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보의 증거
고린도후서9:1-15
지금 고린도지역의 성도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그 형편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상태입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지역 성도들은 이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풍성합니다. 이런 사랑이 풍성하다는 사실에 대해 바울과 그 일행은 마케도냐지역의 성도들에게 막 자랑하고 다녔습니다. 그러자 마케도냐지역 성도들도 성도 섬기는 일에 더욱더 열심을 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지금 디도와 다른 두 형제를 고린도 교회에 보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랑을 엄청나게 했는데, 실제로 연보를 하지 않다는면 어떤 모양이 되겠습니까?
4절을 보게 되면 믿음에 대한 부끄러움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도 포함됩니다. 물론 고린도교회성도들에 대한 신뢰, 그들이 그렇게 사랑이 풍성하다는 사실을 자랑했던, 그 믿었던 것에 대한 부끄러움입니다.
얼마나 사람들로부터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겠습니까?
물론 마게도냐성도들이 연보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을 웃음거리로 여긴다면 이것도 문제가 있겠습니다 마는, 이런 일은 우리에게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까?
예를 들어 봅시다.
지금 우리와 함께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제가 여러분들을 믿음이 좋은 형제자매라고 소개 했다고 합시다.
아마 그분들은 저를 생각해서 여러분들이 참 주님을 믿는 자임을 인정할 것이고, 참으로 제대로된 신앙생활을 어렵게 하시겠구나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만일 여러분이 어떤 형제의 어려움을 들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아무도 그 형제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믿음 좋아하네. 자기 배만 채우고, 신앙생활을 자기 편한 위주로 하지 않는가라고 조롱하지 않겠습니까?
동일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진정한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형제들은 돌아볼 마음 없고, 자기 편한데로, 자신의 생명과 같은 돈은 결코 한 푼도 내 놓지 않는 인간들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럴 경우 제가 여러분들을 자랑한 것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에 대한 저의 믿음뿐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조차도 웃음거리가 될 공산이 아주 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바울의 상황이 지금 이런 상황입니다.
자랑을 했는데 자랑한 것이 현실로 나타나지 않을 경우 바로 이런 결과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래서 전에 약속한 그 약속을 이루게 하기 위해 지금 디도와 다른 두 형제를 보낸다는 것입니다.
5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여기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들이 신앙 생활하던 것과 좀 다른 말씀을 듣게 됩니다.
연보에 대해서 권면한다는 말씀 말입니다.
우리는 연보, 헌금이야기만 나오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킵니다.
연보, 헌금 이야기는 다 사기꾼들이 하는 말이다라고 단정을 해 버립니다.
하기야 대부분이 그런 식으로 헌금을 말했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을 우리들은 그런 식으로 매장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왜 권면하게 되었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이미 고린도교인들의 마음이 바울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성도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풍성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연보를 하겠다고 바울 앞에서 결심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순간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믿음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을 향해 그 믿음을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돈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그 믿음의 증거로서 약속한 그 약속을 이루라는 권면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헌금 권면은 무엇입니까?
돈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복음도 없으면서 교회를 더욱더 견고하고 거대하게 만들기 위해 수단으로서 헌금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물론 말로는 주님을 믿는 믿음을 보이라고 말은 하지만, 그 설교의 내용과 그 중심성에 있어서는 돈을 사랑하는, 세상 권세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니 설교시간에 예수님의 십자가는 양념이 되어 버리고, 인간의 의가 잔뜩잔뜩 증거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연보에 대한 권면이 돈에 대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대한 것임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창피를 당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이 얼마나 사람들로부터 우습게 여김을 당하게 될 것입니까?
여러분 제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고 해놓고, 술집에 가서 아가씨를 두고 술을 마신다고 해 보세요.
복음이 얼마나 우습게 되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주님이심이 증거되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지 않겠습니까?
제가 지금 윤리적으로 깨끗하게 살아라는 말씀입니까?
그런 것이 아니지요.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하라고 우리를 구속하셨는데, 이렇게 살면 어떻게 예수님을 주님으로 증거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이런 모습의 목사를 보시면 그를 과연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자임을 인정하겠습니까?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악함을 날마다 알아간다고 해 놓고, 그 믿음을 전혀 볼 수 없는 모습이라면 과연 십자가가 어떻게 증거되겠습니까?
세리와 창녀들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회개자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지금 고린도 교인들도 이런 모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자신을 부인하는 모습, 곧 연보하는 모습이지요.
연보를 한다고 하긴 했는데 그 약속을 어떻게 지킬까 염려 되지 않겠습니까?
마귀가 잠자고 있겠습니까?
자꾸 우리를 부추깁니다.
야, 돈이 없으면 안돼. 지금 네가 헌금 해 버리면 이 후에 무얼 먹고 살지. 네가 하고 싶은 것 못하지. 그렇지.
자꾸 내일일을 염려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만히 놀고 계시지 않지요.
바울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6절을 한번 봅시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연보를 미리 미리 준비하는 것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는 것은 우리의 소유와 관련된 말씀이 아닌가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돈을 많이 벌고 적게 버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을 연보에 적용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는 것이 어떻게 해석되어야합니까?
연보를 미리미리 준비하여 많이 하게 되면 그 연보가 많아진다는 말입니다.
적게 준비하면 적게 연보를 거둔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인간의 탐심이 어떤가를 고발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살아가는 자의 사고방식과, 그렇지 않은 자의 사고방식이 얼마나 다른 가를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연보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자들이 내어놓는 것입니다. 만일 억지로 내어 놓는 자가 있다면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자들이지요. 이런 자들은 죽음밖에 기다리지 않습니다. 연보란 흉내 낼 수 없는 하나님의 은사인데, 이들은 믿음으로 연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체면으로 연보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를 증거하기 위해 연보를 하는 것입니다.
연보란 오직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즉, 연보라는 것을 통해 주님의 의가 널리 증거됩니다.
이것이 제대로 된 연보입니다.
이제 10절을 봅시다.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너무나 놀라운 말씀입니다.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의 본래적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연보를 풍성하게 하시고, 그 연보를 통해 십자가의 의를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억지가 어디 있습니까?
농사꾼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신 것이 이것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존을 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을 보면서 탐욕을 부추기는 것으로 설교를 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제 결론을 봅시다.
13절입니다.
연보하는 것을 통해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이 드러납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이것은 형제들간의 사랑이 더욱더 풍성하게 되고, 하나님께 감사의 제목이 됩니다.
오늘날 연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 같이 보여지지만 실제로는 형제들간 위화감만 조성하고, 질투와 시기만 더욱더 부추기는, 경쟁만 부추기는 연보가 되어 버렸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연보를 통해 십자가가 풍성히, 널리 증거되어지고, 형제들간의 사랑이 더욱더 풍성해 지며, 주님께 더 많은 감사가 넘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