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강해13

푸른 섬 2008. 9. 10. 10:57

 하나님과 함께

고린도 후서6:1-10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듣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힘든 일을 당할 때,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럴 경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는 너무나 개인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집니다.

개인적인 건강이나 재물을 많이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지면 하나님은 절간에 있는 부처나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부처야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인간을 만드신 분을 부처수준으로 알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많은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자들이 이런 식으로 이해를 합니다.


오늘 분문1절을 보게 되면 바울이 자신들이 하는 일은 결코 자신들 독자적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일합니까?

옆에 오셔서 도와주시는 것입니까?


복음을 전할 때 옆에서 힘내라, 힘내라, 이렇게 응원하시는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5장 6절에서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죽음에 직면하면서 항상 몸으로 체험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과 따로 거하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을 믿고 살아가기에 죽음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기대와는 전혀 다른 식으로 이 땅에서 몸 가운데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들의 특징을 이제부터 살펴봅니다.


1절을 보게 되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살아가는 자의 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당장 이런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래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자. 자 보자,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는 것이지. 그러면서 성경을 계속 읽어내려 갑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6장에서는 우리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말씀이 튀어나옵니다.


2절을 보세요.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여러분 이 말씀이 여러분의 기대를 충족시켜 줍니까?


우린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는다는 것은 주님께서 베푸신 구원에 재빠르게 손 내미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2절을 이해하려면 이사야서를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이 구절이 본래 있던 이사야 49장으로 가서 이 말씀의 의미를 먼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8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로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케 하리라”


고린도 후서 6장 2절에서 인용된 것은 메시야 사역, 즉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말씀임을 우리들은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메시야를 통해서 구원,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9,10절을 보세요.

“ 내가 잡혀 있는 자에게 이르기를 나오라 하며 흑암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라 하리라 그들이 길에서 먹겠고 모든 자산에도 그들의 풀밭이 있을 것인즉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니라”


9절을 자세히 보시면 이들은 본래 사로잡혀 있던 자라는 것입니다. 즉 흑암에 놓여 있던 자들이랍니다. 이사야 39장을 보게 되면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갈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문자적으로 이 본문을 보게 되면 바벨론 포로에서 자유케 되는 일이 메시야로부터 되어 진다는 말입니다. 오직 메시야의 긍휼로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본문의 참 의미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한 사건을 사용하셔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소개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죄인들은 항상 그 사건에 눈을 고정하고 그 사건에 온 마음이 빼앗겨 버립니다.

이것은 죄인들의 본성인데, 이런 본성으로 인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성경을 그렇게 잘 알던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죽였습니까?

바로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이런 모습이야 말로 전형적인 긍휼을 입지 못한 자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이 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이들의 상황은 완전히 흑암 속에 갇힌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는 자가 되었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들에게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외쳐도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직접 오셔도 알아  볼  수 없는 소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사야 선지자가 이들을 향해 아무리 외쳐도 알아들을 인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긍휼을 베푸신 것입니다.

메시야를 통해서 말입니다. 물론 이사야 48장에서는 고레서 왕을 말씀하고 있지만 실은 예수님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이 없으면 성경을 보아도 완전히 이해하는 입장에서 성경을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메사야를 통해 흑암에 놓인 자, 갇힌 자, 바벨론 포로된 자, 즉 죄악에 사로잡힌 자,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를 긍휼로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데 어떻게 긍휼을 베푸시는가 이것이 오늘 설교에서 핵심되는 내용입니다.


그냥 긍휼로 구원해 주셨다가 아닙니다.

메시야가 어떤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십니까?

그 내용이 이사야 52장13절에서 53장에 걸쳐 나타나고 있습니다.


긍휼을 베푸시는, 죄에서 자유케 해 주시는 메시야의 꼴이 말이 아닙니다.

이사야 53장 14절을 보세요.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야의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믿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런 몰골을 하고 나타났는데 누가 믿겠느냐는 것입니다.


15절을 보세요.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도저히 믿을 수 없는데, 긍휼로 믿게 된 자들이 왜 메시야가 이런 모습으로 오셔야만 하셨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53장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인간들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주님의 권능이 너무나 희한하게 이 땅에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은혜 베푸심이 인간들이 감히 상상도 못하는 모습으로 이 땅에 나타난 것입니다.

자기백성의 죄를 담당하는 모습으로 메시야가 오신 것입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은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참으로 암담하고, 소망 없던, 인생에게 참 소망이 생긴 것입니다.

바로 잡혀던 자가 놓여지게 된 것입니다.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자가 참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렇게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그러니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말씀의 의미는 우리게 이해하는 것과는 너무나 거리게 먼 의미입니다.


그것은 너희들은 처음부터 은혜를 모르는 자였다. 너희들이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말을 듣는다고 해서 그 말씀을 알아듣고 순종할 수 있는 그런 인간들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본래 그런 자였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긍휼로 너희들을 구원해 주셨고, 은혜를 베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이 구원을 얻지 않았느냐는 말입니다.


2절 하반절에 나오는 말씀도 그렇습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너무나 희망차게 들리는 말씀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이 말씀을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정말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누구에게 해당되느냐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다 해당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오직 택한 백성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택한 자만 예수님을 떠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2절 하반절 말씀이 너무나 희망에 찬 말씀이지만 이 말씀에 해당사항이 되지 못하는 자들은 너무나 절망적인 말씀입니다.


그러나 지금 바울의 편지를 받는 자들이 성도임을 전제할 때에는 이 말씀이 분명 희망적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이 말을 왜 할까요?


그것은 바로 너희들이 과연 성도가 맞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성도라고 하는 자들이 왜 은혜를 헛되이 받는 자의 모습을 띄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무로 돌려 버리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3-10절을 말합니다.

우리 함께 읽어 봅시다.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 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바울이 지금 이렇게 말하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자신들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의 근거를 이렇게 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메시야의 사역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십자가의 고난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말이요, 그 고난을 자신의 온 몸에 담고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어떤 본은 너무 흑백으로 갈라서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말씀하실 지로 모르지만, 주님이 지금 고린도 후서를 통해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