않으시면 헛빵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자기를 칭찬합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옳다고 인정하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야 말로 어리석은 자의 전형적이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칭찬하시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바로 복음에 복종하는 자, 십자가만 증거하는 자입니다.








환상과 계시
고린도후서12:1-10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환상을 좋아하고, 하늘로부터 직접 내려오는 직통계시를 좋아합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계시야 엉뚱한 것입니다.

드라마 장길산이라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 여환스님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미륵사상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미륵의 세계는 결국 인간이 임금을 갈아 치우고 완전한 새 세상을 연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천국을 이룬다는 것이지요. 그 세계는 용화세계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미륵사상은 기독교의 메시야 사상과 거의 비슷합니다.
미륵님이 오셔서 세상을 바꾼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미륵은 우리들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드라마에서는 실패로 끝나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곳에서 사람들을 끌어 모을 수 있었던 것은 미륵님의 계시입니다.
징조이지요.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좋아합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환상을 보아야 하고 계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눈을 부릅뜨고 본문을 탐색하려고 합니다.
도대체 무슨 신비한 내용이 들어 있을까?
그래서 본문을 읽어 보지만 무슨 우리가 기대하는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낙원으로 이끌려 갔다는 말 외에는 그 낙원이 어떻더라 어떻더라라는 내용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분명 환상과 계시를 말한다고 해 놓고 하는 말이 알맹이나 다 빼놓고, 낙원 갔다 왔다는 내용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본문을 통해 무엇인가 호기심이 발동한 사람들의 마음을 채워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 본문을 통해 추론해 들어갑니다. 낙원이 어떨까?
그래서 계시록을 뒤적이면서 참으로 낙원다운 천국을 꾸며 봅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꾸며본 낙원은 결국 미륵님이 오시는 나라와 전혀 다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인간들이 주인되는 참 세상 자유와 평등의 나라, 자신의 탐욕을 마음껏 이룰 수 있는 나라, 자신들의 평소 바램의 욕망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 놓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 땅에서 미리 이런 나라를 꾸며 보려 합니다.

우리들이 그들이 꾸민 나라를 이렇게 들여다보면, 어떤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들어 있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탐욕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곳에는 인간들의 탐심만 가득하게 담겨 있습니다.
자신들이 어떻게 하면 높은 자리 차지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 자리를 계속 고수하고 있을까?

아니면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어떻게 하면 존경을 받을까? 인정을 받을까?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어떤 식으로든 내 편으로 끌어 당겨볼까하는 것들이 가득 가득 들어 있습니다.

열왕기상 18장을 보게 되면 엘리야와 대결하면 바알의 선지자들이 나옵니다.
이들이 어떤 행동을 합니까?
25-28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한 송아지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놓지 말라 저희가 그 받은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어야 할 것인지..
하매 이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딸 피가 흐리기 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더라”

놀랍지 않습니다. 신을 섬겨도 얼마나 제대로 섬기고 있습니까?
자신의 몸을 전혀 아끼지 않습니다.
모든 정성과 희생을 다합니다.
무엇을 위해서 말입니까?
자신들의 기도의 응답을 위해서입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자신의 신들의 능력입니다.
이들은 왜 이것을 필요로 합니까?

자신들의 권력을 계속유지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그러면 엘리야는 어떻습니까?
심판하기 위해 하나님께 간구를 합니다.

여호와께서 그렇게 사용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인간들의 탐욕을 위해 환상도 만들어 내고, 계시도 만들어 냅니다.
이러한 환상과 계시는 인간들이 너무너무 할만하고 좋아할 만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어떤 곳에서는 새벽기도라는 환상을 만들어 내어, 새벽기도를 통해 자신들의 탐욕을 이룬다고 떠들어 댑니다.
어떤 곳에서는 제자훈련이라는 것을 가지고 나오고, 어떤 곳에서는 공동체를 가지고 나옵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십일조를 가지고 나옵니다.
십일조를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축복을 가득 가득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들이 주장하는 것 가운데 성경에 없는 것들을 거의 없습니다.
성경에 있는 것을 인용해서 환상과 계시라고 사람들을 속입니다.

그런데 이런 환상과 계시의 특징은 모두가 다 인간의 탐욕을 자극하여, 인간의 욕망을 마음껏 발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고상하게 말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환상과 계시를 말한다고 해 놓고 환상과 계시에 대한 우리의 기대에는 전혀 미치지 못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셋째 하늘에 간 것, 즉 낙원으로 들어간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쯤 되면 이제 그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셋째 하늘이 어떻더라. 즉 천국이 어떻더라, 아니면 말할 수 없는 말이 어떠어떠하더라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갑자기 말 꼬리를 돌립니다.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라고 말입니다.

