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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9

푸른 섬 2008. 9. 10. 10:55

죽음에 넘기우는 성도

고린도 후서4:7-11

만일에 어떤 사람이 자신의 손가락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있다고 합시다.

그 다이아몬드 반지는 수억이 간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이 반지를 끼고 다닐 때와 반지를 끼고 다니지 않을 때의 행동이 어떻게 다를까요?


옷도 만찬가지입니다.

온 한 벌이 수백만 원, 수천만 한다고 합시다.

이런 값비싼 옷을 입고 다닌다면 그 사람의 행동이 어떨까요?


매우 조심스럽지 않겠습니까?

혹 다이아몬드 반지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옷에 얼룩이 묻지 않을까, 옷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자신에게 이렇게 값비싼 것들을 해서 다닐 경우에는 일상생활하기에 매우 부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떨까요?

매우 의시대거나 자랑하고픈 마음이 속에서 나오지 않을까요?


내가 이렇게 부자다고 외치고 싶지 않을까요?


한국은 자동차로 그 사람의 지위나, 부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이곳도 마찬가지지요.


그저께 어디를 갖다 오는데, 고속도로 상에서 멋진 차가 달리고 있었습니다.

저 차 가격이 얼마정도 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는 말이 한 7천,8천만원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저께 한국뉴스를 보니 6억인가, 7억짜리 자동차를 판매한다고 나오더라고요.

이런 값비싼 차도 수십대는 팔린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값비싼 차나, 옷이나 액세서리를 하려고 할까요?

그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잘 살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어서이지요.


편리하기 위해서 옷도 입고, 차를 구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예쁘게 보이기 위해서 반지를 구입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과 비교할 때 내가 이렇게 잘 산다, 나도 그래도 이 정도는 된다는 것을 나타나고 싶어서입니다.


여자들이 이런 경우가 많지요.

결혼하게 될 경우에, 반지를 값비싼 것을 하고 싶어 한다든가, 집의 가구들을 아주 비싼 것들을 하고 싶어 하지요.


물론 시집되는 쪽에서도 이런 것들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이혼하는 경우도 있고요.


이렇게 요구하고, 이런 것들을 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집은 적어도 이 정도는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통해 남과 비교하면서 쾌감을, 즐거움을, 인생의 낙을 느낍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생각합니다. 내가 이렇게 고귀한 사람이다라고 말입니다.


고귀함의 기준이 돈을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로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예의도 갖춰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예의를 잘 갖춘 사람이라 할지라도 돈이 없으면 그 사람은 고귀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실 가난한 사람이 자신을 아주 고귀한 사람이라고 느낍니까?

자신의 몸이 그렇게 귀한 존재라고 느낍니까?


이렇듯 이 땅에 살아가는 죄인들은 돈을 얼마만큼 가졌느냐로 자신의 가치가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돈이 없으면 자신의 아무것도 아니요, 배설물보다 더 못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돈만 많으면, 있으면, 떳떳하고, 당당하고, 큰소리치고, 남한테 꿀릴 것이 없는 그런 모습을 보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모습이야 말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그러한 태도입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들 중 그 주동자들이 누구입니까?

물론 모두가 주동자라고 볼 수 있지만, 가룟유다를 생각해 보면 그는 은 삼십 냥에 예수님을 팔아 버렸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 제사장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현 상태, 현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예수님을 죽이려고 결정을 내립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강생하셨을 때에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두 살 아래 아이들을 다 죽인 사실은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지위, 돈, 이것이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 주기 때문에 이런 것이 없어지면 자신은 정말 쓸데없고, 가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어떨까요?

바울의 모습을 한번 봅시다.


사람들이 보기에 바울은 정말 고귀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보였을까요. 아니면 참으로 불쌍하고, 천한 그런 인생으로 보였을까요?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바울은 참으로 고귀하고 괜찮은 인간으로 보였습니까?

사람들이 존경할 만한 그러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그 인생이 불쌍한 인생이 되어 버렸습니다.

거지처럼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형제들의 헌금을 통해 생활을 하게 되고, 매도 맞고, 굶주리고, 헐벗고, 옥에 갇히고.

우리도 생각하기 싫은 그런 모습, 꺼리는 그런 모습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왜 그렇게 미움을 받고, 쫓겨 다니는지.

답답한 일은 얼마나 자주 당하는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이런 일은 겪지 않아도 되는데.


바울의 모습은 우리가 정말 싫어하는 그런 모습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4:7)


보배란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질그릇에 가졌다고 합니다.

즉 우리가 질그릇이라는 것입니다.


질그릇이란 볼품없는 고귀하지 않는 그릇이지요.

