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강해

강해25

푸른 섬 2008. 5. 17. 10:42
 

새로운 피조물

사무엘상11장12-12장18

사람은 늘상 새롭게 살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과거를 다 잊어 버리고 다시 시작했으면 합니다.


결혼 생활이 불만족스런 사람은 결혼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해 버리고 다시 새로운 사람, 지금의 사람과 다른 사람과 결혼 생활을 했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결혼 하기 전의 상태로 돌아 가서 살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과거로 회기하는 모습이지만, 사실은 새롭게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현재가 영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가끔 나이 든 사람을 만나보면 종종 이런 말을 듣습니다.

내가 20대라면, 아니면 내가 30대라면 이렇게 한번 해고 싶은데라고 말입니다.


물론 현재가 불만족 스러워서 하는 말도 있겠지만 새롭게 살고 싶다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새롭게 시작하는 것에 대해 굉장한 기대를 갖고 있고, 희망을 갖습니다.


연초가 되면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합니까?

일월 일일 첫 시간부터 내가 새롭게 무언가를 할 것이라는 부품꿈을 갖지 않습니까?

물론 그 꿈이라는 것이야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꿈이지요.


그래서 예배당에서, 절간에서 야단 법석을 떨지요.

새롭게 뭔가 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가짐도 새롭게 하고, 계획도 새롭게 새우고.


목사들은 이들에게 점쟁이들 처럼 일년을 어떻게 살아라 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것도 성경구절을 이용해서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나라를 새롭게 하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나라를 새롭게 한다는 말이 어떤 뜻일까요?


현재를 부정하지 말고 새롭게 하자는 말일까요 아니면 현재를 부정하고 새롭게 하자는 말일까요?

여기에서 부정이라는 말은 없던 것으로 하자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 자기 부정이라는 것을 이런 식으로 해석합니다.

과거를 없던 것으로 하자.


자신의 과거 꼬라지를 생각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새롭게 된 자신의 현재 모습에 희망이 있을 것이 아닙니까?

새롭게 된다고 해 놓고,  늘상 열받게 하던 남편이나 아내게 늘상 옆에 붙어서 다닌다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새롭게 된 기분이겠습니까?


과거와 단절하지 못했는데 무슨 새로운 것일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하시는 말씀을 보면, 새롭게 한다는 것이 과거와의 단절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과거를 마음속에 꽁꽁 챙겨서 다녀야 하는 새로움이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먼저 모세와 아론을 통해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신 일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이곳에 , 즉 약속의 땅에 거하게 하셨는데 너희들, 이스라엘이 무슨 짓을 했는가? 그들이 그 하나님 여호와를 잊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하솔군장 시스라의 손과 블레셋 사람의 손과 모압왕의 손에 붙이셨습니다. 이들의 공격을 받고 저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우리가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섬기므로 범죄하였나이다그러하오나 이제 우리를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내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를 섬기겠나이다 하매.


우리가 보기에 대단히 뻔뻔 스럽지요.


그렇게 여호와를 배반했으면 이런 말을 할수 있을까요?

그러나 사실 이런 것이 신앙이지요.


그래서 여호와께서 사사들을 보냈습니다.

여룹바알과 베단과 입다와 사무엘을 보내셨습니다.


사사들이 나타났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시겠지요.

이스라엘에 사사가 있었다는 것은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다고 죽도록 얻어터진 상태에서 하나님의 긍휼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너희들은 암몬자손의 왕 나아스의 공격을 보고 왕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왕이신 여호와를 버리고 말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왕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왕을 주셨으니 기뻐 좋아할 일만은 아니지요.

자신들이 얼마나 악한 죄인인가를 증거하는 차원에서의 왕이니 말입니다.


13-15절을 봅시다.

“이제 너희의 구한 왕, 너희의 택한 왕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 위에 왕을 세우셨느니라 너희가 만일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 목소리를  듣고 여호와의 명령을 기역하지 아니하며 또 너희와 너희를 다스리는  왕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좇으면 좋으리나마는 너희가 만일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면 여호와의 손이 너희의 열조를 치신 것 같이 너희를 치실 것이라”

참으로 무시무시한 말씀이지요.


새롭게 하자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들의 수준에 딱 맞게 조건도 달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지금 말하는 이 말을 지킬 수 있을까요?


이들과 이들의 왕이 하나님을 계속해서 경외할까요?


안되지요.

우린 이미 다 알고 있잖아요.


어찌되었든지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 이들의 죄악이 얼마나 큼을 알려 주시고 나라를 새롭게 합니다.


이렇게 설교가 끝나버리면 우리는 다시 이런 결심을 해야 합니다.

새롭게 하자, 우리의 죄악을 인정하고, 다시는 죄를 범치 말자.


이게 우리들이 새해 첫날새벽마다 하는 결심이고 다짐이 아닙니까?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 됩니까?


예수님은 필요없습니다.

십자가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렇게 믿고 있습니다.

뉘우치고, 인정하고, 결심하는 식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욕망대로 날마다 새롭게 하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새로운 피조물의 의미가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의미인지 다른 의미인지 한 번 살펴 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17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예수님의 오심은 이전것은 지나 갔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육체적으로 이해하던 시대는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오늘 우리들이 보는 본문을 조금전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육체대로 이해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로운 피조물은 오늘 본문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새로운 피조물은 성령을 받은 자입니다.

성령은 누가 주셨습니까?

주님되신 예수님께서 보내 주셨지요.


그러면 성령님은 누구를 증거합니까?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증거하죠.


그래서 고린도 후서 5장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오직 대신 죽으신 자를 위해 살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을 주신 이유입니다.


따라서 성령받은 자는 자신의 마음을 새롭게 하기 위해 무언가를 매번 결심하는 자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반성하고 이제는 더욱더 잘 예수님을 믿으야 겠다고 결심하는 자가 성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셔야만 했는가, 그 이유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볼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인간이라는 것은 늘상 새롭게 결심하는 존재인데, 백날 뉘우치고, 회개하고, 반성해도 결국은 예수님을 죽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이구나를 아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을 통해 이것을 볼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받은 증거이지요.

예수님을 위해 산다는것은 오직 대신 죽으신 자를 증거하는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결심을 통해 변화된 인생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는가를 무슨일을 만나든지 증거하는 인생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의 모습이지요.

우리가 기대하는 새로운 피조물과는 좀 다르지요.


마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처럼 과거를 인정하고, 반성하고, 회개하고, 새로운 결심을 하여 온전히 하나님만 경외하는 것이 새로운 피조물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새롭게 된 인생은 언제나 왜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는가를 자신의 몸을 통해 증거하는 인생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지요.


고린도 후서5장21절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의 공로를 자랑케 하려고 우리를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미 새롭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새롭게 되려고 애쓰지 마세요. 애쓰는 자는 결단코 새롭게 된 적이 없으며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도 없습니다.


오직 성령 받은 자만이 새롭게 된자요 이런 자는 평생 예수님께서 왜 대신 죽으셨는가를 온몸 통해 증거하는 자입니다.


우리를 새롭게 해서 윤리적으로 완벽하게 살지 못하게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증거하는 자가 아닙니다. 나를 증거하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분을 증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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