이 말을 보게되면 바울을 향해 대적하는 자들이 무엇을 자랑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틀림없이 천국이 어떠니 저떠니, 하나님의 환상이 어떠니 계시가 어떠니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런 것들을 간단히 언급하고는 곧바로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거리로 내세웁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생각에도 바울에게 이런 요구를 하고 싶을 것입니다.
좀더 이야기 해 주세요. 낙원이 어떠했습니까?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는데 그 내용을 좀 말해 주세요 라고 말입니다.

인간의 호기심과 탐욕은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그 낙원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말이 무엇인지도 알수 없지만,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를 오늘 본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약한 것들을 자랑하는 자들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들의 탐욕을 환상과 계시로 채우는 자들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야 말로 천국의 백성이라는 사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러 있는 자가 곧 하나님의 백성이요 천국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바울도 여전히 육신에 매여 육신의 연약함이 없어으면 하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죄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꿈에도 생각지 못합니다.
주님의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진다는 사실 말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언제 발휘될 수 있습니까?
죄인에게서 발휘될 수 있지 의인에게 발휘될 수 있겠습니까?
인간에게 능력도 있고 힘도 있고, 부족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십자가의 능력이 나오겠습니까?
그런데 죄인들은 자꾸자꾸 힘을, 능력을 원합니다.
그런 것들을 가지려고 합니다.

교인들이 왜 기도를 합니까?
자꾸 채워달라고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바울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응답은 전혀 뜻밖입니다.

주님의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진다는 것입니다.

누가 이 말씀에 수긍하겠습니까?

아마 교회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잘 알고 있는 본문이 오늘 본문이 아닙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합니까?
자기 위로를 하기 위해 본문을 해석합니다.

즉 이런 본문을 보면서도 자신의 탐욕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10절 말씀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

여러분, 십자가의 능력을 나타나게 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무엇을 구하려고 합니까?
힘, 능력 등, 환상과 계시를 구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가 약한 가운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증거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약하다는 말은 돈이 없어야 된다. 아니면 병이 들어야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은 심령이 가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의 구함은 오직 십자가의 긍휼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자는 십자가의 능력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힘이 되는 돈이요, 권세가 될 수 있는 환상과 계시입니다.

여러분, 환상과 계시를 구하지 마시고,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 온 몸을 통해 증거되도록 기도하는 주님의 참된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광명의 천사
고린도후서11:1-15
하박국 3:16-19절을 봅시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석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비록 무화가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이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우리들이 이런 말씀을 보면 너무나 황당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주의 백성을 구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주의 백성조차도 큰 환난을 겪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런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괜히 기분이 나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하시려면 곱게 구하시지 왜 큰 환난 속으로 집어 넣어십니까?

하박국2:4절을 보면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우리의 눈에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바벨론이 쳐들어오고, 나라가 망하고, 기근이 들고, 먹을 것이 없습니다.
이 일은 믿음으로 사는 자도, 그렇지 않는다고 다 당하는 일입니다.

이럴 경우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이것은 정말 미친짓이다라고 생각지 않겠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미친 짓입니다.

이렇게 세상은 옛적부터 그래 왔듯이 잘도 돌아가고 있는데, 무슨 주님의 심판이 어떻고, 다시 오신다는 말씀이 무슨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리냐고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을 믿고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다가 주님의 오심에 함께 할 수 있게 해 주신다면야 모를까 믿음이라는 것을 주셔놓고 하시는 말씀이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한다. 고난을 당한다. 죽음에 넘기운다. 왜냐하면 십자가 복음 때문이다. 그러나 의인은 오직 이 십자가 복음 하나만을 믿고 살아간다고 하시니 이거야 말로 미치고 환장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예수 믿고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아 장수하고, 자식이 잘되고 사업이 잘되고, 어려움이 없고, 고통이 없고, 고난이 없고, 믿지 않는 자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이런 인생을 산다고 하면이야 모를까 이거야 있는 것 까지 빼앗아 가는 만유를 다스리시는 주님이라니 이런 분을 믿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러니 여러분 믿음이 없는 자, 즉 십자가 지신 주님의 영을 받지 않는 자야 말로 참으로 이 세상에서 정신이 온전한 자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제대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너무나 정상적이지요.

이런 사람들을 우리들은 교회라는 곳에서 많이 볼 수 있지요.
믿어 열심히 기도하고, 눈물 흘리고, 전도하고 헌금 많이 하여 이 땅에서 복을 누리고 죽어서는 천국가려고 하는 자들 말입니다.

물론 이런 마음을 가진 자들은 교회에 나온 순진한 자들이 그렇지요.
그러나 교회전문가들이 되어버리면 천국은 없습니다.
주님이 다스리는 곳은 없습니다.
수십 년을 믿어 보았자 말짱 돈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돈이 무엇이 그리 중요하냐? 건강이 최고지.
말이야 그렇지요. 돈이 많아도 아프면 별수 없지요.
그런지 세상은 어떻습니까?
이런 말이 통합니까?
아닙니다.