금그릇 정도 되어야 고귀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질그릇도 어떤 장인이 만들면 고귀한 그릇이 될지 모르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존재, 성도를 질그릇과 같은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 이유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값비싼 다이아몬드나, 값비싼 차량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가치 없는 존재인가를 생각지 않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인간인가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정말 고귀하신 분, 값비싼 분, 어떻게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보배이신 예수님을 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귀하시고, 귀하신  주님께선 우리의 존재를 참으로 가치 없게 보이는, 천박해 보이는 모습으로 만드셨습니다.


여러분 기분 나쁘기 않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고귀하고, 존경할 만한 존재로 만드시지 왜 그렇게 멸시받고, 천대받을 만한 존재로 만드셨는가라고 말입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한가지 입니다.

능력의 심히 큰 것이 주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땅에서 성도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사람들로부터는 멸시 받고, 무시당하고, 미움 받는 모습, 전혀 본받고 싶지 않는 그런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니 누가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겠습니까?


예수님을 믿게 되면 무언가 고상해 보이고, 존경해 볼 만한 그런 모습이어야 하는데, 이는 노상 사람들의 입에 조롱거리고, 심심풀이 땅콩 정도로 여겨지니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런 성도의 모습을 살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오직 능력은 십자가 지신 주님께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가를 알게 하기 위해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질그릇 같은 인생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답답한 모습, 가치없는 모습, 연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도의 입에서는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8절부터 봅시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바울을 볼 때 미친놈이라 하지 않겠습니까?

우겨쌈을 당했는데 자신은 싸이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여러분 돈이 없는데, 가난한데, 자신은 가난하지 않다고 해 보세요.


그걸 믿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하, 저 사람은 그냥 스스로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저렇게 말하는 구나라고 생각지 않겠습니까?

답답한 일을 당해 정말 낙심할 만한데 낙심치 않습니다.

핍박을 받지만 주님으로부터는 결코 버림을 받지 않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미움 받고 핍박을 받아 버림을 받은 인생이라 여겨지지만 주님으로부터는 결코 버림을 받은 인생이 아닙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이런 말을 들을 때 이해가 갈까요?

저런 미친놈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제가 지금까지 여러분들에게 이런 말씀을 전했습니다.

십자가만 믿읍시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혹시 이런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십자가가 밥이 나오나 떡이 나오나, 그것이 무슨 능력이 되나. 돈을 벌어야지, 돈이 능력이고 힘이지.


십자가는 그냥 외침일 뿐이요, 그것이 능력이 된다는 것은 이 땅 이야기가 아니라 저 땅 이야기고, 이 땅에서의 능력은 오직 한 가지, 돈 밖에 없다라고 생각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히려 우리들을 자꾸 연약한 존재로, 힘이 없는 존재로 세워나가십니다.

이것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난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정말 불쌍해 보이는 존재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주님께선 우리에겐 능력이 없고, 오직 십자가 지신 주님만이 능력 있음을 이 땅에서 알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돈이 능력이요, 건강이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결코 십자가의 능력에 대해서는 능력이라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10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의 죽음을 항상 자신의 몸에서 반복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것, 없어지는 것, 이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항상 없어지는, 죽음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렇게 살아감으로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성도란 결국 이런 모습을 보입니다.

함께 11절을 읽어 봅시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주님께서는 주님의 피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습니까?

그런데 영생을 주셔놓고  이 땅에서는 우리를 항상 죽음에 넘기우십니다.

우리를 죽을 육체임을 날마다 절감하게 하십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를 통해 증거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생명의 빛을 우리에게 던져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정말 귀한 존재, 고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왜 이렇게 성도를 귀한 존재를 만드셨을까요?

그것은 생명을 주신 주님,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이 땅에서는 고귀한 존재의 모습이 아니라, 참으로 답답한 인생, 불쌍한 인생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빛을 주신 것은 ‘그래 너희들 영생 얻었으니 이제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아라’ 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너희들 보배를 가졌으니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면서 살아라고 보배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 보배가 제대로 드러나려며, 어떻게 되어야 하겠습니까?

자신은 보배가 아니어야 하고, 이 보배가 더욱더 진가를 발하려면 철저하고 그 보배와 대조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으로 모습이야 말로 보배를 정말 보배답게 보여 주는 모습니다.

자살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 때문에 성도는 이런 길을 걷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보배를 가졌는데, 그 사람의 실제 모습은 어떻습니까?


두 가지의 모습을 보입니다.

한 종류는 그냥 보배를 받았던 받지 않았던 상관없이 이 세상 인생처럼,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지 않고 살아가는 자칭 성도라고 하는 자들입니다.


또 한 부류는 어떻습니까?

자신이 보배를 받았으니 교회 안에서 자신이 존경을 받고 높임을 받으려고 하는 모습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믿는 주님과 상관없는 자들입니다. 이런 인간은 값비싼 옷을 입고,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 좋은 차를 타고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 그런 인생과 같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선 보배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보배를 더욱 빛내시기 위해 우리를 죽음 가운데로 몰아가실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능력은 오직 십자가 지신 주님께 있음을 알아가게 하시고, 주님을 증거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의 기도제목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