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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24

푸른 섬 2008. 9. 10. 11:04

사도의 표된 것

고린도후서12:11-21

바울이 얼마나 답답했으면 자신이 어리석은 자, 즉 자신이 어리석다고 여기는 자들의 말과 같은 말을 하게 되었을까요. 그러면서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향해 아주 비꼬는 듯한 말을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왜 바울이 칭찬을 받아야 마땅합니까?


지금 고린도 교인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환상과 계시에 관한 것입니다.


이런 것에 대해 바울이 말을 했으니 당연히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칭찬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2천년 전에나 지금이나 죄인들의 성향은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얼마나 가까운 시대에 살고 있었는가?

아니면 우리가 그렇게 존경하는 사도바울을 직접 눈으로 보고, 말씀을 들었다 하더라고 이런 것들은 다 부질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적과 표적을 보여 주셨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친히 증거하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오직 택한 자만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다 들었고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과 동일한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1-4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에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가시다”


오늘 본문 12:11-12절을 다시 한번 읽어 봅시다.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 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여러분 이 말씀을 보게 되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사도의 표된 것이 표적과 기사와 능력이라면 고린도 교인들이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불신합니까?


그 이유는 바로 참음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헌금을 자신이 받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입니다.

15절을 보세요.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위하여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폐를 끼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재물을 구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복음을 전했으니 너희는 헌금을 내 놓아라는 식으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부모된 심정으로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부모가 아이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지, 아이가 부모를 위해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을 위해 재물을 허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시비거리가 된 것입니다.

어찌 그리 예수님 당시와 별 차이가 없을까요?


물론 차이는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교회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상하다고요

그러나 이것이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8장 이후를 보게 되면 교회 안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상세히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용서를 모르는 자가 교회 안에 있을 수 있고, 용서받지 못할 강퍅한 마음을 가진 자가 있을 수 있고,

19장에서는 먼저된 자로서 나중될 자가 있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20장에서는 은혜를 전혀 모르는 용서함을 받은 자가 나옵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은혜를 알지 못하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22장에서는 잔치에 청함은 받았는데 예복이 없는 자는 지옥에 던지우게 된다고 하십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앞으로 교회 안에서 핍박하는 자와 핍박 받는 자가 등장한다는 사실을 미리 다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니 바울이 비록 복음을 전했다 하더라도 바울을 향해 대적하는 자가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가룟유다처럼 말입니다.


제가 너무 심한 말을 하는 것입니까?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이 그렇습니다.


바울이 자신이 재물을 허비하면서 까지 복음을 전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여기까지 인정하는 자들은 있습니까?


그런데 이제 다른 것을 갖고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16절을 봅시다.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 지라도 공교한 자가 되어 궤계로 너희를 취하였다 하니”

이것이 말이 됩니까 되지 않습니까?


말이 됩니다.

그 이유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고린도 후서를 계속 보고 있으면서 어떤 마음이 듭니까?

바울의 말을 반드시 들어야 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습니까?

다른 말로 하면 바울의 말에 복종해야 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면 결국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하는 일이란 자신의 종을 만드는 일 밖에 없지 않습니까?

결국 자기 종을 만들려고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렇게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일전에 말씀드렸듯이 바울의 관심은 이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아느냐고요.

바울의 삶을 보세요. 그리고 그가 전하는 내용, 말하는 내용을 보세요.

어디에 관심이 있습니까?


십자가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중심성을 저들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과 똑같은 자들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자신의 탐욕을 위해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전하니 다른 자들도 다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 드리다 보니 오늘날도 이런 일들이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을 비판하는 저같은 비판을 하게 되면 결국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고 하면 절대 진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절대 진리는 없고 다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니까 대충 서로를 인정하고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자신이나 자신에 보낸 사람들이 성도들의 이익을 취한 일이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바울이 말하니 , 또 어떤 인간들이 등장할까요?


보아라. 바울은 헌금도 받지 않았고, 그와 함께 한 자들도 그렇지 않느냐?

당신들도 바울을 본받아라. 이렇게 주장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사례를 받고 복음 전하는 것을 비판하는 자들이 있는데, 참으로 할 말이 없습니다.


고린도후서11:9절을 보게 되면 바울이 마케도냐로부터 온 형제들로부터 재정적인 도움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은혜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무엇이든지 시비를 걸어 십자가의 복음을 헛되게 만들어 버리려고 하고,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처음에는 환상과 계시를 갖고 시비를 걸더니 이제는 별 것을 가지고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이들 눈에는 십자가의 복음이 너무너무 싫습니다.


예수님께 시비를 거는 자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했을 때 이들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면 믿겠다는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부정하고 들어간 것입니다.


지금 바울의 대적자들도 이와 흡사합니다.


그런데 19절에서 21절을 보면 제가 지금까지 말한 것과 다르지 않느냐라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대적자들은 완전하게 대적자의 모습으로 드러났지만 이들을 확실하게 그렇지 않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19절 끝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이렇게 말하면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도 바울의 사랑의 대상이요 진정한 성도로 여기는 자들이 아닌가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지금까지 바울이 한 말, 아니 오늘 본문만 가지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태복음 16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요나의 표적을 받아 들인 자들이 있었다면 영생이 아니겠습니까?


이 본문을 보면서 이런 말을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무 매정하시다. 좀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울같이 오늘 본문 19절에서 하는 말과 같이 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십자가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니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은 철저히 버리려고 오신 것입니다.


이 뜻을 준행하는 자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러니 바울은 좀더 온화하고, 예수님은 너무 심하시더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사고방식입니다. 마귀의 사고방식이지요.


그러니 오늘 본문을 이해할 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비추어서 말씀을 보아야 제대로 본문이 보이는 것입니다.

만일 인간 구원 위주로 오늘 본문을 보신다면, 마치 바울이 인간을 구원하지 못해 안달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물론 저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이 충만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인간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능력은 좋아합니다. 표적도 좋아합니다. 그러나 능력과 표적을 좋아하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이 살아 있음을 증거해 보려고 그런 것들을 바랍니다.


그러나 자신이 죽은 자임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산자라는 사실은 그렇게도 싫어한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을 통해 보았습니다.


이 땅에서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자들은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그러나 육신의 탐욕에 맞추어 살아가는 자가 있다면 그런 자들을 사람들은 아주 좋아합니다.


여러분들은 십자가가 좋습니까? 싫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