돈이 많아야 병원에 가고, 값비싼 약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건강이 최고야 하는 것은 가난한 자들의 자기 위로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있는데, 매일의 생활이 밥 먹고 살기도 힘들다고 했을 때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변에서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게을러서 그렇게 가난하지. 아니면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않아서 그렇게 가난하게, 갈 곳도 없이 목회생할을 하지.
세상을 그렇게 살아서는 안되지. 등등의 말을 듣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복음이라는 것, 십자가의 복음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매력적인 것이 아니라 참으로 죄인들을 아주 기분 나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처음 제대로 된 복음을 들었다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복음을 왜곡되게, 자기 편한 위주로 해석해 버리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그런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4절을 보세요.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이들이 복음을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시간이 잠시 흘렀는데, 이들의 마음이 미혹을 받고 있습니다.

그 미혹이란 다름이 아니라 너무나 인간적인 생각으로서의 미혹입니다.

창세기에 뱀이 이와를 미혹할 때 한 말이 우리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 아닙니까?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 말입니다.
우리도 할 수 만 있다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목회를 해도, 직장을 다녀도, 사회생활을 하더라도 하나님과 같이 된다면야 이보다 더 좋을 순 없겠지요.

그런데 희한한 것은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한자에 대해서도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사도이지요.
주님을 만났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정도의 사람이라면 왜 고생고생하면서 복음을 전하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 도와 주시든지 아니면, 성도들의 섬김을 당당하게 확실히 받든지 하면 될 터인데 말입니다.

이 말이 이해가 됩니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춘향전이 있는데, 이 도령이 거지행세를 하고 나타났을 때 누가 이 도령이 암행어사라고 인정하겠습니까?
장원급제를 했으면 그 모습을 보여 주어야 사람들에 믿어 줄 텐데, 그 꼴이 거지 꼴이면 누가 그를 암행어사라고 하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니 바울의 모습이 사람들 눈에는 너무나 이상한 자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예 이런 모습, 당당하게 헌금을 요구하고, 당당하게 성도들에게 명을 내리면 아예 사도다운 모습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주님의 백성들은 잘 살아야 된다고 드러내 놓고 말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해도 청산유수같이 해야 합니다.

남에서 해를 끼칠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 주님의 은혜로 사는 자들이니 말입니다.

위풍당당한 성도요, 위풍당당한 목사가 되어버립니다.

이런 자들을 향해 오늘 본문에서는 거짓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모습은 곧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사단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인간들이 이런 모습을 좋아할까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본성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할 수 없으면 자신이 밀어주는 자를 통해서 대리만족을 해 보겠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있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게 말입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그러니 나타난 현상을 두고 믿음이 어떻고 저떻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여전히 이런 모습이 툭툭 튀어 나옵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통장에 돈이 일원도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염려하지요.
그러나 염려하면서 사는 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회개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날마다 의지할 분은 십자가 지신 주님되신 예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러나 앞서 언급한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이들은 이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힘과 용기와 돈과 지혜를 주시면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들도 기도를 합니다.
도와만 주세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라고 기도를 하지요.
이들은 주님의 긍휼을 필요 없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참으로 위풍당당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거지처럼 살아갑니다.
구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들이지요.









약한 것을 자랑함
고린도후서11:16-33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장 하고 싶어 하는 것 중 하나가 자랑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보통 무엇을 자랑합니까?

가진 것입니다.
이것은 물질이 되었든지, 아니면 정신적인 것이 되었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가보면 항상 자랑이라는 것이 툭툭 튀어나옵니다.

언제 자신의 차례가 될지를 기다려서 자랑합니다.

그러면 그 자랑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가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많은 것을 자랑합니다.
아니면 권세가 있는 것을 자랑합니다.
아니면 자신이 얼마나 선한 사람인가를 내세우면서 자랑합니다.

누가복음 18장을 보면 하나님의 율법을 어릴 때부터 잘 지킨 관원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 앞에 너무나 당당하게 나타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렇게 질문하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이 사람이 영생을 얻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은 자신이 무엇을 행해야 얻을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이와 동시에 이 사람은 무엇을 행하는 것 같으면 자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 얼마든지 다 지켜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당신이 나에게 무엇을 말하든지 나는 영생 얻을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에게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율법을 지키라고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내가 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조건이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닙니다.
첫째 율법을 지키고, 둘째는 자신이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셋째는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웠겠습니까?
어쩌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셨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당당하게,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며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생각과는 너무나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랑이라는 것이 예수님 앞에서는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는 그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예수님을 따르면 자랑할 것이 있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은 없습니다.

만일 이런 인간이 이 땅에 있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실 이유가 없습니다.

