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개

강해 3

푸른 섬 2010. 10. 10. 17:16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학개2장1-9

낯선 도시 한가운데 번잡한 거리에 서 있어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왜 이런 생각을 할까요?

 

말씀을 떠나 버리니 그렇습니다.

말씀을 떠나 눈에 보이는 현실을 보게 되면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은 참으로 보잘 것 없어 보입니다.

 

인간들은 늘상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 감탄하고 즐거워합니다.

사람들이 여행을 다닙니다.

 

여행을 가게 되면 눈에 보이는 것을 ,

그리고 몸으로 느끼는 것을 경험하려고 합니다.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고 놀라워하고 즐거워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사람들은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아니면 오랜 세월동안 자연이 만들어 놓은 것들을 보며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를 느끼게 됩니다.

우리들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순간 이러한 것을 경험합니까?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직접 생존해야하는 현장에서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돈이 오가는 곳, 내 몸의 불편을 느끼는 현장에서는 성도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지가 부끄럽습니다.

 

거대한 돈의 흐름 속에 나는 아주 작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그런 죽음 속에 나도 그 행렬에 끼여 있습니다.

 

교통사고를 죽는 사람들, 아직 내 차례가 되지

 않았을 뿐이지 언제 나의 차례가 올지 모릅니다.

 

거대하고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 나라는 인간은 너무나 미약합니다.

왜 자꾸 이런 생각을 들게 합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은 무엇으로 삽니까?

돈입니까?

힘입니까?

능력입니까?

사람은 말씀으로 삽니다. 말씀되신

예수님으로 인해 삽니다.

생명 되신 예수님으로 삽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말씀을 저버립니다.

 

말씀을 내팽개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거대한 현실 속에서 말씀은 너무나 미미합니다.

정말 하찮은 것입니다.

 

천지 쓸데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거대한 현실 앞에서

 나 자신이 얼마나 초라해 집니까?

특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나 자신이 말입니다

.

이번에 여행을 가보니 나무도 잘 자라지 않는, 사람이

 살수 없는 곳에 바람을 이용하는 풍력발전소를 보았습니다.

차를 타고 30분을 달려도 여전히 풍력발전소 였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인간은 위대하다.

인간은 미미한 존재가 아니라 위대하다라고 말입니다.

주님 되신 예수님이 필요 없다.

 

십자가의 피복음을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만합니다.

 

얼마 전에는 지구 같은 행성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생명체가 살 확률이 100%라고 하나요.

 

물론 거리가 수십조광년인가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성경말씀은 엉터리가 되는 것입니다.

 

오로지 사람이 위대할 뿐입니다.

이런 것들 앞에서 성도는 참으로 하찮은 존재입니다.

기껏 해봐야 말로서 믿는다고 할 뿐이지 않습니까?

 

무당처럼, 아니면 거짓 선지자처럼 기적을 일으킬 수도 없고.

 

그냥 믿습니다. 말씀이 이렇습니다라고 할 수밖에 없으니.

오늘 본문을 한번 봅시다.

학개 선지자가 뭐라고 말합니까?3절입니다.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자 곧 이 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 것인 너희 눈에 보잘 것이 없지 아니하냐”

성전을 새롭게 지었습니다.

 

그런데 이전의 성전, 즉 솔로몬 성전을 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눈에는 지금의 성전이 너무나 보잘 것 없습니다.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비교 대상이 없었다면 , 그냥 지금 지어진

 성전만 보았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직 살아남아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솔로몬 성전을 본 사람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들로 인해 현재의 성전이 얼마나

초라한지를 알게 됩니다.

이게 과연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나라인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4절을 봅시다. “그러나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지금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은 굳세지

않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 아닙니까?

 

손발의 힘이 다 풀릴 정도로 힘이 쫙 빠진 상태,

맥 빠진 상태이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여기에 있는 우리들이나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5절을 봅시다.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신이 오히려 너희 중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참으로 희한한 말씀 아닙니까?

 

출애굽이야기를 끄집어내십니다.

 

언약의 말씀과 여호와의 신이 너희 중에

 머물러 있으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린 거꾸로 생각하죠.

 

언약의 말씀과 여호와의 신이 우리 중에

 머물러 있는데 뭐가 두려운가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언약의 말씀과 여호와의 신이 머물러 있기

때문에 두려움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언약의 말씀과 여호와의 신이 머물러 있기 때문에

 두려움 속에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들리는 것입니다.

 

지어진 성전을 보면서 두려움 속에 빠져들어 갑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을 너무나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시면서 또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6-9절을 읽어 봅시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이니라라는

말씀이 여러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큰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지금 현실은 장차 이루실 일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상황이라는 말입니다.

조금이라도 이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클 것임을 보여줄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차라리 솔로만 성전이 초라했고 둘째 성전이

 더 화려 하고 웅장했다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 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은 초라한 성전과 여호와의 말씀뿐입니다.

 

이 말씀이 초막절 마지막 날에 선포된 말씀입니다.

