찍힘과 접붙이심
로마서11장11-24
이스라엘이 넘어졌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넘어지지 않았다면 이방인들의 구원은 없습니다.
이러한 말을 듣는 이방인들은 어떤 마음이 들까요? 듣는 자들은 이방인들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이 듭니까?
이스라엘이 넘어졌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는 이 말씀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됩니까?
주님께서 상당히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 것 같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이 버림이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서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다시 하시는 말씀이 이방인들의 구원이 오히려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라고 하십니다.
즉 이방인들이 구원받음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해서 이들 중 얼마를 구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신의 역할, 즉 이방인의 사도로서 자신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긴다고 말을 합니다. 그 이유를 자신의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고 함니다.
듣는 이스라엘 상당히 기분나빠요. 자신을 이스라엘로 여기는 한 이 말씀을 아멘으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참 논리가 이상하지요.
지금 이방인에게 죽자 사자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결국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해서 그들 중 얼마를 구원하기 위함이랍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를 지금부터 꺼내고 있습니다.
9장부터 길게 자기 혈육에 대한 구원을 논하는 이유를 11장에 와서야 아주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18절을 봅시다.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이 말씀을 들으면 마치 뿌리가 따로 있는 것 같지요. 그렇습니다. 분명 뿌리가 따로 있지요. 뿌리가 없는 가지가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우리의 관심은 그래 뿌리를 찾아야지 라고 하겠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19절입니다.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이것은 11절부터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지요.
그런데 20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제가 로마서를 설교하면서 계속해서 강조한 내용이 있지요.
편지를 읽는 대상말입니다.
이제서야 이스라엘의 구원을 언급한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왜 꺾였는가?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너는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섰는가? 그것은 믿음으로 섰기 때문이다. 그러니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두려워 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왜 이런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 주실까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마음을 품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이것은 단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만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구약 이스라엘이나 예수님 당시나 오늘날이나 인간들 본성이 바뀐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인간들의 모습은 구약 이스라엘의 재탕밖에 나올수가 없습니다.
성령받았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를 보아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지요.
히브리서3장12절이하를 봅시다.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우리가 시작 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라라”
그러면서 15절 이하를 말씀하십니다. 구약 이스라엘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라리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데 그들의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그냥 읽으면 인간의 믿음, 열심을 말씀하시는 것 같지요.
그런데 그렇게 이 본문을 보게 되어 버리면 로마서와 히브리서는 서로 상극이 되어 버립니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요. 로마서는 전적인 주님의 은혜라면, 히브리서는 오히려 인간의 열심, 믿음을 논한다고 밖에 말할 수 없겠지요.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 구원에 있어서 제대로 역할을 못합니다.
로마서 앞부분에서 그렇게 집요하고 상세하게 예수님의 피로만 구원을 가져온다고 말씀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인간들은 다시 다른 마음을 품게 됩니다.
그래, 우리는 믿음으로 살자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마음먹는다고 믿음으로 살아지나요? 안되지요. 이스라엘이 앞서서 이미 다 보여주었습니다.
로마서11장20절에서 그들은 믿지 않았고 너희는 믿음으로 섰다라고 말씀하시지요.
이 믿음과 히브리서 3장에서 나오는 믿음이 같은 종류의 믿음인 것은 분명하지요.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이 이 믿음에 대해 관여할수 있습니까?
21절을 봅시다.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이 말씀을 왜 하십니까?
이미 구원받았는데, 이미 십자가의 피를 알고 믿고 있는데.
구약이스라엘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자신들이 주님의 증인으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어요.
하나님의 원가지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시면 성도는 이 말씀을 어떻게 들어야 할까요?
아멘으로 들어야 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들을까요?
나는 아니요. 나는 주님께서 아끼시는 가지야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진짜 성도는 오히려 이 말씀을 아멘으로 받지요.
주님께서는 나도 얼마든지 아끼지 않으신다. 어떨 경우에, 믿음에 서 있지 않을 경우에.
그러면서 22절을 말씀하십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어라고 한다고 머물러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런데 보세요. 인간들이 나타나는 반응을 가지고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여주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어떻게 머물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인자하심에 머물게 하시지요.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다 넘어지는 자가 됩니다. 주님께서 넘어지게 만들어 버립니다.
히브리서로 다시 돌아가 보면 결국 너희들은 어디 소속인가? 멸망당한 이스라엘과 한 통속인가, 아니면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신 예수님과 한 통속인가를 물으시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그 어디에도 너희들이 노력하면 된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항상 너희들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
너희들은 누구소속인가를 물으시는 말씀입니다.
율법 같은 경우에도 로마서를 보면서 살펴 보았지요. 우리들은 죄의 종이다. 마귀소속임을 밝히기 위한 율법이었지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도 똑 같은 의미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 어느 인간이 높은 마음을 품지 않겠습니까?
누가 주님앞에 두려워 하는 인생을 살아갑니까?
이 세상에는 이런 자 없습니다. 이런 자를 주님께서 만들어 내십니다. 너희들은 이렇게 주님께서 만들어내는 그 창조 속에 놓인 존재인가를 물으십니다. 물론 자신들은 죄인으로 드러나는 현장에서 말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서도 성도는 내가 이스라엘과 다르지 않구나를 인정합니다.
그래서 23절을 보면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그러니 우리 자신을 위한 구원은 없다는 말입니다. 오직 주님되신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 성도들이 존재하며, 그렇지 않은 자들이 존재합니다..
우리 인간을 위한 구원이라면 주님께서는 가차없이 그 구원을 뺏어 버립니다.
24절을 봅시다.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 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
이것은 완전한 역설법입니다.
로마서 말씀은 이스라엘이 듣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듣는 자들은 일차적으로 이방인들이지요. 로마서 말씀에 의하면 실상 혈통적 이스라엘도 다 이방화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들이 구원을 얻을 방법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반대로 이제는 이방인들을 모두 이스라엘로 만들어 버렸지요. 철저하게 이스라엘로 만들어서 주님증거물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너희들 자신이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자들인줄 알아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너희들은 십자가 피를 자랑하는 자들이 아니라 이스라엘처럼 혈통을 자랑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을 자랑하고, 기도한 것을 자랑하고, 전도한 것을 자랑하는 자들이 될 터이니 그렇다면 너희들도 잘려나간 이스라엘처럼 잘려 나간다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피를 자랑하지 않는 자는 결코 자신의 뿌리를 이 말씀에 두지 않습니다.
그러니 언제나 구원받은 자신을 믿는 자로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지요.
그러나 성도는 자신이 늘 말씀앞에 죄인으로 드러납니다. 구약성경, 신약성경을 보면서. 그래서 오늘도 십자가에 피로 구원하시는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