이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영생이라는 것이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시면서 오직 하나님의 능력인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게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자랑이라는 것으로 돌아가 생각해 봅시다.

이렇듯 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도 자신이 자랑할 거리를 찾아내려고 애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와 똑같은 자들이 등장합니다.
자신의 혈통을 자랑합니다.
자신들이 선민임을 자랑합니다.
그러면서 저들은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자랑을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모습은 너무나 고상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니 자랑할 만 하겠지요. 그리고 그래야만 사람들에게 먹혀 들어갈 것이 아닙니까?

이들의 자랑이 그러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구속을 받아 놓고 하는 말이 자신들의 현 모습을 자라났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이해가 됩니까?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길을 가는데 거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지가 너무 너무 불쌍해서 데려다가 먹을 것을 주고 새 옷도 주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거지가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나 얼마나 잘난 사람인가?
이게 제 이야기가 아니라 에스겔 16장을 보면 나옵니다.
함께 봅시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여 예루살렘으로 그 자증한 일을 알게 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미는 헷사람이라 너의 난 것을 말하건데 네가 날 때에 네 배꼽 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케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너를 돌아보아 이 중에 한 가지라도 네게 행하여 너를 긍휼히 여긴 자가 없었으므로 네가 나던 날에 네 몸이 꺼린 바 되어 네가 들에 버리웠느니라 내가 네 곁으로 지나 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가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하고 내가 너로 들의 풀같이 많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고 심히 아름다우며 유방이 뚜렷하고 네 머리칼이 자랐으니 네가 오히려 벌거벗은 적신이이더라”

들에 버린 자를 살려 주고, 적신인 자에게 고운 옷과 패물을 주었습니다.
14절을 봅시다.
“네 화려함을 인하여 네 명상이 이방인 중에 퍼졌음은 내가 네게 입힌 영화로 네 화려함이 온전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15절을 보세요.
“그러나 네가 네 화려함을 믿고 네 명성을 인하여 행음하되 무릇 지나가는 자면 더불어 음란을 많이 행하므로 네 몸이 그들의 것이 되도다.

하나님의 은혜를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본래 어떤 자였던 지를 생각지도 않습니다.

지금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자들의 모습이 똑 같습니다.
자랑할 것이 없어서 자신들의 혈통과 조상과 과거 역사를 자랑합니까?

오늘날도 이런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교회라고 이름을 붙인 곳에서 일어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설립 몇 주년이니, 목사 임직 몇 십 주년 기념이니 등등 자신들의 현 모습을 자랑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곳에서는 십자가는 무시당하고 멸시당합니다.

만일 그런 교회가 만일 성도들의 숫자가 두 명 밖에 없다면 이런 일을 하겠습니까?
목사가 박사학위 받았다고 축하예배니 하고, 참으로 어찌 그리 죄인들은 시대가 바뀌어도 똑 같은 모습을 하는 지 말입니다.

이런 모습은 죄인들의 본능적이 모습니다.
죄인들은 내세울 것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것을 들고 자신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그 긍휼만을 자랑합니다.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고린도 후서 11장에서 하는 자랑은 무엇이라 말입니까?
여러분 자신의 연약한 것을 자랑하는 것이 이해가 됩니까?

지금이야 성도들은 이런 생각을 같습니다.
바울처럼 고생고생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자야 말로 참으로 칭찬받을 만하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이런 것이 깔려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상해 주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시지요.

사실 고난은 반기지 않습니다.
거부합니다.
십자가의 길을 내가 왜 굳이 걸어가야 하는 가입니다.

이런 것은 사실 이 땅에서 자랑거리로 내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 세상에서 무시당하고 멸시 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지금 하는 자랑은 세상의 것을, 땅의 것을 갖고 자랑하는 자들을 공격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의 죄악을 들추어내는 것이지요.

그러니 바울은 지금 저들을 향해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주님과 함께 하고 있음을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으로 인해 자신이 고상해 진 것도 아니요,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것도 아닙니다.
재물이 많아진 것도 아닙니다. 건강해 진 것도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합니다.

여러분 성도는 자랑할 것이 있습니다.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 입니다.
왜 성도가 십자가만 자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주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셨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날마다 매일 매 순간 확인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자가 성도입니다.

이런 사실을 잊어버리고 십자가의 긍휼을 무시하며, 땅의 것을 가지고 자랑하려고 덤벼더는 자는 다 마귀의 종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사도의 표된 것
고린도후서12:11-21
바울이 얼마나 답답했으면 자신이 어리석은 자, 즉 자신이 어리석다고 여기는 자들의 말과 같은 말을 하게 되었을까요. 그러면서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향해 아주 비꼬는 듯한 말을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왜 바울이 칭찬을 받아야 마땅합니까?

지금 고린도 교인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환상과 계시에 관한 것입니다.

