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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12

푸른 섬 2008. 9. 10. 10:57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시도다.

고린도 후서 5:11-21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산다는 것은 이 땅에서 어떤 식으로 나타날까요?

제가 어느 인터넷 홈페이지를 보았는데, 그곳에 이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자신과 친구가 대화를 하는 중에 믿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행함이 없는 믿음이란 있을 수 있느냐라고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질문을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행함을 믿음으로 해석할 수 있고, 행함을 행함 자체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행함을 믿음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아니라 자신의 애씀과 노력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나 행함을 믿음으로 해석할 경우엔 그로부터 나오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주되심만 증거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주님을 믿고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한번 보겠습니다.


11절에서 바울은 주의 두려우심을 안다고 합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 성도가 살아가는 삶의 기본적이 태도입니다.

성도는 진정으로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를 아는 자입니다.


지난 주 말씀드린바와 같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는 성도라 볼 수 없습니다.


왜 이렇게 제가 단정적으로 말씀드리는고 하면 성경 말씀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0:28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은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는 자들은 무엇을 두려워합니까?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는 분이 아니라 이 썩을 것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 공허하게 들립니까?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몸을 죽이려는 자를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직접 이러한 일에 부딪힌다면 과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자꾸 믿음 없이 생각하니 이런 두려움 속에 사로잡혀 버립니다.


마태복음 10장 20절을 보게 되면 핍박과 죽음 가운데서도 성령님께서 말할 바를 말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7장에서 스데반이 죽음 앞에서도 주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볼 때에 스데반이 대단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사실 이미 주님 되신 예수님께서 이 모든 사실에 대해서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니 성도는 조급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 되신 예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도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이미 주님께서는 누가 믿음이 있는 자인지 없는 자인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주님을 두려워하는 모습이 이 땅에서 어떤 식으로 드러나는가를 살펴봅시다.

물론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의 한 면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13-15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관심이 오직 한군데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엔 너무나 꽉 막힌 사람입니다.

융통성이 조금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보기에 얼마나 답답한 인생이며, 불쌍하게 보이는 인생일까요?


미쳐도, 정신이 온전하여도 모두가 다 주님을 위하여 그렇다는 것입니다.

13절에서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 이것은 같은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너희가 도대체 누구들입니까?

성도들입니다. 

주님의 피로 사신 자들입니다.


그러니 이들을 위한 것은 곧 주님을 위한 것입니다.


이 내용은 조금 있으면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시기 때문에 미쳐도 주님을 위해, 정신이 온전하여도 주님을 위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성도에겐 항상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저가 모든 사람을 위해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이 죽으심의 의미는 성도에겐 동일한 죽음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이미 성도는 죽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산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이제 살아가고 있다면 그 삶은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대신 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신 분을 위해 사는 인생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런 식으로 곡해해 왔습니다.


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 사랑.

아주 이기적인 사랑을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은 우리 자신을 결국 죽은 자로 간주하십니다. 그리고 오직 살아가는 이유를 주님을 위해 사는 것으로 보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주 단정적으로 말해 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모든 것을 육체대로 보지 않고 믿음으로만 보고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다 새로운 피조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이 없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러니 원래 피조물들이 갖고 있는 사고방식, 즉 눈에 보이는 대로 살아가는 자가 아닙니다.


이렇게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은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새로운 피조물의 역할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화목제물 되심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사람들의 핍박과 미움 속에 사는 것이 곧 예수님의 화목제물 되심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하심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물론 고린도 교회 성도들로부터 불신을 받는 것도 다 화목제물 되신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들의 화목케 하는 직책을 사용하여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고민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한다고 화목 되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결국 이 말씀을 듣는 상대는 주님의 택한 백성임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21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도의 존재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강권이 있을 때에는 그의 관심은 오직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로 드러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고 어떻게 되던 다 좋은데 오직 예수님이 주님 되심만 증거되어진다면 괜찮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 마음을 가진 자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 새로운 피조물은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며 살아가는 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살아가는 믿음의 태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