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죽고 함께 산다
고린도 후서7:1-4
오늘 본문을 보면서 참으로 어쩌면 그렇게 오늘날 교회라는 집단과 거리가 먼 이야기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날 목회자와 교인들과의 관계를 보게 되면 서로의 주님이 따로 존재함을 알 수 있습니다.
목회자는 자신이 주이고, 교인들 역시 자신이 주입니다.
이들의 공생관계는 서로에게 상처만 주지 않으면 문제가 없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목사가 설교시간에 어떤 교단 목사가 잘못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마침 그 설교를 듣고 있던 사람이 그 목사를 아주 존경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화가 나서 그 교회를 떠나 개척교회를 세웠습니다.
이것을 막기 위해 목사는 자신의 말이 잘못되었다고 빌었다고 합니다.
이런 목사에겐 주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목회입니다. 성도가 빠져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입으로 성경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말해 놓고, 성도가 빠져나가려고 하니 그 말을 취소한다고 한 것입니다.
얼마나 웃긴 것입니까?
여기에서 오늘날 목사가 어디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진리엔 관심이 도무지 없습니다. 예수님께 관심이 있다면 결코 이런 짓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목사임을 아는 사람들은 어떤가? 장로들 집사들은 어떨까요?
이들은 그저 이 목사가 계속 교회에 남아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속으로는 저놈 하면서도 겉으로는 그 속내를 드러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민중들이 두려워서입니다. 조금 더 생각해야 보면 나는 나의 종교취미생활을 즐기고, 너는 너의 종교취미생활을 즐겨라 이거지요.
십자가 십자가 이야기 하지만 이들에겐 진리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보게 되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자신들을 마음으로 영접하라고 부탁을 합니다.
이런 것을 보게 되면 우리는 고린도 교인들이 사도바울 일행을 지금 마음으로 영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 단단히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라고 말해 버립니다.
이것을 보게 되면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 일행을 향해 왜 불만을 갖고 있는지, 왜 마음으로 영접치 않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지금 바울 일행을 삐딱하게 보고 있습니다.
바울일행은 불의를 행하는 자들이다. 아니만 남을 괴롭게 하는 자다. 속여서 남의 것을 빼앗는 자다라는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바울 일행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정도만 되어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요즘 교회는 어떻습니까?
불의를 행해도, 남을 괴롭게 해도, 속여서 남의 것을 빼앗아도 눈을 꼭 감아 줍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면 진리를 전하지 않아도, 진리에 대해 사기를 쳐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만 해롭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니 오늘날 목사들이 탐욕을 부려도 성도들은 별로 상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도 여전히 탐욕을 부리는 자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이것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대충 전하고, 듣고 그렇게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바울 일행에 대한 잘못된 견해이지만, 그런 태도로, 그런 행동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는 결코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태도야 말로 성도가 가져야할 기본적이 태도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살아간다면 그 기준이 목사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십자가의 복음 중심이어야 합니다.
그러니 오늘날 교회는 이런 문제 있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로부터도 책망을 들을 수준에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이러한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단호히 말합니다.
나는 결코 불의를 하지 않았고, 어떤 누구도 해롭게 하지 않았고, 속여 빼앗은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결과가 발생합니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정죄 받는 꼴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잘못되었다고 비판을 가했는데 나는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고 하면 그 비판을 한 사람의 악의가 드러나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도라면 바울의 이 말을 제대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3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내가 정죄하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로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고자 함이라”
바로 이것입니다.
바울이 잘못을 지적하는 이유는 바로 함께 죽고 함께 살고자 하는 이유에서입니다.
성도란, 바울이든 고린도 교인들이든 모두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들입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자들입니다.
바울이 잘못된 것을 단호하게 지적한 이유는 성도란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사는 자임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에베소서 2장을 보게 되면 성도들이란 한 새사람으로 지으심을 받은 자입니다.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된 자들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잘못을 지적함으로 말미암아 함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하나 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죽고 함께 살 자들입니다.
목회자와 성도들과의 관계, 아니면 성도와 성도와의 관계는 함께 죽고 함께 살 자들입니다.
그러니 아닌 것은 분명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낙심할까 하여서 해야 될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자란 의식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나는 나대로 살고, 너는 너대로 살아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라가 아니라 불로타 없어질 이 땅에서 각자의 영역을 고수하면서 살자는 것입니다. 나는 너에게 간섭을 하지 않을 테니 너도 나를 간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설교를 할 때 대충 우리 귀에 거슬리지 않게 하시고, 그러면 우리도 당신을 나쁘게 대우하지 않겠습니다, 의 관계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하나되는 일에 대해선 관심도 두지 않습니다.
그저께 어떤 분이 저희 집에 놀러 왔습니다.
와서 자기 교회 목사의 잘못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 목사에게 그 잘못을 말할 마음도 없고, 뿐만 아니라 그 교회에서 나올 마음도 없습니다.
오직 그는 자신이 맡은 봉사의 일을 열심히 할 뿐입니다.
개 xx라고 욕을 하면서까지도 그는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려고 하고, 그 목사를 속으로는 욕하지만 겉으로는 인정하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너무 우습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 앞에서 두려움이란 전혀 찾아 볼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남이지요.
7장 1절을 보게 되면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주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이 없다는 말은 어떤 것입니까?
두려워 하는 것은 오직 죽음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살기 위해서 나는 나의 방식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만난 그 사람은 그 조직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가 칭찬해 주고, 장로가 칭찬해 주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서 속으로는 욕합니다.
그러나 살아야 하지요. 자신이 그래도 쓸모 있는 자임을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니 이 사람에겐 진리란 없습니다.
이런 모습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입니다.
4절을 봅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성도들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에 대해서 자랑할 것도 많다고 합니다.
문제가 많은 교회이지만 이들이 믿는 바는 분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잘못을 지적하면 들을 수 있는 자들이며, 십자가로 즐겁게 나아가는 자들임이 확실합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어떻게 바울이 이들을 신뢰할 수 있고, 이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이들의 중심에 오직 십자가밖에 없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물론 이 말은 이들의 생활이 완전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들이 비록 실수하고, 잘못하고, 죄를 범한다 하더라도 십자가의 사랑이 이들을 완전히 뒤덮고 있습니다.
그러니 바울이 비록 이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지만, 환난 가운데서도 이들을 통해 위로를 받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뿐이 아니라 기쁨이 넘친다고 말합니다.
성도와 성도의 관계란, 물론 목사와 성도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떠나 자신의 탐욕을 위해, 자신이 살고 싶음을 위해 살아가는 자가 있다면 이런 자는 성도라 부를 수 없습니다. 이들은 남의 잘못을 지적할 마음도 없고 지적 받을 마음도 없는 자들입니다. 십자가로 함께 나아갈 마음이 근본적으로 없는 자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십자가로 함께 나아갈 마음이 있습니까? 함께 죽고 함께 살 마음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