이런 것에 대해 바울이 말을 했으니 당연히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칭찬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2천년 전에나 지금이나 죄인들의 성향은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얼마나 가까운 시대에 살고 있었는가?
아니면 우리가 그렇게 존경하는 사도바울을 직접 눈으로 보고, 말씀을 들었다 하더라고 이런 것들은 다 부질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적과 표적을 보여 주셨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친히 증거하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오직 택한 자만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다 들었고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과 동일한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1-4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에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가시다”

오늘 본문 12:11-12절을 다시 한번 읽어 봅시다.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 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여러분 이 말씀을 보게 되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사도의 표된 것이 표적과 기사와 능력이라면 고린도 교인들이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불신합니까?

그 이유는 바로 참음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헌금을 자신이 받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입니다.
15절을 보세요.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위하여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폐를 끼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재물을 구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복음을 전했으니 너희는 헌금을 내 놓아라는 식으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부모된 심정으로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부모가 아이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지, 아이가 부모를 위해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을 위해 재물을 허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시비거리가 된 것입니다.
어찌 그리 예수님 당시와 별 차이가 없을까요?

물론 차이는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교회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상하다고요
그러나 이것이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8장 이후를 보게 되면 교회 안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상세히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용서를 모르는 자가 교회 안에 있을 수 있고, 용서받지 못할 강퍅한 마음을 가진 자가 있을 수 있고,
19장에서는 먼저된 자로서 나중될 자가 있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20장에서는 은혜를 전혀 모르는 용서함을 받은 자가 나옵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은혜를 알지 못하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22장에서는 잔치에 청함은 받았는데 예복이 없는 자는 지옥에 던지우게 된다고 하십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앞으로 교회 안에서 핍박하는 자와 핍박 받는 자가 등장한다는 사실을 미리 다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니 바울이 비록 복음을 전했다 하더라도 바울을 향해 대적하는 자가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가룟유다처럼 말입니다.

제가 너무 심한 말을 하는 것입니까?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이 그렇습니다.

바울이 자신이 재물을 허비하면서 까지 복음을 전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여기까지 인정하는 자들은 있습니까?

그런데 이제 다른 것을 갖고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16절을 봅시다.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 지라도 공교한 자가 되어 궤계로 너희를 취하였다 하니”
이것이 말이 됩니까 되지 않습니까?

말이 됩니다.
그 이유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고린도 후서를 계속 보고 있으면서 어떤 마음이 듭니까?
바울의 말을 반드시 들어야 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습니까?
다른 말로 하면 바울의 말에 복종해야 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면 결국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하는 일이란 자신의 종을 만드는 일 밖에 없지 않습니까?
결국 자기 종을 만들려고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렇게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일전에 말씀드렸듯이 바울의 관심은 이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아느냐고요.
바울의 삶을 보세요. 그리고 그가 전하는 내용, 말하는 내용을 보세요.
어디에 관심이 있습니까?

십자가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중심성을 저들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과 똑같은 자들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자신의 탐욕을 위해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전하니 다른 자들도 다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 드리다 보니 오늘날도 이런 일들이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을 비판하는 저같은 비판을 하게 되면 결국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고 하면 절대 진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절대 진리는 없고 다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니까 대충 서로를 인정하고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자신이나 자신에 보낸 사람들이 성도들의 이익을 취한 일이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바울이 말하니 , 또 어떤 인간들이 등장할까요?

보아라. 바울은 헌금도 받지 않았고, 그와 함께 한 자들도 그렇지 않느냐?
당신들도 바울을 본받아라. 이렇게 주장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사례를 받고 복음 전하는 것을 비판하는 자들이 있는데, 참으로 할 말이 없습니다.

고린도후서11:9절을 보게 되면 바울이 마케도냐로부터 온 형제들로부터 재정적인 도움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은혜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무엇이든지 시비를 걸어 십자가의 복음을 헛되게 만들어 버리려고 하고,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처음에는 환상과 계시를 갖고 시비를 걸더니 이제는 별 것을 가지고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이들 눈에는 십자가의 복음이 너무너무 싫습니다.

예수님께 시비를 거는 자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했을 때 이들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면 믿겠다는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부정하고 들어간 것입니다.

지금 바울의 대적자들도 이와 흡사합니다.

그런데 19절에서 21절을 보면 제가 지금까지 말한 것과 다르지 않느냐라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대적자들은 완전하게 대적자의 모습으로 드러났지만 이들을 확실하게 그렇지 않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19절 끝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이렇게 말하면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도 바울의 사랑의 대상이요 진정한 성도로 여기는 자들이 아닌가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지금까지 바울이 한 말, 아니 오늘 본문만 가지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태복음 16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요나의 표적을 받아 들인 자들이 있었다면 영생이 아니겠습니까?

