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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21

푸른 섬 2008. 9. 10. 11:02

광명의 천사

고린도후서11:1-15

하박국 3:16-19절을 봅시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석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비록 무화가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이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우리들이 이런 말씀을 보면 너무나 황당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주의 백성을 구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주의 백성조차도 큰 환난을 겪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런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괜히 기분이 나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하시려면 곱게 구하시지 왜 큰 환난 속으로 집어 넣어십니까?


하박국2:4절을 보면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우리의 눈에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바벨론이 쳐들어오고, 나라가 망하고, 기근이 들고, 먹을 것이 없습니다.

이 일은 믿음으로 사는 자도, 그렇지 않는다고 다 당하는 일입니다.


이럴 경우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이것은 정말 미친짓이다라고 생각지 않겠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미친 짓입니다.


이렇게 세상은 옛적부터 그래 왔듯이 잘도 돌아가고 있는데, 무슨 주님의 심판이 어떻고, 다시 오신다는 말씀이 무슨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리냐고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을 믿고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다가 주님의 오심에 함께 할 수 있게 해 주신다면야 모를까 믿음이라는 것을 주셔놓고 하시는 말씀이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한다. 고난을 당한다. 죽음에 넘기운다. 왜냐하면 십자가 복음 때문이다. 그러나 의인은 오직 이 십자가 복음 하나만을 믿고 살아간다고 하시니 이거야 말로 미치고 환장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예수 믿고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아 장수하고, 자식이 잘되고 사업이 잘되고, 어려움이 없고, 고통이 없고, 고난이 없고, 믿지 않는 자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이런 인생을 산다고 하면이야 모를까 이거야 있는 것 까지 빼앗아 가는 만유를 다스리시는 주님이라니 이런 분을 믿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러니 여러분 믿음이 없는 자, 즉 십자가 지신 주님의 영을 받지 않는 자야 말로 참으로 이 세상에서 정신이 온전한 자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제대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너무나 정상적이지요.


이런 사람들을 우리들은 교회라는 곳에서 많이 볼 수 있지요.

믿어 열심히 기도하고, 눈물 흘리고, 전도하고 헌금 많이 하여 이 땅에서 복을 누리고 죽어서는 천국가려고 하는 자들 말입니다.


물론 이런 마음을 가진 자들은 교회에 나온 순진한 자들이 그렇지요.

그러나 교회전문가들이 되어버리면 천국은 없습니다.

주님이 다스리는 곳은 없습니다.

수십 년을 믿어 보았자 말짱 돈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돈이 무엇이 그리 중요하냐? 건강이 최고지.

말이야 그렇지요. 돈이 많아도 아프면 별수 없지요.

그런지 세상은 어떻습니까?

이런 말이 통합니까?

아닙니다.


돈이 많아야 병원에 가고, 값비싼 약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건강이 최고야 하는 것은 가난한 자들의 자기 위로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있는데, 매일의 생활이 밥 먹고 살기도 힘들다고 했을 때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변에서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게을러서 그렇게 가난하지. 아니면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않아서 그렇게 가난하게, 갈 곳도 없이 목회생할을 하지.

세상을 그렇게 살아서는 안되지. 등등의 말을 듣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복음이라는 것, 십자가의 복음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매력적인 것이 아니라 참으로 죄인들을 아주 기분 나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처음 제대로 된 복음을 들었다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복음을 왜곡되게, 자기 편한 위주로 해석해 버리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그런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4절을 보세요.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이들이 복음을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시간이 잠시 흘렀는데, 이들의 마음이 미혹을 받고 있습니다.


그 미혹이란 다름이 아니라 너무나 인간적인 생각으로서의 미혹입니다.


창세기에 뱀이 이와를 미혹할 때 한 말이 우리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 아닙니까?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 말입니다.

우리도 할 수 만 있다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목회를 해도, 직장을 다녀도, 사회생활을 하더라도 하나님과 같이 된다면야 이보다 더 좋을 순 없겠지요.


그런데 희한한 것은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한자에 대해서도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사도이지요.

주님을 만났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정도의 사람이라면 왜 고생고생하면서 복음을 전하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 도와 주시든지 아니면, 성도들의 섬김을 당당하게 확실히 받든지 하면 될 터인데 말입니다.


이 말이 이해가 됩니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춘향전이 있는데, 이 도령이 거지행세를 하고 나타났을 때 누가 이 도령이 암행어사라고 인정하겠습니까?

장원급제를 했으면 그 모습을 보여 주어야 사람들에 믿어 줄 텐데, 그 꼴이 거지 꼴이면 누가 그를 암행어사라고 하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니 바울의 모습이 사람들 눈에는 너무나 이상한 자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예 이런 모습, 당당하게 헌금을 요구하고, 당당하게 성도들에게 명을 내리면 아예 사도다운 모습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주님의 백성들은 잘 살아야 된다고 드러내 놓고 말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해도 청산유수같이 해야 합니다.


남에서 해를 끼칠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 주님의 은혜로 사는 자들이니 말입니다.


위풍당당한 성도요, 위풍당당한 목사가 되어버립니다.


이런 자들을 향해 오늘 본문에서는 거짓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모습은 곧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사단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인간들이 이런 모습을 좋아할까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본성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할 수 없으면 자신이 밀어주는 자를 통해서 대리만족을 해 보겠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있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게 말입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그러니 나타난 현상을 두고 믿음이 어떻고 저떻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여전히 이런 모습이 툭툭 튀어 나옵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통장에 돈이 일원도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염려하지요. 

그러나 염려하면서 사는 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회개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날마다 의지할 분은 십자가 지신 주님되신 예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러나 앞서 언급한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이들은 이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힘과 용기와 돈과 지혜를 주시면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들도 기도를 합니다.

 도와만 주세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라고 기도를 하지요.

이들은 주님의 긍휼을 필요 없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참으로 위풍당당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거지처럼 살아갑니다.

구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들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