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강해20

푸른 섬 2008. 9. 10. 11:01

자랑

고린도후서10:1-18

교회 안에 자랑을 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요?


사람이 어떤 경우에 자랑을 하게 됩니까?

자신이 가진 것을 남과 비교할 때 자랑이라는 것이 튀어 나옵니다.

또한 자신이 노력하여 얻은 것이 있을 경우 자랑할 것이 있겠지요.


어떤 사람은 돈 많은 것을 자랑합니다.

아니면 돈을 많이 버는 것을 자랑합니다.

이런 사람의 경우엔 돈 없는 사람을 무시하기 일쑤입니다.

자랑을 하는 사람은 항상 육신에 속하여서 육신의 싸움을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별론 놀라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성도의 출발이 어디입니까?

바울이 고린도 전서1장에서 분명히 말했습니다.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로 출발해서 십자가로 끝을 맺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십자가로 출발해서 자기 자랑으로 나아가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 자기 자랑이 나옵니까?

남과 비교해 보니 자랑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한번 봅시다.

오늘 본문에서  어떤 사람들이 바울을 비방합니다.


그 비방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떠나 있으면 너무나 담대하게 글로 편지를 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굴을 대면하면 너무나 겸손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에 어떻습니까?

이런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두 얼굴을 가진 사람이다라고 말입니다.


사람이 일관성이 있어야지, 얼굴을 안보면 담대하고, 얼굴을 보면 겸손한 모습을 보인다면 누가 이런 사람을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까?


고린도 교회에 이런 생각을 가진 자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바울을 심하게 비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생각하는 자들이야 말로 어떤 싸움을 하는 자들인가를 분명히 밝힙니다.

그것은 육체대로 싸우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들이 싸우는 싸움은 비록 육체에 거하여 살고 있지만 혈과 육에 속한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늘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기 쉽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육체대로 싸움을 하는 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지금 고린도 교인들 중에 이런 자들이 있습니다.

바울이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흔히 이런 판단을 많이 합니다.

육신대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육신대로 판단하는 것이 너무 쉽고, 간단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육체대로 싸움을 하는 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도한 육체대로 싸움을 하는 자들의 모습은 많은 이론, 견고한 이론을 갖고 있습니다.

너무나 논리적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긍할 만한 논리를 갖고 다가옵니다.


하기야 그럴 것이 인간들이 만들어낸 이론이야 그렇지 않겠습니까?

인간 이성에 가장 부합한 것들로 짜 집어 만들어 놓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이 학교에서는 아니면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인간들의 이론들을 한번 보시면, 모든 것이 수긍할 만한 논리가 아닙니까?


물론 이 이론들이 다 통일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이론들이 공통적으로 공격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이런 이론들은 자신들을 굉장히 높입니다. 즉 자랑할 것이 많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복음은 이런 것들을 완전히 부수어 버립니다.

자랑할 것이 없도록 만들이 버립니다.


결국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게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위력입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다양하게 이론을 꺼집어내고, 그것을 주장한다 할지라도 복음 앞에서는 모든 것인 산산이 부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부수어 집니까?

바로 성도들입니다.


성도라 할지라도 이런 고집과 세상의 이론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 복음을 통해 이런 것들은 박살나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께 복종하는 일만 남게 됩니다.


성도들이 가장 갖기 쉬운 문제가 무엇인고 하면, 바로 7절입니다.

자기만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십자가 복음이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삶, 즉 믿음으로 사는 삶이 기준이 되어 남을 판단하게 되니 자신만이 참 복음을 믿는 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하나의 현상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을 향해 강하게 질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강하게 질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망하게 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편지를 쓸 때 이미 주님의 영을 받은 자들만이 자신이 말에 복종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편지의 목적이 영생과 관련 있는 자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당연히 세우는,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영생과 관련 없는 자는 어떻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 글을 읽으면서 망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아무리 일관성이 없다 할지라도 그렇게 하는 사람은 한 사람입니다.

즉 주님의 영을 받은 ,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항상 십자가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랑을 하는 자들은 십자가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와 관련 없는 것을 보고 비교하며, 자랑하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15절을 보면서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복음이 위대해 져야 하는 데, 바울 일행이 위대해 지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나 이 말은 바울을 섬기고 높인다는 뜻이 아닙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인 것이 높이 알려지면 얼마나 널리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의 관심은 오직 하나, 복음이 전파되어지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주안에서 자랑하는 자의 제대로 된 모습이 아닙니까?


이제 18절을 보고 마치겠습니다.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아무리 좋은 이론을 갖고 있고, 올바른 행동을 한다고 할지라도 주님께서 인정치 않으시면 헛빵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자기를 칭찬합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옳다고 인정하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야 말로 어리석은 자의 전형적이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칭찬하시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바로 복음에 복종하는 자, 십자가만 증거하는 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