이 본문을 보면서 이런 말을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무 매정하시다. 좀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울같이 오늘 본문 19절에서 하는 말과 같이 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십자가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니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은 철저히 버리려고 오신 것입니다.

이 뜻을 준행하는 자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러니 바울은 좀더 온화하고, 예수님은 너무 심하시더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사고방식입니다. 마귀의 사고방식이지요.

그러니 오늘 본문을 이해할 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비추어서 말씀을 보아야 제대로 본문이 보이는 것입니다.
만일 인간 구원 위주로 오늘 본문을 보신다면, 마치 바울이 인간을 구원하지 못해 안달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물론 저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이 충만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인간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능력은 좋아합니다. 표적도 좋아합니다. 그러나 능력과 표적을 좋아하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이 살아 있음을 증거해 보려고 그런 것들을 바랍니다.

그러나 자신이 죽은 자임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산자라는 사실은 그렇게도 싫어한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을 통해 보았습니다.

이 땅에서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자들은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그러나 육신의 탐욕에 맞추어 살아가는 자가 있다면 그런 자들을 사람들은 아주 좋아합니다.

여러분들은 십자가가 좋습니까? 싫습니까?










약한 증인
고린도후서13:1-13
사람들은 교회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제가 요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종종 만나게 되는데, 그들의 교회에 대한 생각은 굉장히 적대적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교회 다니는 자신의 친구들이나, 아니면 목사가 된 자신들의 친구를 보면 예수님을 믿을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럴까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눈에 비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행위를 보면, 개판이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는 짓을 그 사람들이 그대로 다 한다는 것입니다.
술도 잘 마시고, 심지어 룸살롱 까지 간다는 것입니다.
여자를 왜 그렇게 밝히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요.

이뿐만 아닙니다.
외부에서 보는 교회는 탐욕덩어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이 너무 충격적입니까?

물론 제가 지금 몇 사람의 말을 들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마는 교회 안에 있는 우리가 듣기에 너무나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한 사람 자신도 일전에 교회에 나갔다는 것입니다.
정말 순전한 마음으로 나갔는데, 헌금의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 이름을 일일이 거론해 가면서 헌금확인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제가 해 드리겠습니다.
이 사람은 충실한 유교집안에서 태어 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그 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교회에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는 순전한 마음으로 새벽기도도 열심히 나가게 되었고, 예배도 열심히 참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중 연말에 자신을 갑자기 교사로 임명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사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알면 알수록 이것이 믿음의 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거의 교회는 가지 않고, 혼자 신앙생활을 한다고 합니다. 물론 가끔 교회에 나간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고린도 후서를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듭니까?
오늘날 교회와 비교해 볼 때 어떻습니까?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차이가 별로 없습니다. 아니 똑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은 고린도 교회가 그래도 더 낫다라고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오늘날 교회가 더 낫지 않느냐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오늘날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아니면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바울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가 나와 있습니다.
13장 1절을 봅시다.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갈 터이니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왜 바울이 이런 말을 합니까?
이 말은 마태복음18장에 나오는 예수님을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마태복음18장을 봅시다.15-20절을 보겠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형제가 죄를 범함에 대해 어떻게 처리해야 되는가를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분명 그 대상은 형제입니다.
형제라고 여겨지는 자요 함께 형제자매로 불리든 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은혜를 안다고 하는 자가 죄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바울은 두 번이나 참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 가면 용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말이 너무 심하게 들립니까?
바울이 무엇인데 다시 가면 용서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울의 권위가 아닙니다.

3절을 보세요.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저가 너희를 향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주님의 권위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바울이 약한 모습을 보이니까 우습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이들은 바울을 향해, 이렇게 말했던 모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보이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말한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바울 꼴을 보아하니 별것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의 모습 같으면 우리가 수긍할 만한데, 당신은 항상 약한 모습, 사람들이 보기에 멸시당할 만한 모양으로 살아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서 말씀하시는 말씀을 보여 보라는 것이지요.
보여 보았자 별 것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바울은 의외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저가 너희를 향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희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고린도 교인들은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능력으로 살아나시어 주가 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약한 자 이지만 너희를 향해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주님의 능력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참 성도의 모습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약한 자의 모습으로 이 땅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참으로 볼품없이 살아갑니다.

아무런 힘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약한 자로써 주님의 능력을 행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이 능력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18장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신들의 삶 속에서 그 말씀이 그대로 성취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약한 바울을 통해 두 쪽으로 갈라집니다.
한 쪽은 용서받은 자로, 한 쪽은 용서받지 못한 자로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5절을 말합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주를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이 말씀은 마태복음18장의 말씀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죄에 대해 지적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할 마음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저들 마음에 계시지 않는 것이지요. 이것은 곧 버리운 자의 전형적이 모습니다.

