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름
다니엘 9:1-27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로 잡혀가게 하셨고, 70년이 지난 후 왜 포로에서 다시 놓이게 하시는가?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한번 던져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 19절에서 그 답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의 이름” 을 증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주의 이름을 증거하시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또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간 것은 그들의 죄악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면 이것도 역시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범죄함도 역시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함의 도구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주의 이름을 우리들에게 증거하시는가?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의 이름을 증거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다니엘이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면서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본문을 보면서 생각하기에 그 언약이야 뭐 약속이 아니겠는가?
예레미아 선지자에게 약속했던 그 약속이 아니겠는가 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언약이란 그런 단순한 약속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언약을 성경에서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은 창세기 6장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그 언약은 왜 세워집니까?
창세기6:5-6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결국 여호와께서는 이들을 심판하실 것을 결정하십니다.
이런 중에 하나님께서는 노아라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셨고, 그와 언약을 세우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언약이 세워지는 바탕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죄악이 관영해서 심판하시겠다는 결정을 내리신 상황에서 언약이 세워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누구와 언약을 세우십니까?
노아와 언약을 세우시지요.
그런데 노아는 홍수심판 후 방주에서 내려 정결한 짐승과 새로 번제를 드립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신이 은혜를 입었고 자신이 괜찮은 인간, 즉 정결한, 거룩한 인간이라면 굳이 정결한 짐승과 새로 번제를 드릴 필요가 있을까요?
노아는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은혜를 입은 것은 결국 자신의 의가 아님을 말입니다.
바로 정결한 짐승과 새로 증거되어지는 분의 피 흘리심을 통해 자신이 은혜를 입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렇게 거룩한 분의 피 흘리심을 통해 언약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언약을 세우셔서 살려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룩한 분의 피 흘리심을 통해 노아는 살림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해 다시 언약이 말씀되어지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언약을 왜 지키시는가?
그것이 바로 다니엘의 기도 속에서 말씀하십니다.
바로 주의 이름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들이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데 한결 쉬워졌습니다.
다니엘이 예레미아의 예언을 깨닫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언약을 근거로 하여 긍휼을 구합니다. 다니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표로 하나님 앞에 죄를 고하고 긍휼을 구합니다.
그러면 이것이 노아언약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바로 희생 제물입니다.
다니엘은 지금 자신이 희생제물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모습니다.
세상에 어느 인간이 자신의 죄를 스스로 깨달을 수 있습니까?
또한 세상에 어느 인간이 남의 죄를 대표하여 기도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하늘로부터 오신 인자 되신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다니엘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의 이름”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주고 계십니다.
왜 그렇게 비약하느냐고 물으신다면 포로기한의 70년을 하나님께서는 70이레로 바꾸어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70년은 장차 주의 이름이 어떤 식으로 증거되어질 것인가를 미리 보여주는 70년입니다.
24절을 보세요.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죄가 끝나고 죄악이 영속되고 영원한 의가 드러나는 때는 오직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주가 되셔서 성령을 보내 주실 때에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70년은 예수님의 주님이심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것입니다.
25-27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한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것입니까?
주의 이름이 증거되어지는 과정이 반드시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곤란한 지경에 놓여 있지만 예루살렘은 중건됩니다. 그러나 그 중건은 결국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입니다. 이와 함께 다른 왕이 와서 성소와 성읍을 훼파합니다. 끝날까지 전쟁은 있습니다. 이 왕은 자신이 만유의 주재이신 주님을 대적하고 세상의 주인 행세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도 결국 끝장납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주의 이름은 증거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70이레를 너무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있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이 70이레를 해석하려면 다니엘의 기도와 연관해서 해석해야 합니다.
기름 부음 받은 자의 끊어짐은 결국 자기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는 끊어짐입니다.
그러나 기름부음 받은 자, 곧 메시아 되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어 주가 되셔서 온 만유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이런 중에 전쟁, 즉 영적 전쟁은 예수님께서 재림 하실 때 까지 지속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악한 자의 힘이 너무나 강력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힘이 강해도 별수 없습니다.
주님되신 예수님에 의해 멸망당합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이루십니다.
이렇게 언약을 이루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만 천하에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가 구원을 얻은 것은 결코 성도 개인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너 이제 천국 왔으니 니 마음대로 살아라고 하시기 위해서 구원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많은 자칭 성도라고 하는 자들이 구원을 자신을 위한 구원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도의 구원은 언약을 이루심 속에 포함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성도는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죄용서함을 받아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다니엘은 지금 자신의 개인적인 구원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온 몸으로 그 시대를 살면서 주의 이름을 증거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의 기도조차도 사욕을 품고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주의 이름을 위해 여러분을 부르셨다고 믿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러분들의 사욕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시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탐욕이 가득 담은 채로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이것은 언약을 이루심과 전혀 상관없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주의 이름과 상관없는 성도입니다.
그러니 성도가 아니지요.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