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 것을 자랑함
고린도후서11:16-33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장 하고 싶어 하는 것 중 하나가 자랑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보통 무엇을 자랑합니까?
가진 것입니다.
이것은 물질이 되었든지, 아니면 정신적인 것이 되었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가보면 항상 자랑이라는 것이 툭툭 튀어나옵니다.
언제 자신의 차례가 될지를 기다려서 자랑합니다.
그러면 그 자랑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가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많은 것을 자랑합니다.
아니면 권세가 있는 것을 자랑합니다.
아니면 자신이 얼마나 선한 사람인가를 내세우면서 자랑합니다.
누가복음 18장을 보면 하나님의 율법을 어릴 때부터 잘 지킨 관원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 앞에 너무나 당당하게 나타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렇게 질문하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이 사람이 영생을 얻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은 자신이 무엇을 행해야 얻을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이와 동시에 이 사람은 무엇을 행하는 것 같으면 자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 얼마든지 다 지켜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당신이 나에게 무엇을 말하든지 나는 영생 얻을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에게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율법을 지키라고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내가 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조건이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닙니다.
첫째 율법을 지키고, 둘째는 자신이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셋째는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웠겠습니까?
어쩌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셨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당당하게,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며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생각과는 너무나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랑이라는 것이 예수님 앞에서는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는 그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예수님을 따르면 자랑할 것이 있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은 없습니다.
만일 이런 인간이 이 땅에 있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실 이유가 없습니다.
이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영생이라는 것이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시면서 오직 하나님의 능력인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게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자랑이라는 것으로 돌아가 생각해 봅시다.
이렇듯 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도 자신이 자랑할 거리를 찾아내려고 애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와 똑같은 자들이 등장합니다.
자신의 혈통을 자랑합니다.
자신들이 선민임을 자랑합니다.
그러면서 저들은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자랑을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모습은 너무나 고상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니 자랑할 만 하겠지요. 그리고 그래야만 사람들에게 먹혀 들어갈 것이 아닙니까?
이들의 자랑이 그러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구속을 받아 놓고 하는 말이 자신들의 현 모습을 자라났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이해가 됩니까?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길을 가는데 거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지가 너무 너무 불쌍해서 데려다가 먹을 것을 주고 새 옷도 주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거지가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나 얼마나 잘난 사람인가?
이게 제 이야기가 아니라 에스겔 16장을 보면 나옵니다.
함께 봅시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여 예루살렘으로 그 자증한 일을 알게 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미는 헷사람이라 너의 난 것을 말하건데 네가 날 때에 네 배꼽 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케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너를 돌아보아 이 중에 한 가지라도 네게 행하여 너를 긍휼히 여긴 자가 없었으므로 네가 나던 날에 네 몸이 꺼린 바 되어 네가 들에 버리웠느니라 내가 네 곁으로 지나 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가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하고 내가 너로 들의 풀같이 많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고 심히 아름다우며 유방이 뚜렷하고 네 머리칼이 자랐으니 네가 오히려 벌거벗은 적신이이더라”
들에 버린 자를 살려 주고, 적신인 자에게 고운 옷과 패물을 주었습니다.
14절을 봅시다.
“네 화려함을 인하여 네 명상이 이방인 중에 퍼졌음은 내가 네게 입힌 영화로 네 화려함이 온전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15절을 보세요.
“그러나 네가 네 화려함을 믿고 네 명성을 인하여 행음하되 무릇 지나가는 자면 더불어 음란을 많이 행하므로 네 몸이 그들의 것이 되도다.
하나님의 은혜를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본래 어떤 자였던 지를 생각지도 않습니다.
지금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자들의 모습이 똑 같습니다.
자랑할 것이 없어서 자신들의 혈통과 조상과 과거 역사를 자랑합니까?
오늘날도 이런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교회라고 이름을 붙인 곳에서 일어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설립 몇 주년이니, 목사 임직 몇 십 주년 기념이니 등등 자신들의 현 모습을 자랑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곳에서는 십자가는 무시당하고 멸시당합니다.
만일 그런 교회가 만일 성도들의 숫자가 두 명 밖에 없다면 이런 일을 하겠습니까?
목사가 박사학위 받았다고 축하예배니 하고, 참으로 어찌 그리 죄인들은 시대가 바뀌어도 똑 같은 모습을 하는 지 말입니다.
이런 모습은 죄인들의 본능적이 모습니다.
죄인들은 내세울 것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것을 들고 자신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그 긍휼만을 자랑합니다.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고린도 후서 11장에서 하는 자랑은 무엇이라 말입니까?
여러분 자신의 연약한 것을 자랑하는 것이 이해가 됩니까?
지금이야 성도들은 이런 생각을 같습니다.
바울처럼 고생고생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자야 말로 참으로 칭찬받을 만하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이런 것이 깔려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상해 주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시지요.
사실 고난은 반기지 않습니다.
거부합니다.
십자가의 길을 내가 왜 굳이 걸어가야 하는 가입니다.
이런 것은 사실 이 땅에서 자랑거리로 내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 세상에서 무시당하고 멸시 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지금 하는 자랑은 세상의 것을, 땅의 것을 갖고 자랑하는 자들을 공격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의 죄악을 들추어내는 것이지요.
그러니 바울은 지금 저들을 향해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주님과 함께 하고 있음을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으로 인해 자신이 고상해 진 것도 아니요,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것도 아닙니다.
재물이 많아진 것도 아닙니다. 건강해 진 것도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합니다.
여러분 성도는 자랑할 것이 있습니다.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 입니다.
왜 성도가 십자가만 자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주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셨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날마다 매일 매 순간 확인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자가 성도입니다.
이런 사실을 잊어버리고 십자가의 긍휼을 무시하며, 땅의 것을 가지고 자랑하려고 덤벼더는 자는 다 마귀의 종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