마음이 강퍅한 것입니다.
마치 출애굽기에 나오는 바로 왕과 같은 모습입니다.
바로왕은 여호와의 능력을 눈으로 봄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강퍅하여 여호와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 놓고, 그 십자가를 경험해 놓고, 그것을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참으로 날마다 주님의 긍휼을 구하며 그 은혜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버리운 자가 아닌 증거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계신 증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계신 증거가 무엇입니까?
방금 말씀드린 바로 그것입니다.

마음을 낮추는 자, 겸손한 자, 강퍅하지 않는 자의 모습이지요.

6절을 봅시다.
“우리가 버리운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현재 바울 일행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약한 자의 모습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께로부터 버림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참 성도라면 이런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약한 자로서 이 땅을 살아갑니다.


그러면 바울이 왜 이렇게 극단적인 표현을 합니까?
고린도 교인들이 미워서 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7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오직 우리가 버리운 자 같을 지라도 너희로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그러면서 8절을 말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이 말씀은 다시 마태복음18장으로 가서 보면 알 수 있습니다.
21-35절을 보게 되면 용서 받은 자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말합니다.
지금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을 위해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대적하면 이해가 될 법도 한데 예수님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화가 나지요.

그래서 용서할 마음이 손톱만큼도 없습니다.
저주만 퍼붓고 싶지요.
이게 우리의 심정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이런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용서의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 자입니다.

이렇게 말하게 되면 우리는 또한 이런 의문을 갖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한발 후퇴한 것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지금 심판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심판주이심을 증거하는 증인입니다.
증인으로서 그 긍휼을 마음껏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자신의 입장을 바꾼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이제 다시 가게 되면 완전히 갈라 놓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갈라놓음이 철저하게 용서받은 자로써 그 긍휼을 보여주는 모습으로 갈라놓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10절에 나오는 “내게 주신 그 권세를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의 의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제가 처음에 몇 사람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오늘날 교회의 문제와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차이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런 교회를 향해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합니까?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약한 자의 모습을 보이며 주님의 긍휼을 받은 자답게 그 긍휼을 마음껏 보여 주면서 편지를 끝냅니다.
이것은 바울이 주님의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증인입니다.

주님의 증인은 긍휼을 마음껏 보여주는 자입니다. 약한 자로써 말입니다. 그 죄악을 지적하면서 말입니다.








십자가 은혜 안에 사는 삶
고린도후서13:11-13
바울은 편지를 끝내면서 십자가 은혜 안에 있는 삶이 어떤 삶인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삶이란 도대체 어떤 삶일까요?

첫째로는 기뻐하는 삶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언제 기쁩니까?
사업하든 일이 잘 되었을 때 기뻐합니까?

아니면 자녀가 태어 났을 때 입니까? 자녀가 학교에서 공부를 잘할 때입니까?
아니면 남편이, 아내가 잘 대해 줄때 입니까?

물론 이런 일들로 우리들은 기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지금 말하는 기쁨은 이런 유의 기쁨이 아닙니다.

땅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기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고린도 후서를 보았듯이,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성도들을 책망하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단호하게 죄에 대해 지적하고 있습니다. 물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충분히 드러났습니다.

이런 글 끝에 하는 말이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겠습니다.

여러분의 죄를 일일이 지적하고, 부족한 부분에 대해 권면 한 후, 여러분 기뻐하세요 하면 기뻐하겠습니까?
아마 이 땅을 살아가는 어떤 인간도 기분 나빠 할 것입니다.

이것은 병 주고 약주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입니다.

지금 바울은 성도들의 삶은 기쁨의 삶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기쁨은 인간이 노력해서 주어지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인간의 행위로 인해 주어지는 기쁨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앞서서 이들의 죄와 문제점들을 일일이 지적한 것입니다.
사실 기쁨이란 십자가 지신 주님이 주시는 기쁨입니다.
기쁨의 이유가 자기 죄를 아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성도가 비록 약하고, 죄악 투성이 일지라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한가지 입니다.
바로 십자가 지신 주님의 은혜를 알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자신의 죄를 말씀을 통해 일일이 지적당하면서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놀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합니다.
여러분들, 매주 모이면서 이런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죄인들은 이런 기쁨을 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날마다 얼마나 괜찮은 인간이 되어 가느냐? 아니면 앞서 언급했듯이 이 땅의 소유가 얼마나 늘어나는가? 아니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는가로 기쁨을 누립니다.

지옥가는 자의 전형적인 모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오직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알므로 참 기쁨을 누립니다. 이것은 주눅들어 사는 삶이 아니라 자유로운 삶입니다.
여러분들도 자유로운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주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온전케 되며 라고 합니다.
여러분 방금 제가 주눅들어 사는 삶이 성도의 삶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말하는 온전케 되며 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기가 팍 죽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이 말 앞에 우리는 너무나 부족하고, 아니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개판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준은 누구의 기준입니까?
십자가 지신 주님의 기준이 아닙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첫째 아담을 닮은 죄인들의 기준입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 보세요. 온전케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듭니까?
아무 생각이 안 납니까?

