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강해 88

푸른 섬 2016. 8. 2. 16:24
잠잠하라
고린도전서 14장34-40
34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봅시다.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35절에서는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고 합니다.

창세기 3장16절에 보면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선악과 따 먹은 후 부부사이에서 선악과 따먹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내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여자를 다스리는 것, 즉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생각에 이것이 무슨 선악과 따먹은 것과 관련 있느냐고 따질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여성권리가 과거와 달라진 상황에서 이런 말씀을 폐기 처분해야 될 말씀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이런 말씀은 삭제해야 할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이 교회에서 여자들이 잠잠히 있어야 하는 말씀으로 연결하는 것은 주님께서 좀 오버한 것이 아닌가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교회에서 여자들은 잠잠하라고 했거든요.
여기에 나온 여자들은 단순히 결혼한 여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부도 포함되고 모든 여자들이 다 포함됩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여자들을 어떻게 보는 고 하면 남편의 아내로서 여자로밖에 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난 노처녀인데요, 난 과부인데요. 그런 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과부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서는 어떤 개인적인 것을 내세울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안목과 우리 인간들의 안목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눈에는 여자들은 모두 남편의 아내로 만드셨습니다.
그 이유가 오늘 본문에 나오지요.
교회에서 여자들을 잠잠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자들은 또 덤벼듭니다. 그래? 주님께서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했으니 나 입 다물고 있겠어. 그러면 말씀 잘 지키는 것이 되잖아. 이런 식으로 나올 것이 뻔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여자들의 역할이 있습니다.
여자들의 역할은 필히 여자의 후손과 관련된 역할입니다.
그 역할이 바로 남편에게 복종하는 겁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남편 되신 예수님께 복종하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생물학적 여성으로서 보여주는 역할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미 주님의 몸된 교회가 있는데 아직도 이 말씀이 우리에게 유효합니까라고 반문하겠지요.
이런 반문을 한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들을 용의가 없다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을 통해 하신 말씀이 주님의 말씀으로 들리지 않고 사도바울의 개인적 이야기로 듣겠다는 것이 이런 태도를 불러일으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남편들은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팔짱끼고 이 말씀을 구경합니까?
그것 아닙니다.

여자들이 교회에서 잠잠해야 되는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여자가 말이 많아서 교회를 어지럽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을 증거하는 여자의 삶을 살도록 주님께서 그 삶을 고정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여자들은 교회에서 질문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배우려면 집에 가서 남편에게 묻고 배우라고 합니다. 교회에서 말하는 자체가 부끄러운 짓이랍니다. 좋게 말해 부끄럽다는 말이지 나쁘게 말하면 더럽다는 말입니다.
교회에서 말하는 자체가 더러운 짓이라는 말입니다.

진짜 주님이 해도 너무하시지 여자가 질문하는 것조차 금해야 하느냐 하겠지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남편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여자, 즉 아내가 있지 자신의 의문을 풀기 위해 자기 자신이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말씀이 궁금하면 교회에서 질문할 수 있잖아요. 이게 오늘날 우리들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생각지 않고 나만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어요. 우리의 몸이 누구 증인인지도 모르고 오직 자기 증거하기 바쁘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27장12절을 보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고소를 당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실 말씀이 많겠지요. 우리 같으면 얼마나 많은 변명을 하겠습니까?

빌라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말하는 주도권을 빌라도가 갖고 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의 말에도 어떤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할 말이 없어서 잠잠하셨겠습니까? 아니면 말할 권세가 없어서 잠잠하셨겠습니까?

이사야 53장 7절을 봅시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라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주님께서 이렇게 잠잠하신 이유는 마땅히 형벌 받을 자기 백성을 위해서 잠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예수님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자기 뜻 이루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 지셨습니다. 잠잠하셨습니다.

여자들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자의 후손, 즉 남편 즉 진짜 남편이 누군지를 증거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은사가 남자에게만 임한 것이 아니라 여자에게도 임했다는 사실입니다. 방언과 통역, 예언의 은사들이 여자들에게 임했습니다. 그러면 여자들이 가만있고 싶겠습니까 아니면 말하고 싶겠습니까?

말하고 싶어 견딜 수 없겠지요.
그런데 한번 보세요. 36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고 묻습니다. 뿐만 아니라 너희에게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느냐고 합니다.

분명 사도바울이 인정합니다. 여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 같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임하게 했으면 그 말씀을 교회에 전하라고 임했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그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에서 말하지 못하도록 해 버립니다. 말하려면 집에 가서 남편에게 하라는 겁니다.

무슨 이런 은사가 다 있습니까? 은사를 주셨으면 써 먹으라고 주신 것이지 그것 집에 가서 남편에게 이야기 할 것 같으면 왜 그런 은사를 주셨는가 말입니다.

