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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8

푸른 섬 2008. 9. 10. 10:55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고린도후서4:1-6

사람은 언제 낙심을 하게 됩니까? 여러분들은 언제 절망하고 좌절하며 슬픔에 잠기게 됩니까?

이 땅에 사는 인간들, 즉 죄인들은 항상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두기 때문에, 자신의 바라는 바를 이루지 못할 때 낙심합니다.


또한 자신이 소망하는 바를 이루지 못할 때 절망을 하게 됩니다.


어떤 경우는 자신은 성심을 다해 봉사하고 일했는데 남이 알아주지 않을 때 낙심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경우에 절망하고 낙심합니까?

성도에게도 분명 이런 마음이 들 경우, 환경을 만나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서는  사사로운 개인사의 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생각해 보면 성도에게 이런 낙심의 위험이 항상 들이닥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성도를 넘어뜨리려고 우는 사자와 같이 덤벼들려고 합니다.

낙심이라는 것을 가져다주어서 결국 참 소망을 잃어버리게 만들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바울은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직분이란 의의 직분, 즉 영광의 직분, 생명을 전해 주는 직분입니다.


그런데 이 직분을 어떻게 받았습니까?

긍휼하심을 입었기 때문에 이 직분을 받은 것입니다.


바울이 본래 어떤 자였습니까?

예수님을 자를 잡아 가두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뿐만 아닙니다. 율법대로 사는 자라고 자처하면서 살아가는 자였습니다.

십일조도 잘하고, 구제도 잘하고, 금식도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긍휼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보기에 좀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 자를 잡아 옥에 넘기고,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 사람이 긍휼을 입었다면 그런 대로 이해가 갈 내용입니다. 그런데 십일조도 잘하고 구제도 잘하고, 금식도 잘하고, 십계명도 지키는 사람이 긍휼을 입었다는 것이 이해가 가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단순하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하, 그래 십계명도 잘 지키고, 십일조도 잘하고, 구제도 잘하고, 금식도 잘하는 것에 대해서는 긍휼을 입을 것이 없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를 옥에 넘기고, 죽이는 일에 대해서는 긍휼을 입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사실 바리새인들이니 율법사들이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율법을 준행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십일조도 제대로 하였고, 안식일도 제대로 지켰고, 구제도 제대로 했고, 기도도 남들 보기에 모범이 될 정도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들을 향해 욕할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세리나 창기와 같은 자는 감히 접근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거룩해 보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너희는 죄인이라고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성경에 그 구절이 어디에 나오느냐고 물으실 터인데, 사복음서 전체가 그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병자들을 고치시면서, 아니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면서, 아니면 자신의 제자가 되려고 하는 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산상설교를 말씀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을 누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까?


그것은 이방인들만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주동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율법을 생명과 같이 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겐 예수님이 눈의 가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자신의 행위들을 깡그리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지금까지 지켜온 하나님의 말씀,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까?


여러분들 생각에는 어떻습니까?

교회에 출석 잘하고, 헌금 잘하고, 기도 열심히 하고, 금식도 자주 하고, 구제도 잘하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들이 무슨 죄인입니까?


이들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뿐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감을 잡으셨을 것입니다.

이들은 믿음이 필요 없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될 경우 바리새인과 같은 쪽에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을 믿기에 지금 그 말씀대로 순종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하나님을 믿기에 그 말씀대로 순종한다는 말은 결국 믿을 것은 자신의 행위, 믿음에 대한 의지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 참된 표적은 이들에겐 죄가 드러나는 정점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들에게 능력만 주시든가, 아니면 새로운 가르침, 무엇인가를 행할 수 있는 그러한 가르침을 주시면 되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깡그리 무시하고, 너희는 죄인중의 괴수들이다라고는 말하지 말고, 적절하고 우리의 마음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지요.

모세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준 율법이란 사실 인간이 죄로 인해 가입된 것입니다. 죄를 더욱 죄 되게 드러나게 하는 것이 모세가 준 율법인데 이것을 지키려고 덤벼들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십자가의 영이 없이 성경을 보게 되면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 없이 되는 것입니다.

민수기 11장31-34절을 보겠습니다.

“바람이 여호와에게로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 곁 이편 저편 곧 진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쯤에 내리게 한지라 백성이 일어나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십 호멜이라 그들이 자기를 위하여 직 사면에 펴 두었더라 고기가 아직 잇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기브룻 핫다아와라 칭하였으니 탐욕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


하나님의 긍휼,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속받은 후 이들은 다시 옛날 애굽에 있을 때를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는 것이지요.

마음껏 고기를 먹었을 있었다는 것입니다.

