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음이 없고 모자람이 없는 세계
고린도 후서8:6-15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역시 연보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행위를 통해 그 믿음을 드러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제가 지금까지 행위를 강조하는 자들의 잘못을 지적한 것에 나도 해당되지 않는가 라는 의문을 갖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지적한 것은 그들은 믿음은 없고, 행위로서 믿음을 보이려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기도도 하지 않고, 성경도 보지 않고, 전도도 하지 않고, 맨날 내 육신의 일에만 매여 사람들을 만나고, 돈을 벌 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합니까?
내가 정말 예수님을 믿는 자일까라고 생각하지요?
이러면서 그 다음 취하는 행동이 무엇입니까?
기도를 시작하거나 말씀 보는 것을 시작하거나 예배에 꼬박꼬박 참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동을 시작하게 되면, 이제 안심을 합니다.
이제 내가 믿음이 있구나라고 말입니다.
사실 믿음이란 이런 것, 즉 내 쪽에서 무엇인가를 해서 이루는 것, 얻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앎에도 불구하고, 자꾸 내 쪽에서 무엇인가를 해서 믿음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적한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딴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주되심의 피공로에 대해 생각하기 보다는 내가 무엇을 어떻게 그 피공로에 조금이라도, 미력하나마 보탬이 될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자이지요.
주되심을 무시해도 이만저만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공로를 결코 남에게 빼앗기는 일은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주님이 너무 옹졸하고 치사해 보입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바리새인들 아닙니까?
우리도 할 수 있는 일, 지킬 수 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다고 덤벼든 자들이 아닙니까?
이들에게 믿음이 없었습니까?
이들은 주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익히 아는 자들입니다.
출애굽의 경험, 유월절의 경험을 생생히 기억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철저한 믿음 있습니다.
이들은 이 믿음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믿음으로 살겠다는 것이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니 이들의 죄악이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이들은 공로를 주님께 돌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주시는 은혜를 도저히 그냥 받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피 흘리심, 즉 유월절 어린양의 피는 기념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지, 결코 우리가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에 마땅히 당해야 하는 자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유월절 어린양의 피공로가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의 피공로가 지나 갔는데 내가 어떻게 그런 악한 죄인인가?
이제는 믿고 행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주장합니다.
해아래 새것이 없다는 주님의 말씀이 얼마나 정확하신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어도 인간의 죄악성은 겉옷만 바꿔 입을 뿐, 그대로입니다.
야곱을 생각해 보면, 은혜 속에 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얼마나 설쳐 댑니까?
자신이 주의 말씀을 이루어 보려고 얼마나 약삭빠르게 행동합니까?
그러나 그의 힘의 근원, 행동의 근원이 상실 된 후에야 축복 속에 사는 것, 은혜 속에 사는 것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라고 하는 자들이 어떻게 합니까?
날마다 주님의 피공로의 은혜의 깊이를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예수님 믿고 괜찮은 존재인가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행위로 사는 자의 전형적이 모습입니다.
그러면 당신이 말하는 행동으로 믿음이 나타난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
말장난이 아니냐 라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겉으로 보게 되면 믿음이 없는 자의 행위나, 믿음이 있는 자의 행위를 통해서는 믿음이 참 믿음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힘듭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앞서서 제가 말씀드린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면 행위로 자신의 믿음을 유지하려고 하는 자들은 버럭 화를 냅니다.
나의 믿음이 믿음이 아니라 말입니까 라고 대들지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죄악을 구석구석 파헤치시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가만히 놓아 둘때는 굉장한 믿음을 가진 것 같았고, 어느 누구보다도 믿음이 좋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개입되시니 그들이 얼마나 강퍅한 자들인가가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만히 놓아두면 누구보다도 믿음이 좋아 보이지만, 십자가를 말하게 되면 왜 그리 싫어하는지.
제발 십자가만 이야기 하지 말로 우리의 인격도 좀 이야기 해 달라고 발광을 합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좀 건전하다, 괜찮다고 하는 사람들은 오늘 본문을 어떻게 해석할까요?
헌금은 미리 미리 준비하는 것입니다. 헌금이란 주님을 본받는 모습입니다. 연보란 평균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생각하시기에 이 말이 맞습니까 맞지 않습니까?
맞지요. 왜냐하면 성경대로 말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일전에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경대로 하다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유대인들이지요.
이들은 구약 성경을 외우는 자들입니다.
누구보다 말씀 말씀, 말씀대로 사는 삶을 강조한 자들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니 서신서를 해석할 때에도 주님께서 구약을 보신 눈으로 우리가 신약을 보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에서 주님되신 예수님이 보이지 않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우리의 삶의 원리, 방향이 보이는 것입니다. 물론 은혜와 행위를 조화롭게 생각하려고 발부둥 칩니다.
우리는 주님의 눈으로 오늘 본문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은혜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 주십니다.
바로 성도의 존재란 9절에서 어떤 존재인지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왜 십자가 지셨습니까?
너희를 위하여 입니다. 즉 성도를 위하여 입니다.
그러면 왜 성도를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셨습니까?
그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만유의 주님이심을 온 천하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15-18절을 읽어 봅시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에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 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예수님을 주님으로 내세우시기 위해 천지창조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제대로 보여주는 곳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피조물들도 다 이것을 보여주긴 보여줍니다 마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심이 십자가 지심이요, 십자가 지시고 부활 승천하시어 주가 되심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부요하신 자로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케 되신 목적입니다.
그러니 헌금이나 강요하라고 오늘 본문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주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주가 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까?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하라고 삼으셨습니다.
이런 자의 모습이 어떤 모습으로 지상에 나타납니까?
헌금이라는 것을 통해 나타납니다.
15절을 보시겠습니다.
“기록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가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출애굽기 16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광야생활의 시작에서 여호와께서 매추라기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희한 하게도 많이 거둔 자나 적게 거둔 자나 남음이 없고 부족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에서는 바로 이런 모습이 나타납니다.
십자가의 긍휼이 강같이 흘러넘치는 곳이 주님의 나라입니다.
자신의 수고와 상관없이 은혜로 사는 곳이 주님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불청객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은혜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으로 살지 않습니다.
이들은 내일 일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래서 미리 미리 준비하는 사는 자들입니다.
매일 식량대로 거두라는 말씀이야 들을 수 없지요.
만일 여호와께서 메추라기를 내리시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그래서 이들은 남음이 없는 양식을 보관해 두어 내일 먹으려고 했습니다.
결국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고, 모세는 노했습니다.
믿음이 없는 자의 모습이 이런 모습입니다.
우리가 볼 때에는 얼마나 훌륭한 모습입니까?
내일을 미리 미리 대비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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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모습이 바로 우리들이 알다 시피 믿음이 없는 모습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연보라는 것은 믿음에 대한 것입니다.
무엇을 믿고 있는가? 은혜로 살아가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연보입니다.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라라지 아니하였느니라는 출애굽기의 말씀이 성도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됨으로 십자가의 은혜는 성도 가운데서 풍성히 증거되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