우린 은사를 써 먹을 용도로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런 식의 생각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주신 은사의 용도는 십자가 지신 주님을 증거하라고 주신 은사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 놓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것도 만일 주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얼마나 더 내어 놓고 싶겠습니까? 그런데 그 내어 놓는 것이 주님의 피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더 화나게 하는 것은 사도바울 자신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고 하면서 이들을 한꺼번에 콱 눌러 버립니다.
너희 여자들아 교회에서는 잠잠하라. 내 권위가 제일 크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그냥 사도바울 개인의 견해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주님의 말씀으로 들리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나도 계시 받았다. 나도 방언 받았다. 나도 통역한다는 여자들이 난리를 치지 않겠습니까?

37절을 보면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고 하십니다.

주님은 이미 방언 한다는 사람, 예언한다는 사람, 계시를 받은 사람들의 생각을 알고 있습니다.

여기 있는 우리라도 만일 방언 받았고, 예언 받았다면 이런 생각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만일 누구든지 사도바울의 말을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은사를 받아도 사도바울의 이 말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가짜라는 말입니다.

우린 내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이 나를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노래 해 주면 그렇게 좋아합니다.
당신은 태어난 자체가 저주요 저주를 보여주는 인생을 살다가 저주의 끝인 죽음으로 끝나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하면 싫어합니다.

우린 무엇을 해도 나를 위한 것입니다. 남자로 태어나든 여자로 태어나든 항상 내가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나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이 왕이 된 것도, 자신이 꾼 꿈도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느부갓네살 왕을 손가락질 할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우리가 그 위치에 올라가면 아마 느브갓네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조차 듣지 싫은 우리들인데 이미 세계 최고의 권력을 가진 자리에 앉았다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아침 드라마에 어떤 회사의 회장이름이 나대기입니다. 작가가 누군지 이름을 참 잘 지었어요.
자기 마음대로 나댄 결과 그렇게 회사 회장이 되었다는 말이지요.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나름 나댑니다. 나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만의 세계, 자기만 높아지기 위해서 나대는 것이지요.

놀라운 것은 성령의 은사를 받은 자들 조차도 나댄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참 희한하지요.
주님 쪽에서 뭐든지 주시기만 하면 첫째 아담안에 있는 자들은 그것을 갖고 나댑니다.

율법을 주시면 율법으로 나대고, 성전을 주시면 성전을 갖고 나댑니다.

민수기21장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 원망했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 뱀을 보매 원망하는 백성들을 물게 하셔서 죽은 자가 백성 중에서 많았습니다.

그러자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여 죄를 범했다고 하면서 모세에게 여호와께 자신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나름 나대다가 호대게 당했습니다.

그래서 놋뱀을 만들어 놋뱀을 장대위에 달아 놋뱀을 쳐다보는 자들은 다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볼 땐 놋뱀이 이들을 살렸지요.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런 것을 잊어버릴까요?
잊지 않습니다.
열왕기하18장3,4절을 봅시다.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명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느후사단이라는 말은 모세가 광야에서 만들었던 놋뱀의 이름입니다.

놋뱀줘서 살려 주니 놋뱀 들고 나대는 것 한 번 보세요.

남자로 여자로 만들어 주시니까 남자로 나대고 여자로 나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인 내가 중요하지, 여자인 내가 중요하지 십자가 지신 주님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무엘하 11장을 보면 우리아 장군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나대지를 않습니다.
물론 나댄다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한번보세요. 다윗이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암몬과의 전쟁 중인 우리아를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아의 관심은 오직 한 가지 여호와 전쟁 밖에 없습니다.
“우리아가 다윗에게 고하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영채 가운데 유하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신복들이 바깥 들에 유진하였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치 아니하기로 왕의 사심과 왕의 혼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남편의 진정한 역할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자가 우리아입니다.

왕으로서 나대다가 왕 역할을 제대로 못한 다윗과 대조되는 사람이 바로 우리아입니다. 다윗의 나댐으로 인해 죽은 자가 우리아입니다.

우리를 여자로 태어나게 하셨습니까? 남자로 태어나게 하셨습니까? 지금 받은 것들이 많습니까? 왜 그것을 주셨습니까?
나 자랑 하도록 나대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성도에게 주신 것들은 주님의 피를 증거하라고 주셨습니다.

에베소서1장에 보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전에 택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니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몸, 그리고 모든 것들은 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 전에 택하셨다는 말은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조건들, 여건들이 모두다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기 위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아도 그렇게 야곱을 보아도 그렇게 욥을 보아도 그렇지요. 없다가 있다가 없어지는 모든 것들 조차 주님의 피를 증거하기 위한 소품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니 내 몸 뿐만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도 주님의 피를 증거하기 위한 소모품으로 사용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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