이거 문제 있습니다.
생각 없이 사는 것입니까?
흐르는 강물위에 떠서 흘러 내려가는 낙엽처럼 살아갑니까?

조금은 생각을 해 보면, 죄를 짓지 않는 쪽으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죄를 조금이라도 덜 짓는 쪽, 그래서 날마다 덜 죄인이 되어 가는 쪽으로, 점점 더 온전해 지는 쪽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주의 교리를 보면 성화라는 것이 나오는데,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죄인은 이 땅에서는 온전히 성화를 다이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죽을 때 이룬다는 것입니다. 말이 안 되지요, 인생의 행위가 그쳐지는 것을 보고 완전히 성화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살아 있을 때에는 인간의 행위를 갖고 성화 운운해 놓고, 죽으면 인간의 행위가 없는 것을 완전히 성화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6: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11절을 보세요.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길지어다”
이미 성도는 죽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는데, 무슨 인간의 행위를 운운할 수 있겠습니다.
사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인데.
성도는 날마다 자신이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기면서 살아가는 자가 참 성도입니다.

이 믿음이 없이 자꾸 온전케 되려고 발부둥 친다면 참으로 이런 자는 믿음 없는 자요 성도가 아님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온전케 된다는 말씀의 의미가 어떤 의미인지 우리는 제대로 파악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온전케 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교인들은 자꾸 행위로 믿음을 대체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십자가의 은혜를 자꾸 밖으로 밀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후 세 번째 위로를 받으며라고 말씀합니다.
당연히 위로가 되겠지요.
자신들의 행위를 본다면 도무지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심이 참된 위로가 됩니다.
자기 행위를 바라보는 자가 있다면 결코 바울의 편지가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짐이되고, 부담이 됩니다.

아하, 고린도교회 성도같이 살아서 안 되겠구나.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 그래 저들이 한 나쁜 짓은 하지 않아야 돼. 헌금도 제대로 하고, 세상에서 깨끗하게 살아야지.
이런 식이 되어 버리면 하루하루 사는 것이, 직장 생활하는 것이 너무나 큰 짐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은혜로 내가 산다는 것을 안다면 오히려 모든 것이 감사의 제목이 될 것이요. 모든 것이 주님을 위해 봉사하는 일로서 즐거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봉사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유로움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바울의 말을 통해 우리는 부담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더욱더 분명히 보게 됨으로 위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바울은 네 번째로 마음을 같이 하라는 말을 합니다.
많은 교회에서 이 말씀을 지켜보려고 발부둥 칩니다. 그런데 마음을 같이 하라고 한다고 마음을 같이 할 수 있는 죄인이 아닙니다. 이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게 된다는 말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악을 제대로 아는 자들이 모여 있다면 그들이 당연히 한 마음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억지로 노력한다고 끼어 맞춘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우리 하나 됩시다를 설교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죄악을 다 들추어 내어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렇게 되면 줄서기가 시작 됩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무리들, 회개하는 무리들과, 더욱더 마음이 강퍅해 지는 무리들로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평안할 지어다 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평안을 찾아 일생을 헤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정이, 직장이 돈이, 건강이 자신에게 평안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세요. 이런 것이 다 있어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평안은 어디에서 옵니까?
바로 주님의 사랑에서 옵니다.
요한 일서4:18절을 봅시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스데반 집사가 어떻게 돌에 맞아 죽을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사랑을 온몸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돈으로, 가족으로, 건강으로, 장수로 평안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십자가 사랑을 온몸으로 받은 자로써 참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평안에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아니면 날마다 두려움 속에서 살아갑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인생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는데, 우리는 오히려 죽기를 무서워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내일 우리 사업이 망하면 어떻게 될까? 우리 아이가 갑자기 죽으면 어떻게 될까?
등등. 많은 근심에 사로잡혀 있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우리가 받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감격하고 탄복할 것인데 이 은혜를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가 참으로 근심에 차서 살아가는 하루하루입니다.

여러분 사랑엔 두려움이 없습니다. 참 평안에 있습니다.
죄를 지었다고 불안하지 않습니다.
본래 죄인입니다. 그러니 오히려 십자가의 은혜를 더욱더 깊이 아는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고린도교인들이 만일 바울의 말을 듣고 받아들인다면 얼마나 큰 평안이 찾아오겠습니까?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모든 기쁨과 온전케 됨과 위로와 마음을 같이하는 것과 평안은 오직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가능한 일입니다.
십자가 지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이런 일이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이런 기적을 여러분들이 맛보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