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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14

푸른 섬 2008. 9. 10. 10:58

 마음이 좁아짐

고린도 후서 6:11-18

성도가 성령 안에 살면서도 주님 말씀과 멀리 하며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지난 주 우리가 살펴본 6:1-10절을 간단히 생각해 봅시다.

은혜를 제대로 아는 자란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는 자입니다.


자신이 흑암에 놓여 있었고, 예수님께서 속죄 제물이 되심으로 죄용서함을 받아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입니다.


그러니 이 땅에서의 삶이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과 동일함을 몸으로 체험하면서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거절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은혜를 헛되이 받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과연 어떨 경우에 이런 상황이 발생할까요?


그것은 마음이 좁아 질 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귀에 거슬립니다.


우리도 이럴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언제 입니까?


세상 것이 좋을 때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좋을 때 입니다.


이럴 경우 주님의 말씀이 귀찮아 지고, 말씀이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경우입니다.

우리 하는 말로 양심에 털이 났다고 하지요.

전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에 대해서 철저하게 무시하며 살아갑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으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보는 고린도 후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바울을 통해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하는데, 도무지 잘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이 하는 말이 고깝게 들립니다. 너무 듣기 싫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반대로 이들을 향해 마음이 활짝 열려 있고, 이들에게 속이거나 하는 일이 전혀 없이 자신이 받은 바를 가감 없이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싫어합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다.


그 원인은 그들의 실제 생활가운데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14-16절 상반절까지 봅시다.


다시 함께 읽어 봅시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십자가의 은혜를 무로 돌리는 경우가 바로 이럴 때 발생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사고방식의 경우 발생하는 것입니다.

왜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합니까?

왜 의와 불법이 함께 조화롭게 지내려고 합니까?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서 재미있고, 즐겁게 살아가고자 하는 데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하려면 자신이 갖고 있는 복음을 포기해야 합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숨기지는 않을 지라도 그 예수 믿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도록 상대편에서 인식을 심어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려면 믿지 않는 자들과 함께 놀아야 합니다.

그들의 즐거움에 함께 참여하고, 즐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 안에 살아가는 기쁨은 별 의미가 없어집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오직 눈치 보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눈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결코 성도의 모습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주님의 은혜를 멸시하는 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이 이런 사람의 귀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자꾸 주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고 거부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하는 직장에 다니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과 함께 밥을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된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전서에서 분명 말합니다.


이런 것은 고린도전서 5:10절에서 말했습니다.

결코 세상 밖으로 나가서 살아가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말입니까?

바로 방금 전에 제가 말씀드린 그런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사고 방식 말입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별거 아닌 것이냥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방식 말입니다.


성도란 어떤 자입니까?

지난 주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십자가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큰 은혜를 우습게 여기면서 살아가느냐는 말입니다.


여러분들 어떻습니다.

물건하나 더 팔기 위해서, 아니면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십자가의 복음을 우습게 만들지 않습니까?

믿지 않는 자들에게 잘 보이려고 복음이고 무엇이고 상관없는 자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면 결국 말씀은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필연적입니다.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그 말씀은 귀찮은 말씀이며, 뭐니 뭐니 해도 돈이 최고며,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주일마다 십자가의 은혜 은혜라고 외쳐 보았자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이 즐거움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그것이 돈을 가져다 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들과 동화되어 살아가는 것이 최고가 아니겠습니까?

제 친구 아들 이름이 동화인데, 이름의 뜻은 밝고 밝은 뜻의 의미인데 이 동화란 전혀 다른 의미이지요.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땅에 살아가는 자입니다.

이 자녀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땅에서 그 삶을 살아라고 십자가의 은혜를 베풀었는데, 그 사는 꼴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를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모습이라면 이런 자를 누가 하나님의 자녀라 하겠습니까?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자라 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잘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이 땅을 살아갑니까?


예수님만 믿으면 되지, 우리의 모습이야 어떠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

말은 맞습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죄를 범하는 자로 살아갑니다.

은혜를 멸시하는 자로 살아갑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오늘 본문을 왜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이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목표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다시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자로  살아가는 자가 성도임을 분명히  다시 한번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 자신을 합리화 하는 자가 아니라, 참으로 죽을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기회만 있으면 주님의 은혜를 멸시하는 그런 악한 죄인임을 다시 한번 알게 됩니다.


여러분 참으로 우리는 오늘 말씀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의 긍휼이 아니라면 우리는 구원과 상관없는 자, 지옥불에 떨어져야 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만일 오늘 말씀이 천국백성의 커트라인이라면 우리는 어느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미친 자가 이렇게 오늘 본문을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거룩하게 구별되게 사세요 라고 말입니다.

만일 오늘 본문을 이렇게 보게 된다면 이런 자는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의 성경관과 일치하는 자입니다.

이런 자는 십자가의 은혜를 전하는 자를 조롱하고 멸시하며, 비판할 것입니다.

이런 자가 십자가의 이름으로 십자가를 전하는 자를 핍박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악한 죄인임을 지적받으면서 십자가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알아가는 성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