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 후서

데살로니가후서3:16-18

푸른 섬 2007. 7. 24. 15:58
 

규모없는 인생

데살로니가후서3:16-18

사람들 본성 속에는 아주 고약한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규모없이 행하는 자들입니다.  규모 없다는 말은 빈둥거리며 무질서하게 노는 것을 특별하게 지칭하는 말이니다.


이들의 특징은 일하기는 싫으면서 밥은 먹고 살고 싶은 자들입니다.

사실 우리들의 마음도 이들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일하지 않고 먹고 살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요한복음4장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자가 육에 속하였을 때에는 어떤 마음의 태도를 갖고 있습니까?

이 여인의 마음은 뜨거운 태양아래 물길러 오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주신다는 물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한번만 마시면 다시 물을 마시지 않아도 되는 물, 이런 물이 있다면 너무 좋지 않겠습니까?


비단 이 여인만 그런 것이 아니지요.


요한복음 6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26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도”

이 말씀은 단순이 떡먹고 배불렀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고기 두 마리아 보리떡 다섯 개로 장정 오천명을 먹이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예수님만 따라 다니면, 예수님만 임금 삼는다면 얼마나 평안한 삶이 보장되겠습니까?

수고하지 않고 밥먹고 살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만 된다면야 말할 필요도 없이 좋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놀라운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광야생활을 할때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우와, 일하지 않고도 먹고 살수 있으니 너무 좋다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또 다른 불만을 토해 냅니다. 불순종합니다.


이렇듯 인간의 죄악은 끝없이 흘러나옵니다.


일하지 않고 먹고 살수 있는 길을 하나님께서 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지만 오히려 이런 마음이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악한 죄인인가를 표출하는 행위입니다.


오늘 본문에 일은 하기 싫고 먹고 살기를 원하는 자들이 나오지요.


이들은 아마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확실히 믿고 있었든 모양입니다.

마태복음10장10절입니다.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이 말씀은 하자가 없습니다.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자기 편한대로 받아 들입니다.


그렇지, 하나님말씀만 전하면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니 말씀을 들은 너희들은 내가 먹고 살 것을 내 놓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요즘도 이런 삯군 목사들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일어난 일이 오늘날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오직 자기 배를 위해 목회를 합니다.


앞날에 내가 어떻게 먹고 살까를 염려하면서 불확실한 미래의 보장을 위해 자신의 부를 채우는 목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자신들이 수고하여서 그렇게 한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자신이 주님의 종이라는 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부를 챙기는 것이지요.


설교 때에는 주님의 나라에만 소망이 있는 듯이 말해놓고 실재로는 주님의 나라에 소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떻게 하면 평안하게 이 땅에서 살까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이들로부터 나오는 설교는 뻔한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말씀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11장20절입니다.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 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빰을  칠찌라도 너희가 용납하는구나”


오늘 본문에서도 놀고 먹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합니다.

겉으로는 예수님의 증인으로 복음을 전한다고 말을 하지만 이들의 속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니다.


참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과 그 일행은 어떻습니까?

이런 마음의 태도로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바울과 그 일행은 놀고 먹는, 복음을 전함으로 자신의 생계가 해결될 것이라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저들과는 완전 다른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바울과 함께 하는 자들의 관심은 오직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성령을 받게 되니 온통관심이 여기에만 집중됩니다.


그러니 복음을 이용해 밥벌이할 생각은 하지도 않지요.


그런데 복음을 이용해 밥벌이하는 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 많은 일거리를 만들어 냅니다.

그 일이야 어떤 내용이 되었든지간에, 그 일을 만들어내는 목적은 한가지이지요.

자신들은 놀고 먹겠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자신이 왕노릇 한번 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말입니까? 교회에서 말입니다.


그러니 이들로부터 전해지는 복음의 내용은 더 이상 말할 것도 없겠지요.

돈이 나오도록 복음을 바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참된 성도는 결코 이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는 것은 내 속에도 이런 마음들이 자리 잡고 있음을 인정하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십자가 지신 주님의 능력으로만 이런 악한 마음이 아니라 바울이 가졌던 마음을 가질 수 있음을 고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게 하실 것을 우리는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13절에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선이란 무엇입니까?

간단하게 말하면 놀고 먹는 것에 관심을 갖지 않고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 가기가 쉽겠습니까?

지루한 싸움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언제까지 말입니다.

죽을때까지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낙심하겠습니까?

오랜 세월을 살아오신 분들은 이 말씀이 무슨뜻인지 더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우리의 힘으로 한다면 낙심될 수 밖에 없습니다.

데살로니가 2장13절을 보면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셨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무슨 염려가 있겠습니까?


주님이 하신다는데 우리가 이것에 대해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는 말씀은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주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오직 예수님만 믿게 하시지 결코 자신의 평안함, 자기 배를 주인삼아 살아가게 하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푸근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