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강해 20

푸른 섬 2015. 1. 4. 12:31

일꾼의 충성

고린도전서41-2

일꾼이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은가요 나쁜가요? 우린 일꾼이라는 말을 들으면 살짝 기분이 나빠지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린 일꾼 되는 것이 싫어요. 일꾼 되기 싫다는 말은 나는 부리는 사람 즉 주인이 되고 싶다는 말입니다.

 

아파트 경비를 하더라도 주인행세 하고 싶어 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어느 누구보다 경비원에게 그렇게 인사를 공손히 열심히 한답니다. 물론 그 경비를 이용해 먹으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겠지요.

 

일꾼이라고 호칭을 붙였다는 것은 주인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그 주인이 일꾼에게 시킨 일이 있다는 겁니다.

 

얼마 전에 이사를 했는데 일꾼들의 꾀를 냅니다. 그들은 여러분 이삿짐을 나르면 돈을 더 많이 버니 이사차량에 짐을 가득 싣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싣는 겁니다. 혼자 이사를 하다 보니 짐을 어떻게 싣는지 알 수 없으니 방법이 없잖아요. 결국 그들 원대로 돈을 받아 갔지요.

 

엄격한 법이 적용된다면 일꾼들이 감히 그런 꾀를 내지 못하겠지요.

 

오늘 본문은 우리가 듣기에 좀 거북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사도 바울일행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기라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듣기에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에게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기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자랑스럽습니까 아니면 이런 말을 하기 싫습니까?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겨 달라고 강하게 요청할 겁니다. 그러면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여기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의 일꾼이니 대접하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니 주님의 일꾼, 즉 주님의 종을 함부로 여기지 말라. 함부로 하다가는 저주받는다는 식입니다. 목사들을 만나보면 대부분 그래요.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겨 달라고 해요. 그러니 자신이 하는 일이 뭔가 대단한 일이고, 주님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자신이 대접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뿐만 아니라 교인들은 여기에 화답하여 지극정성으로 목사님을 대접하지요. 그래야 저주라는 것이 자신을 피해 간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다르게 말하면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늘 듣던 말이 주의 종을 저주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 당시는 목사가 흔하지 않는 시대여서 촌 동네는 전도사들이 와서 목회를 많이 했어요.

주의 종이 아무리 잘못 하더라도 주님이 심판하시지 우리는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목사나 전도사는 주님의 일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삼사십년 전과는 차이가 나지만 여전히 목사는 주님의 일꾼이라는 인식이 여전합니다.

 

목사들과 만나서 이야기 해보면 스스로 그렇게 인식하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일꾼으로 여기라는 말씀이 이런 식의 의미가 아닙니다. 주님의 일꾼이라는 말은 자신의 권리가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주인 행세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요즘 목사들이 인식하는 그런 식의 주님의 일꾼이 아닙니다.

 

모세를 보세요. 모세가 그 정도로 고생했고, 그 정도로 온유했다면 약속의 땅에 넣어 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이 모세 입장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죽도록 고생하고 원망이란 원망은 다 얻어 먹고 남 좋은일만 시키고 자신은 죽어요.

 

아마 요즘 목사들에게 모세와 같은 역할을 하라고 하면 더러워서 하지 않는다고 할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세는 평생 좋은 소리 못 들었어요. 물론 온유함을 칭찬했지만 그 온유함이 오히려 비방거리가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직접 만났지만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는 원망의 소리만 들었습니다.

히브리서35절을 보면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해 종으로 충성했다고 합니다.

 

아들,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신 분이 참 대제사장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그는 종으로 충성했습니다. 모세의 평생 고생은 십자가 지신 주님을 증거하기 위한 종의 역할일 뿐입니다.

 

우린 모세를 볼 때 구경꾼, 관찰자로 보니 모세는 좋겠다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모세 되기 싫습니다. 죽어도 모세역할 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결과를 못 보잖아요.

 

약속의 땅을 못 보잖아요. 어느 누가 일을 시작했는데 그 결말을 보고 싶지 않겠습니까?

 

목사들이 결말을 보고 싶어 하니 발악을 하잖아요. 축복도 땅의 축복으로 바꾸어 버리고, 천국도 땅으로 바꾸어 버리고, 영생도 건강으로 바꾸어 버리고. 어차피 천국이란 자신의 손에 없기 때문에 자기 손에 잡히는 것으로 다 바꾸는 겁니다.

 

그래서 모세를 구경하는 겁니다. 그리고 자신이 모세에게서 챙길 것만 챙겨서 자신의 얼마나 대단한 주님의 일꾼인가를 과시하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신이 곧 주님의 종이라는 인식을 성도들에게 심어주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교인들은 모두가 다 목사의 종이 되어 버리지요. 오늘날 교회가 그렇습니다. 자기 목사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다른 사람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냥 잡소리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십자가를 전해도 그 십자가가 자신이 다니는 교회 목사가 전하면 복음이 되고, 다른 목사나 교인이 전하면 개소리가 됩니다.

 

왜 이렇게 됩니까? 그들에게 있어서 믿음이라는 것은 주님과 직접적인 관계가 아니라 목사라는 매개체, 즉 그들에게는 중보자가 되어 버립니다. 그 중보자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그 중보자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가 없는 겁니다.

 

이들에겐 목사가 진짜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버린 겁니다. 그 일꾼이 없으면 그들은 살수 없는 지경이 됩니다. 물론 갈아 타지요. 갈아 타도 여전히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여기라고 요청하는 이유는 우린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일꾼이 일만 열심히 하면 되지 무슨 다른 것을 요구합니까?