탐욕을 마음껏 부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생활이 무어거리 재미있겠습니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만나 밖에 없다고 불평합니다.


만나도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긍휼로 베풀어 주신 것이지요. 그런데 이들은 이런 것을 잊어버리고 다시 탐욕을 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본문을 보면서 우리는 무슨 생각이 듭니까?

그래 과거를 기억하고 이제는 탐욕을 부리지 말아야지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의 성경해석이 그렇습니다.

왜 우리 조상들이 광야에서 멸망당했는가? 그것은 말씀을 순종하지 않아서이다.

보아라. 민수기 11장만 보더라도 그렇지 않는가?


그래 이제는 우리들이 탐욕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

이런 결론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이런 결론이 왜 나오게 됩니까?

그것은 살기 위해서입니다.

망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5:3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마음속 근본을 읽고 계셨습니다.


이들은 절망이 생기지 않게, 이 세상에서의 삶이 낙심되지 않기 위해서는, 희망이 있기 위해서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향해 죄인이라 하시고 자신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너희를 살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말씀을 누가 듣고 순종하겠습니까?

이 땅에 사는 인간 중에는 이럴 인간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절망할 바에야, 낙심 할 바에야 너 같은 놈 죽여 버리자 라고 한 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 땅의 죄인들은 희망을 먹고 삽니다.

낙심이란 참으로 싫은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낙심치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들 보기에는 바울이 충분히 낙심할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사도가 되었는데,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뭐 그리 낙심할 문제까지 되느냐라고 하실지 모르지만,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확신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무리 확신을 가지고 전해도 상대방은 들은 체도 하지 않는다고 해 보세요.

뭐, 원래 그런 사람들인데 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조차 여러분이 전하는 복음에 대해서 의문을 갖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낙심하지 않겠습니까?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여러분을 인정해줄 만한 예수 믿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렵다고 해 보세요. 절망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주님의 긍휼을 몸에 담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그 긍휼하심에 풍덩 빠져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긍휼하심이 자신에게 어떻게 덮쳐 왔는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십자가의 긍휼로 사도가 되었고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는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가운데 행하지 아니한다고 말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숨은 부끄러운 일은 무엇이고, 궤휼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울이 어떤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숨은 부끄러운 일이란 무슨 음탕한 생각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궤휼가운데 행하지 아니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이 말의 의미는, 율법을 지키는 것, 즉 인간의 행위를 내세우는 것을 말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물론 음탕한 생각도 인간의 행위를 내세우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의 의미는 그렇게 보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행위, 율법 준수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는 것은 모세의 수건을 얼굴에 쓰고 말씀을 전하고 어떨 때는 모세의 수건을 벗고 말씀을 전하는 태도입니다.


바울은 진리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즉 진리 되신 예수님입니다.

요한복음8:32절을 보게 되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십니다.

즉 진리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너희를 죄에서 자유케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지금 십자가의 도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바울이 고린도 전서1:23절에서 말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어떤 사람들은 이 진리를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들은 여전히 모세의 수건을 쓰고 성경을 보려고 합니다.

율법에 매여 있습니다. 자신의 행위에 매여 있습니다.


왜 그런가. 그것은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데 율법에 매여 있는 자들, 즉 행위에 매여 있는 자들의 형편이 지금 이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인데, 이들은 십자가지신 예수님을 자꾸 옆으로 빼돌리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옆에 살짝 돌려놓고 자꾸 직접 하나님과 대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딱 못을 박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전하는 것은 오직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그 이어 한 말, 즉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한다는  것은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이 말이나 앞서한 말이나 동일한 말이라고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만일 예수님을 위하여 종이 되지 않고 주관자가 된다면 결국 증거하는 것은 증거자 자신밖에 되지 않습니까?

즉 자신이 주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만드는 행위입니다.


그러니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어떻게 돌아갑니까?

어느 교회이든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은 잘도 접합니다.

그런데 목사든, 장로든 집사든, 이들은 어떤 모습을 가집니까?

교회에서 주관자가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종이 될 마음이 별로 없습니다.

섬김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높임을 받으려고 하는 심보를, 탐욕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나를 인정하고 높여주겠지라고 말입니다.

이제 결론 맺겠습니다.

우리는 본래 어둠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긍휼을 입었습니다.


긍휼을 입은 자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긍휼하심을 입은대로 자신의 행위를 내세우지 않고, 오직 순전하고 십자가의 은혜만 바라보고 사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러니 낙심이 있을 수 없겠지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절망적이고 소망이 없어 보인다 할지라도 긍휼하심을 담고 살아가는 자는 참된 소망이  있는 자요, 참 빛이신 주님의 빛,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받은 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