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마음
고린도 후서4:12-18
믿음의 생활이란 어떤 것일까요?
즉 예수님을 믿는 삶이란 어떤 삶 일까요?
12절에서 주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우리는 무슨 생각이 떠 오릅니까?
예수님께서 명하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떠오르지요.
바울은 지금 그 말씀을 온 몸으로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 자신이 희생하여 남을 살리는 것이 과연 예수님께서 명하신 이웃 사랑인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렇게 사는 사람이 어디 이 세상에 한 둘이겠습니까?
그러면 이들이 모두가 다 주님의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일까요?
이것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그렇게 살아간다면 그것이 이웃사랑, 즉 믿음의 삶일까요?
우리는 이런 삶이 믿음의 삶이 아님을 단호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실상 믿음이라는 것은 사람의 온 몸으로 나타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몸에서 어떤 행위, 남을 돕는 행위, 자기를 희생하는 행위가 나왔다고 해서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하기는 곤란합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히브리서11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자신의 몸을 통해 보여 주는 자가 참 믿음이 있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너무나 쉽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사 주가 되셨습니다.
이제 주님되신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자는 이 주님의 지시를 받고 삶을 살아갑니다.
따라서 이런 성도의 삶은, 그 삶을 통해 만유의 주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는 자로, 증인으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분, 사람들이 무시하는 그 분을 위해 일생을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 중 한 사람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입니다.
죽음이 항상 자신들, 즉 바울 일행들 안에서 역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한다고 말합니다.
무엇 때문에 죽음이 자기들 가운에서 역사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위하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너희 안에서 라는 표현에서 이것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 만이라고 생각지 않기를 바랍니다. 물론 편지가 고린도 교회에서 보내는 편지이기 때문에 그렇게 볼 수 있지만, 이것을 우리들을 일반화 시켜야 합니다.
바울이 왜 죽음에 넘기운다고 합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위해 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을 위해 살았습니까?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전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생겼고 이들은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전함으로 말미암아 바울 일행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로부터 핍박과 미움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12절에서 하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시편 116편10절을 인용하면서 자신도 믿는 고로 이렇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함께 시편 116편을 잠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만을 믿는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죽음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음을 말하면서 결국 성도의 죽음 조차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고 계심을 믿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여호와께서 주신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물론 이러한 믿음은 그가 죽음에서 벗어났을 때에도 여전히 그 믿음을 사람들에게 보여줍니다.
바울은 이런 시편을 인용하면서 지금 자신의 상황이 이런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에 직면한 상황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시편 116편을 이런 식으로 해석해 냅니다. 즉 116편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고린도 후서 4:14,15절입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성도의 죽음이 왜 귀합니까?
그럼 성도가 왜 죽음에 넘기웁니까?
그것은 믿음 때문입니다.
그러면 죽음이 왜 귀합니까? 그것은 이 죽음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널리 전파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믿음 있는 자란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는 자가 믿음 있는 자입니다.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시는 분이 주님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만일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이런 믿음이 없으면 그 사람은 가짜 믿음입니다.
시편 116편 8.9절을 좋아하겠지요.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도다 내가 생존 세계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아마 이 본문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여, 이 세상에서 어떤 죽음의 위기나, 슬픔이나 넘어짐에서 여호와께서 건져 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서 낙을 누릴 것을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에겐 환난이라 슬픔이나 죽음의 위기란 그저 스쳐가는 바람이라 간주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항상 죽음에 넘기운다고 말합니다.
디모데 후서3:12절을 보게 되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경건하게 산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경건하게 산다는 것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이들이 믿는 것은 이 땅의 돈이나 명예나 권세가 아닙니다.
오직 죽음에서 부활하시어 주가 되신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싫어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사람들이 싫어합니까?
그것은 자신들이 좋아하고 기뻐하는 것을 예수님 쪽에서는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것이 죄라고 지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 허상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당연히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이 이들이 평소 갖고 있는 믿음인데 이와 전혀 다르게 예수님의 복음이 다가가니 거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부할 뿐 아니라 미워하고 핍박을 가합니다.
오늘날 교회를 보면 그렇습니다.
교회가 더욱더 부하게 되어 가고 있습니다.
물론 부하게 되어가는 것이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신봉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부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실 성도는 이미 축복을 다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복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 즉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믿음을 축복이라고 간주하고 싫어합니다.
그것도 축복은 축복입니다. 그러나 그 축복이 이 세상에서 나타나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가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는 진정 믿음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역지가 없다고 해 봅시다.
수년을 사역지가 없이 논다고 가정해 봅시다.
물론 주님보시기에는 노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 없는 자들이 보기엔 늘 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를 향해 어떻게 말할까요?
예수님을 믿는다면 왜 저렇게 살까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왜 길을 열어주시지 않을까라고 비웃지 않겠습니까?
성도라고 해 봅시다.
그 사람의 사업을 한다고 했을때 망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하나님께서 다시 성공시켜 주실것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계속해서 어렵다고 할 때 결국 사람들은 그를 향해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왜 저럴까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저 사람은 믿음에 문제가 있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게 이 땅에서 통하는 믿음의 상식입니다.
여러분의 부모님들이 다 계시지요.
그런데 여러분들의 경제생활이 나아지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 간주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이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 동일하게 하는 고백입니다.
15절을 보게 되면 “모든 것은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게 되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지 모릅니다.
그래 복음 전하는 자는 고생을 죽도록 하지만 복음을 듣는 자들은 은혜로 인해 감사함이 넘친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 은혜와 감사함은, 이 땅에서 그럴듯하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큰 잘못입니다.
이런 은혜는 없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바울의 삶을 반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영이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 계속해서 환난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잠시 받는 환난이라고 합니다.
무엇과 비교할 때 그렇습니까?
영원과 비교할 때 그렇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자의 고백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결코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지요.
그래서 1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이런 고백을 하며 살아가는 자가 참된 성도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자의 모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고백을 하는 성도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