 

일꾼이라고 하니까 우린 오늘날 자본주의 시대의 일꾼으로 생각하는데 그런 일꾼이 아니라 종을 말합니다.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다가 그대로 끝나는 인생이 종입니다. 주인이 먹을 것 주면 감사하고 주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그런 종입니다.

 

누가복음177절 이하를 보면 종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는데 그들이 일이 끝나 돌아오면 주인이 밥을 차려서 종에게 대접할 자가 있느냐? 없지요. 오히려 종에게 빨리 저녁 준비해서 내 먹을 것을 차려 나오라 그리고, 그 후에 먹어라 하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찌니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명을 받아 하는 모든 것들은 제자들 것이 아니에요. 믿음에 속한 것들입니다. 믿음에 속했다는 것은 주님께 속했다는 겁니다.

 

지금 바울이나 그와 함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하는 모든 일은 자신이 한 일이 없습니다. 자신이 행한 일이 없는데 사람들은 자꾸 바울과 그 일행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기는 겁니다.

 

제가 지금 이상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으로 여기라고 말을 했을때에는 사람들은 사도바울을 그리스도의 종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일꾼, 즉 매우 가치 있는 존재로 여기고 있다는 말입니다.

 

앞서서 제가 말씀드린 오늘날 목사들이나 교인들이 인식하는 그 인식에 대한 공격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여기라고 요청하는 이유는 너희들이 그런 식의 인식으로는 하나님의 비밀은 영원히 비밀이 되어 버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하나님의 일꾼이기 때문에 만일 너희들이 우리들을 인식하는 그 인식의 틀이 이 세상방식의 틀이라면 우리들은 너희들에게 영원히 비밀이 되어버린다는 말입니다.

 

우리교회 목사가 복음을 잘 전해, 저 교회 목사가 복음을 잘 전해라는 식이 되어 버린다면 그것은 복음의 비밀이 비밀임을 증거하는 증거물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하니 목사들이 더 좋아하지요. 너희들은 하나님의 비밀을 모르는데 나는 아니 내 말을 잘 들어라는 식이 될 수 있잖아요. 그러니 이런 자들을 골라 내기 위해서 오늘 본문 말씀이 있습니다.

 

뼈 빠지게 일하고 자신은 무익한 종이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고백은 복음의 비밀이 알려진 자에게만 해당되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았으니 나는 중요한 사람이야, 나의 말을 듣지 않으면 저주 받아라는 식의 사람들은 절대로 자신을 무익한 종이라 하지 않습니다.

 

물론 겸손을 떨기 위해 그런 소리를 할 수 있겠지요. 많은 목사들이 그런 소리를 합니다. 그러나 나는 무익한 종이라는 고백은 십자가의 피만을 전하는 자를 두고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말은 나는 무익한 종이라 해놓고 십자가 피만을 전하면 짜증을 냅니다. 분노를 냅니다. 그게 무슨 무익한 종이 할 짓입니까?

 

2절에서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하지요. 충성이 뭐라고 묻는다면 평생 자신이 무익한 종임을 드러내면서 사는 것이 충성입니다.

 

모세가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는 결정적인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무익한 종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했다고 되지요. 만일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 버린다면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이유가 없어져요. 모세가 메시아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모세는 아들 전하기 위한 종의 역할만 죽도록 하다가 그렇게 죽어야 되는 겁니다.

 

충성이라는 말을 요즘도 잘 사용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교회에서는 충성이라는 말을 굉장히 중요시 하지요.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교회에서는 연시가 되면 죽도록 충성하라고 강요 세뇌 시킵니다. 그러면 그들이 말하는 충성이 무엇일까요? 십일조 빼먹지 않기, 새벽기도 한주에 한번은 참석하기, 주일 예배 빠지지 않기, 어느 한 부서에 소속되어 봉사하기, 한주에 성경 한 구절 외우기, 매일 성경 다섯장 일기, 식전에 기도하기 등등.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는 말씀을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받아 들입니다.

그러니 이들에겐 비밀이 될 수밖에 없어요.

 

충성이라는 땅의 용어를 주님께서 사용하시니 땅에 속한 자들이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해요. 그들이 이해하는 총성이란 자신들의 열심 외에 나올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도바울이 내어 놓은 충성은 십자가만 자랑하는 겁니다. 왜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고 하면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충성은 인간들이 내어 놓을 수 있는 충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내어 놓을 수 있는 충성이라면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일꾼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이유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열심히 율법지키는 것이야 말로 충성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릴 때부터 율법을 지킨자들의 충성을 예수님이 충성으로 보았습니까?

 

아니지요. 그건 주님께 충성이 아니라 자신에게 충성한 겁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볼 때 그 사람은 하나님께 지극히 충성된 자로 보였지요.

 

그러나 주님의 평가는 다릅니다. 그러니 그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높임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사람들로부터 높임을 못 받아요. 왜 그렇습니까? 자신의 충성이 자신의 충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지신분의 충성이기에 그는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지 못합니다. 물론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자들로부터야 인정을 받겠지만 그것조차도 부인해 버리지요.

 

우리들을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합니다. 일꾼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성밖에 없습니다.

 

돈을 벌어도, 자식을 키워도, 건강해도, 병들어도 나는 무익할 뿐이요 십자가 지신 주님만 자랑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그러니 복음의 비밀을 맡은 자들만이 충성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충성을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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