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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23

푸른 섬 2008. 9. 10. 11:03

환상과 계시

고린도후서12:1-10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환상을 좋아하고, 하늘로부터 직접 내려오는 직통계시를 좋아합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계시야 엉뚱한 것입니다.


드라마 장길산이라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 여환스님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미륵사상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미륵의 세계는 결국 인간이 임금을 갈아 치우고 완전한 새 세상을 연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천국을 이룬다는 것이지요. 그 세계는 용화세계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미륵사상은 기독교의 메시야 사상과 거의 비슷합니다.

미륵님이 오셔서 세상을 바꾼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미륵은 우리들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드라마에서는 실패로 끝나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곳에서 사람들을 끌어 모을 수 있었던 것은 미륵님의 계시입니다.

징조이지요.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좋아합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환상을 보아야 하고 계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눈을 부릅뜨고 본문을 탐색하려고 합니다.

도대체 무슨 신비한 내용이 들어 있을까?

그래서 본문을 읽어 보지만 무슨 우리가 기대하는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낙원으로 이끌려 갔다는 말 외에는 그 낙원이 어떻더라 어떻더라라는 내용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분명 환상과 계시를 말한다고 해 놓고 하는 말이 알맹이나 다 빼놓고, 낙원 갔다 왔다는 내용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본문을 통해 무엇인가 호기심이 발동한 사람들의 마음을 채워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 본문을 통해 추론해 들어갑니다. 낙원이 어떨까?

그래서 계시록을 뒤적이면서 참으로 낙원다운 천국을 꾸며 봅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꾸며본 낙원은 결국 미륵님이 오시는 나라와 전혀 다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인간들이 주인되는 참 세상 자유와 평등의 나라, 자신의 탐욕을 마음껏 이룰 수 있는 나라, 자신들의 평소 바램의 욕망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 놓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 땅에서 미리 이런 나라를 꾸며 보려 합니다.


우리들이 그들이 꾸민 나라를 이렇게 들여다보면, 어떤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들어 있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탐욕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곳에는 인간들의 탐심만 가득하게 담겨 있습니다.

자신들이 어떻게 하면 높은 자리 차지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 자리를 계속 고수하고 있을까?


아니면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어떻게 하면 존경을 받을까? 인정을 받을까?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어떤 식으로든 내 편으로 끌어 당겨볼까하는 것들이 가득 가득 들어 있습니다.


열왕기상 18장을 보게 되면 엘리야와 대결하면 바알의 선지자들이 나옵니다.

이들이 어떤 행동을 합니까?

25-28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한 송아지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놓지 말라 저희가 그 받은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어야 할 것인지..

하매 이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딸 피가 흐리기 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더라”


놀랍지 않습니다. 신을 섬겨도 얼마나 제대로 섬기고 있습니까?

자신의 몸을 전혀 아끼지 않습니다.

모든 정성과 희생을 다합니다.

무엇을 위해서 말입니까?

자신들의 기도의 응답을 위해서입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자신의 신들의 능력입니다.

이들은 왜 이것을 필요로 합니까?


자신들의 권력을 계속유지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그러면 엘리야는 어떻습니까?

심판하기 위해 하나님께 간구를 합니다.


여호와께서 그렇게 사용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인간들의 탐욕을 위해 환상도 만들어 내고, 계시도 만들어 냅니다.

이러한 환상과 계시는 인간들이 너무너무 할만하고 좋아할 만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어떤 곳에서는 새벽기도라는 환상을 만들어 내어, 새벽기도를 통해 자신들의 탐욕을 이룬다고 떠들어 댑니다.

어떤 곳에서는 제자훈련이라는 것을 가지고 나오고, 어떤 곳에서는 공동체를 가지고 나옵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십일조를 가지고 나옵니다.

십일조를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축복을 가득 가득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들이 주장하는 것 가운데 성경에 없는 것들을 거의 없습니다.

성경에 있는 것을 인용해서 환상과 계시라고 사람들을 속입니다.


그런데 이런 환상과 계시의 특징은 모두가 다 인간의 탐욕을 자극하여, 인간의 욕망을 마음껏 발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고상하게 말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환상과 계시를 말한다고 해 놓고 환상과 계시에 대한 우리의 기대에는 전혀 미치지 못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셋째 하늘에 간 것, 즉 낙원으로 들어간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쯤 되면 이제 그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셋째 하늘이 어떻더라. 즉 천국이 어떻더라, 아니면 말할 수 없는 말이 어떠어떠하더라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갑자기 말 꼬리를 돌립니다.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라고 말입니다.


이 말을 보게되면 바울을 향해 대적하는 자들이 무엇을 자랑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틀림없이 천국이 어떠니 저떠니, 하나님의 환상이 어떠니 계시가 어떠니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런 것들을 간단히 언급하고는 곧바로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거리로 내세웁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생각에도 바울에게 이런 요구를 하고 싶을 것입니다.

좀더 이야기 해 주세요. 낙원이 어떠했습니까?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는데 그 내용을 좀 말해 주세요 라고 말입니다.


인간의 호기심과 탐욕은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그 낙원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말이 무엇인지도 알수 없지만,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를 오늘 본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약한 것들을 자랑하는 자들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들의 탐욕을 환상과 계시로 채우는 자들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야 말로 천국의 백성이라는 사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러 있는 자가 곧 하나님의 백성이요 천국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바울도 여전히 육신에 매여 육신의 연약함이 없어으면 하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죄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꿈에도 생각지 못합니다.

주님의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진다는 사실 말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언제 발휘될 수 있습니까?

죄인에게서 발휘될 수 있지 의인에게 발휘될 수 있겠습니까?

인간에게 능력도 있고 힘도 있고, 부족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십자가의 능력이 나오겠습니까?

그런데 죄인들은 자꾸자꾸 힘을, 능력을 원합니다.

그런 것들을 가지려고 합니다.


교인들이 왜 기도를 합니까?

자꾸 채워달라고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바울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응답은 전혀 뜻밖입니다.


주님의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진다는 것입니다.


누가 이 말씀에 수긍하겠습니까?


아마 교회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잘 알고 있는 본문이 오늘 본문이 아닙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합니까?

자기 위로를 하기 위해 본문을 해석합니다.


즉 이런 본문을 보면서도 자신의 탐욕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10절 말씀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


여러분, 십자가의 능력을 나타나게 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무엇을 구하려고 합니까?

힘, 능력 등, 환상과 계시를 구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가 약한 가운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증거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약하다는 말은 돈이 없어야 된다. 아니면 병이 들어야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은 심령이 가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의 구함은 오직 십자가의 긍휼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자는 십자가의 능력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힘이 되는 돈이요, 권세가 될 수 있는 환상과 계시입니다.


여러분, 환상과 계시를 구하지 마시고,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 온 몸을 통해 증거되도록 기도하는 주님의 참된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