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의 고난
단6:1-28
오늘은 일곱 때를 지나는 가운데 일어나는 일의 좀더 구체적인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니엘의 해석대로 메대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습니다.
이때 다니엘은 총리 세 사람 중 한 사람으로 뽑혔습니다.
다리오 왕이 다니엘을 총리로 세운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읽었듯이 자신에게 손해가 없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다니엘은 다리오 왕의 일종의 소모품이라고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 같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갑자기 무슨 말이냐고요?
다리오 왕과 같이 자신의 이익밖에 모르는 왕이 다스리는 곳의 관직을 맡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마 신앙심이 아주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진짜 좋은지는 모르지만.
하나님도 모르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사는 다리오 왕을 위해 어떻게 총리직을 맡느냐?
결코 그럴 수 없다.
나 같으면 농사나 짓고 살겠다 라는 식의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그 사람은 한 술 더 떠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총리직에 있으니 결국 사자 굴에 던져지는 위기를 맡지 않았느냐고 말입니다.
말이 맞는 것 같지요. 그러나 이런 신앙관은 엉터리입니다.
그가 비록 농사를 짓는다 해도, 그 농기계나 옷 등은 어디로부터 나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 살게 하셔서 빛의 자녀로 살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증인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다니엘은 다리오 왕의 지시에 그대로 따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맡은 임무에 충실할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과연 다리오 왕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통치를 했느냐는 것입니다.
율법에 근거하여 나라를 다스렸는가 입니다.
분명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직 모든 일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느냐에 초점을 맞추어 나라를 다스렸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다시 던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니엘은 악에게 동참하지 않았느냐?
얼마든지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우리는 요셉을 생각해 봅시다.
그도 역시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살았습니다.
그 당시 바로가 과연 하나님의 명대로 행했습니까?
이제 우리가 예수님 시대로 가 봅시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로마제국을 무너뜨리려고 하셨습니까?
잘못되었으면 바로 잡아야 하지 않습니까?
바울은 예수님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바울도 결코 그 당시의 노예제도나 국가가 통치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여러분이 괜히 믿음이 좋은 냥 뽐내려고 하지 마세요.
그러한 모습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그냥 자신이 가진 직장에서, 가정에서 사시면 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주님만 믿으면서 말입니다.
직장이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사장이 나를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성도는 오직 살아계신 주님만 믿고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다니엘을 보세요.
그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자신의 자리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잘 먹고 잘살고, 오래 사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주어진 일에 충실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중심은 오직 주님께만 향해 있습니다.
왕이 비록 나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고 하지만, 나는 그 일을 담당하면서도 주님만 믿고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왕을 어떻게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왕을 어떻게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을 더욱더 총명한 자로 세우십니다.
그러는 가운데 다리오 왕은 그를 총리 중 으뜸으로 세우 나라를 다스리려고 합니다.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악한 왕을 돕도록 다니엘을 그렇게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뒤로 가면 나옵니다.
다리오 왕이 다니엘을 총리들의 으뜸으로 세워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니까 어떤 일이 펼쳐집니까?
총리들과 방백들이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보기에는 총리들과 방백들이 왜 가만히 있지 못할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들이 왜 다니엘을 싫어할까요?
시기가 나서 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결국 이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는 다니엘을 다리오에게 고소하기 위해 작전을 짭니다.
그 작전은 한 율법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 율법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삼십일 동안 왕외에 다른 어떤 신, 사람에게 무엇을 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는 것입니다.
여러분 총리들과 방백들이 만들어낸 율법이 너무나 의외의 것이 아닙니까?
이것을 통해 우리들은 총리들과 방백들, 그리고 이것을 허락하는 다리오 왕의 중심을 읽어 볼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이라는 것이 자신을 위할 때에만 허용하겠다는 것입니다.
다리오 왕은 다니엘을 이용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자신의 일에 간섭한다면 그는 하나님이라도 언제든지 무시하겠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습니다.
총리들과 방백들이 다니엘을 고소할 조건을 찾는 그 마음속에는 근본적으로 살아계신 주님을 거절하는 마음에서 다니엘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참 희한하지요?
총리들과 방백들은 어쩌면 다니엘이 시기 나서 다니엘을 죽이려고 했는지는 모릅니다마는 그 근본 바탕엔 주님을 대적하는 마음이 쫙 깔려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다리오 왕이 한 율법을 세워 삼십일 동안 아무 신이나 사람에게 구하는 것을 금하는 자는 사자 굴에 던져 넣는 것을 알고도 여기에 개의치 않습니다.
그는 늘상 행하던 대로 예루사렘을 향해 하루 세 번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이제까지는 총리의 일을 하면서도 주님을 믿는데는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없었지만 다니엘은 주님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 문제가 생겼지만 그는 여전히 주님만 믿고 있습니다.
결국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짐을 당합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지요.
다리오 왕은 금식까지 하고 그 다음날 다니엘을 찾습니다.
왜 다리오 왕이 이렇게까지 합니까?
그것은 다니엘이 있어야 자신에게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자 굴에서 다니엘은 구원을 받지만 다니엘을 모함한 자들은 사자들의 밥이 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들은 설교 서두에서 일곱 때가 지나는 동안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한번 보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일곱 때라는 것은 짐승이 다스리는 시대로서 성도는 그 가운데 밥을 먹고 살면서 오직 주님만을 믿는 삶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자리에 넘겨집니다.
그러나 주님의 약속대로 성도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l
주님께서는 성도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시고, 그 악한 자들은 심판하십니다.
다니엘은 세상에서 떠나 따로 살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주는 그 관직을 그대로 갖고 삽니다.
이런 모습은 믿음 없는 자의 모습과 동일합니다.
그러나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철저히 그는 주님만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믿음 없는 자는 철저히 자신의 야망, 이익을 위해 살아갑니다.
이런 중에 주님만 의지하는 성도는 고난을 받게 됩니다.
어떤 식으로 고난을 받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 모습이야 얼마나 다양하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절망이 아닙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오히려 성도이겐 기쁨이며 감사의 이유입니다.
성도가 이 땅을 살면서 고난 받고 그 고난 받고 죽음의 자리에 넘기우는 것이 성도에게 기쁨이고 감사의 이유인 것을 우리들은 오늘 본문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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