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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15

푸른 섬 2008. 9. 10. 10:58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고린도후서7:5-16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도란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어떤 일을 결정한 후에는 더 이상 후회가 없어야 된다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사는데 인생에 있어서 무슨 후회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마치 성도의 인생이 완전하게 살아가는 인생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삶이라는 것은 참으로 평범한 삶입니다.

무슨 일을 결정했다가 후회도 하고, 때로는 그 방법을 바꾸기도 하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 쓴 것에 대해 후회했다고 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장 이런 생각이 들지요. 후회할 것 같은 짓을 왜 했느냐 말입니다.

조금 더 심사숙고하여 편지를 쓰는 것이 옳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함으로 말미암아 고린도 교인들은 큰 근심에 사로잡혔습니다.

이렇게 큰 근심에 사로잡히게 되다보니 바울은 자신이 괜히 편지를 썼구나 생각한 것입니다.


바울이 왜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까?

그들로 회개케 하기 위해 편지를 쓴 것입니다. 그런데 회개를 이루기는커녕 큰 근심에 성도들이 사로잡혀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이런 경우를 당하게 되면 괜히 편지를 썼구나. 참으로 후회가 막심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지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보냈는데 그것이 역효과가 나타나니 후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왜 후회하는 가입니다.

바울이 지금 왜 후회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고린도 성도들이 완전히 실족해 버릴까 해서입니다.

바울의 편지를 받고 낙담할까해서입니다.


주님을 더욱더 간절히 붙들어야 한다고 편지를 보냈는데, 주님을 간절히 붙들기는커녕 오히려 근심만 가득하게 사이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이 지금 후회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일을 행하고, 후회하는 모습은 우리들이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 그 마음의 중심이 어디에 가 있는 가입니다.


지금 바울의 관심은 오직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어떤 일에 대해 결정을 내리든지 아니면 그 결정 내린 일에 대해서 후회를 하든지 오직 관심이 주님 되신 예수님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더욱더 주님께 가까이 나아간 사실로 인해 바울은 너무나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 마음은 곧 주님의 마음입니다.

누가복음15장을 보면 집을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에 대해 나와 있습니다.

11-32절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습니다.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내 재산을 내게 주세요.

아버지가 두 아들 각자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후 며칠 지나지 않아 둘째는 나누어 받은 재산을 다 모아 먼 나라로 갑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그는 그 재산을 다 써 버렸습니다. 그런데 재수 없게도 둘째가 머무는 곳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러니 먹을 것을 구하기가 쉽지 않겠지요. 결국 가는 돼지 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돼지치는 자인데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도 먹을 수 없는 처지입니다.


사람들이 돼지에게는 먹을 것을  주어도 그 둘째에겐 먹을 것을 주지 않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 사람은 돼지보다 못한 처지에 놓인 것입니다.


그때서야 둘째는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로 갔습니다.

아버지는 둘째를 성대하게 맞아 주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첫째가 알게 됩니다.

여러분이 만일 첫째 아들이라면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아버지는 해도 너무 하시다. 어찌하여 저런 놈을 저렇게도 성대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라고 말입니다.

미운 짓만 골라서 하는 놈을 속을 하나도 썩이지 않는 자신에게는 생전 해주지 않던 대우를 해 준다고 해 보세요.


이거 열 받는 일이 아닙니까?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죽었다고 살아난 아들, 잃었다고 얻은 아들이기에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어떻게 세리나 죄인들을 가까이 하고 계신 가입니다.

너무나 꼴 보기 싫은 것이지요.


지금 고린도 교회의 모습이 꼭 둘째 아들과 같은 짓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열심히 전했는데 그 하는 짓이 심기를 아주 불편하게 하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마음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이들을 향한 마음이 분노의 마음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갖고 이들을 대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세요. 바울이 왜 편지를 썼는지가 나와 있습니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바울 일행을 향한 마음이 어떤가를 하나님 앞에서 들추어내기 위해서 편지를 썼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들의 마음의 중심에 누가 자리를 잡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 편지를 쓴 것입니다. 주님이 그들의 중심에 계신가 아니면 그들 자신이 그들 중심에 있는가 말입니다.


결국 고린도 성도들이 바울의 편지를 받고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11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 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이들의 중심에는 주님께서 자리를 잡고 계심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방금 읽은 본문에서처럼 말씀 앞에서 요동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요동침에 모두가 다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어떤 행위를 나타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이렇게 역동적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이 다이나믹 코리아를 선전하고 있지요.

성도란 선전선종한다고 해서 역동적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믿음 없는 자들이 하는 짓거리입니다.

성도란 늘 말씀 앞에서 살아가는 자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하루하루를 사는 자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도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나는 왜 말씀 앞에서 저들과 같이 요동치지 못하지. 이런 생각은 당연히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라면 오히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가질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면 나는 주님과 정말 상관 없는 자이구나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요동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또한 오늘 말씀을 주님께서 그대로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 주심을 믿으며 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동치는 삶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가 별나다고 생각합니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마음을 가진 자의 태도는 항상 꿈틀거립니다. 주님을 향해.


그러나 믿음 없는 자도 역시 꿈틀 거릅니다. 생존을 위해.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게 되면 우리는 늘 생존을 위해 꿈틀거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성도는 주님을 향해 꿈틀거립니다.

이런 모습이야 말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는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