초막절이 무엇입니까?

 

무사히 추수를 마치고 예루살렘에 모여 감사하는

축제의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선포라고 생각해 봅시다.

듣는 사람이 어떻겠습니까?

 

지금 꼴이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감사하기 위해 모인 초막절 마지막 날

 축제인데 눈에 보이는 상황이 어떻습니까?

우울하고, 슬프고, 초라한 축제가 아닙니까?

그런데 학개 선지자는 입만 살아 있습니다.

 

 

스스로 굳세게 하라.

지금 스스로 굳세게 할 분위기가 아니잖아요.

 

그리고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클 것이라는 여호와의 말씀이 먹혀 들어가겠습니까?

누가 열 받게 할 일이 있습니까?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것을 약속하셨으면

제대로 약속을 이루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게 뭡니까?

 

초라한 성전.

6,7절에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그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런 말씀이 먹혀 들어가겠습니까?

 

거대한 나라가 여전히 떡 버티고 있는데,

자신들은 여전히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데 이런 말씀이 들릴까요?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키신다.

지금도 우리는 자주 듣잖아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십니다.

세상을 불로 심판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지옥 보냅니다. 믿는 자만 천국 갑니다.

이런 이야기가 어떻게 들려집니까?

 

거대한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 속에서,

 생존세계에 살면서 이런 말씀이 믿어집니까?

 

이런 말씀이 가끔씩 여러분에게 들려집니까?

성경을 읽어 보면 볼수록 우리 사람들의 입장은

전혀 고려치 않는 하나님임을 알아가게 됩니다.

 

무엇인가 믿을 만한 것들을 주시면서 믿게 하시면

될 터인데 자꾸 믿지 못할 상황만 만들어 내시니 말입니다.

 

요한복음7장37-38절을 봅시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보세요. 학개서의 예언의 말씀이 요한복음7장에 의하면

예수님의 의해 이루어짐을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2장21절에서는 성전은 예수님 자신의 몸이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이전의 나중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크리라는 말씀이 어떻게 됩니까?

맞습니까 틀립니까?

 

안 맞잖아요.

분명 학개 선지자를 통해 이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크리라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헤롯성전을 말합니까?

 

헤롯성전은 아니지요.

말씀에 따라 지어진 성전이 아니잖아요.

 

참성전이신 예수님의 영광이 스룹바벨성전의 영광보다 더 큽니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삼일만이 부활하셔서 주님이 되셨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커 보입니까?

 

차라니 스룹바벨성전이 더 커 보이지 않을까요?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잖아요.

이 뿐만 아닙니다.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어떻게 살아갑니까?

죽음의 길로 갑니다.

 

주님되신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 그대로 걸어갑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영광스럽지 않습니다.

부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초라해 보입니다.

보잘 것 없어 보입니다.

 

조롱거리입니다.

정말 하찮은 존재들입니다.

하루살이 같은 자들입니다.

 

이게 성령을 받은 자들이 살았던 삶입니다.

 

그러니 학개 선지자의 선포는 우리에게 도대체 어떻게 들려집니까?

희망, 희망, 희망의 메시지로 들려집니까?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잖아요. 희망의 말씀이 아닙니다.

 힘을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참 성전, 분명 학개 선지자 말에 의하면

이전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성전은 예수님이십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심지어 성도가 보기에서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참성전이 오심으로

이 땅에서는 완전히 왕따 당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사람들 속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심지어 죽임을 당하는 인생이 됩니다.

 

그러니 성도의 삶이라는 것은 정말 초라한 삶입니다.

성령 받은 성도가 하나님의 전이 되는데

 그 꼴을 보면 영광스럽다고 말할 수 가 없습니다.

 

무엇을 보고 영광스럽다고 하겠습니까?

여기 앉아 있는 여러분이 성전입니까?

영광스럽습니까?

 

오히려 초라하지 않습니까?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될까요?

그것은 말씀 속에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성도를 보게 되고 예수님 안에서

학개서를 보게 되면 이 말씀이 참으로 위로가 되고 힘이 됩니다.

뿐만 아닙니다.

 

참성전이신 주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알게 됩니다.

 

여기에서의 영광스러움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영광스러움과 정 반대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것이 오히려 영광입니다.

 

그러니 죄인들이 생각하는 영광을 정반대로 뒤집어 버립니다.

 

여러분 제발 세상을 보실 때 십자가 피 안에서

세상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생존 경쟁가운데서,

 

 인간들의 위대한 능력 앞에서도 여러분은 결코

초라하거나, 미미한 존재가 아님을 알 것입니다.

 

학개 선지자의 외침은 그 외침을 듣고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외침은 여호와의 말씀이고 그 말씀은

 여호와께서 친히 이루십니다.

예수님이 이루셨습니다.

 

그러니 제가 방금 제발 세상을 보실 때

십자가 피안에서 보라고 부탁드린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도 주님께서 친히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일하시는 자는 세상을 볼 때 오히려 세상을 만만하게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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