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두려운가?
고린도후서5:1-10
사람이 진정 무엇을 두려워하고 살아가는가가 중요합니다.
사람은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들로 인해 결국 그거에 굴복하게 됩니다.
그 두려운 것에 매여 일평생 종노릇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히브리서2: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은 죽음을 그렇게 두려워할까요?
사람이 처음 만들어 졌을 때 죽음이라는 것이 생소했을까요. 아니면 익숙한 것이었을까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죄를 범하기 전에는 결코 두려움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말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나 짐승들이나 어떤 것 앞에서도 두려움이라는 것이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들은 두려움을 아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창세기3:10절을 보세요.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이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창2:17).
아담과 하와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은 이들이 죽음에 직면한 존재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선악과를 따먹은 후 자신들이 벗었음을 알게 되었고, 이것은 곧 죽음 앞에 자신들이 서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급히 취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역어서 입었습니다.
이들은 이렇게 행동함으로 말미암아 죽음에서 벗어날 줄로 생각했습니다.
이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의 눈을 피해버리면 자신들이 두려움에서 벗어날 줄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치마를 해 입든, 숨든지 이들은 여전히 죽음의 공포 속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숨기고 감추고, 덧입어서, 이런 공포를 물리쳐 보려고 합니다.
창세기 11장1-9절을 보면 인간들이 바벨탑을 쌓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들이 왜 바벨탑을 쌓으려고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어떻게 하시지 못하게 하려고 자신들의 힘을 함께 모아 보자는 것입니다.
창11:4절을 보세요.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대적합니다.
창세기 11:4절에서 나오는 인간들의 단합된 말의 내용은 창세기 1:28절에서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말씀과 정면으로 위배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아담이 죄를 범한 후 사람들은 흩어지면 죽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죽음의 공포가 그들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들에겐 하나님의 축복이 축복으로 들려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을 죽음의 자리로 몰아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사력을 다해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오늘을 사는 인간들은 어떻습니까?
당연히 성경말씀과 일치하겠지요.
사람들이 왜 자꾸 돈을 끌어 모으려고 하고, 아들을 낳으려고 하고, 사업을 더욱더 번창하게 하려고 할까요? 그것은 죽음이 두렵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들은 무언가에 쫓기고 있고, 압박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런 것들을 떨쳐 버리려고 더 많이 더 많이 모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이 두려움 속에 사로 잡혀 있습니까?
그것은 첫째 아담이 죄를 범한 후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자가 마귀가 되었습니다.
마귀의 종이 되다 보니 마귀가 자꾸 인간들을 부추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죄인들은 자꾸 하나님과 한판 붙어 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조장해 내신 그 두려움을 완전히 깨부수자는 것입니다.
이 일이 되던 되지 않던 말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지 못하고, 그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 하면서 그 하나님과 한판 승부를 벌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땅에 있는 장막집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이유로 인해 장막집이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발악을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 하게도 예수님을 믿는 자를 핍박할 때에는 이 장막 집을 없애려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예수님을 믿는 자도 두려워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신약의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죽음으로 이들을 위협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공포, 죽음의 공포를 없애 버리려고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만 없으면 자신들의 세상, 죽음의 공포가 없는 세상이 될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한다고 해서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참으로 딴 세상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는 인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한다고 합니다.
죽는 것이 소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이야 말로 죽을 것이 생명에서 삼키우는 순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바울은 한 가지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습니다.
죽는 것이 소망은 소망인데 죽음이 이 땅의 인간들에게 허무하게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바울 일행이 사지로 자꾸 몰려가는 것을 볼 때에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별수 없구나 생각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야 말로 생명에게 삼키우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인간의 노력과 애씀, 죽음으로 달려가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항상 담대하게 살아갑니다. 죽음의 자리로 몰아붙이우면서 말입니다.
이런 가운데 성도는 무엇을 인식하고 살아갑니까?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한다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이런 가운데 성도가 이 땅에서 사는 삶은 믿음으로 사는 삶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붙들고 사는 자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믿고 살아간다면 바울의 모습이야 말로 참으로 믿음 없는 자가 됩니다.
여러분 성도는 믿음으로 행하며 사는 자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는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눈에 보이는 것 중의 하나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몸입니다. 이 몸을 위해 온갖 노력과 정성을 기울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습니다. 두려움을 없애는 방법입니다. 죽음으로 두려움을 없애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에겐 죽음이라는 것이 오히려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는 일임을 아는 자입니다.
장막에 있을 때에 성도도 여전히 짐 진 것 같이 탄식을 합니다.
왜 탄식을 합니까?
그것은 빨리 육신을 벗어 던져버리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고난이 빨리 끝나버렸으면 하는 바람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죽을 것이 생명에서 삼키우기를 바램에서 하는 탄식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성도의 유일한 소망이기에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8절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실제로 우리는 이 땅에서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주님과 함께 살지 않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보기에 헛짓하는 것이라 생각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도는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사실 하나 있습니다.
성도가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글자 그대로 유일한 소망이 되어 버리면 어떤 결과가 초래 될까요?
모두가 다 빨리 죽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것이 아닙니다.
성도가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살아 있든지, 죽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 되지 못할 경우,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과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결코 그럴 수 없지요.
믿음이 없이 어떻게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바울은 10절을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 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성도는 믿음으로 산 자입니다.
심판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주님되신 예수님을 믿고 살았느냐 아니면 믿지 않고 살았느냐가 그 기준이 아닙니까?
주님을 믿고 산 자들은 자신의 몸으로 그 믿음, 즉 주님을 증거하면서 살았습니다.
죽음에 넘기우면서도 늘 믿음으로 산 자야 말로 생명의 부활에 참여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10절을 오해할까 싶어서 한 말씀 더 드립니다.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는다는 표현을 두고 인간들은 또 믿음으로 생각지 않고 행위, 즉 눈에 보이는 것으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바울이 한 말이 믿음에 대한 이야기 였음을 깜빡 잊어버린 자들이지요.
5절을 보면 성령을 보증으로 우리에게 주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제발 여러분 믿음으로 사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