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 증인
고린도후서13:1-13
사람들은 교회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제가 요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종종 만나게 되는데, 그들의 교회에 대한 생각은 굉장히 적대적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교회 다니는 자신의 친구들이나, 아니면 목사가 된 자신들의 친구를 보면 예수님을 믿을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럴까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눈에 비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행위를 보면, 개판이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는 짓을 그 사람들이 그대로 다 한다는 것입니다.
술도 잘 마시고, 심지어 룸살롱 까지 간다는 것입니다.
여자를 왜 그렇게 밝히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요.
이뿐만 아닙니다.
외부에서 보는 교회는 탐욕덩어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이 너무 충격적입니까?
물론 제가 지금 몇 사람의 말을 들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마는 교회 안에 있는 우리가 듣기에 너무나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한 사람 자신도 일전에 교회에 나갔다는 것입니다.
정말 순전한 마음으로 나갔는데, 헌금의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 이름을 일일이 거론해 가면서 헌금확인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제가 해 드리겠습니다.
이 사람은 충실한 유교집안에서 태어 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그 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교회에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는 순전한 마음으로 새벽기도도 열심히 나가게 되었고, 예배도 열심히 참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중 연말에 자신을 갑자기 교사로 임명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사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알면 알수록 이것이 믿음의 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거의 교회는 가지 않고, 혼자 신앙생활을 한다고 합니다. 물론 가끔 교회에 나간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고린도 후서를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듭니까?
오늘날 교회와 비교해 볼 때 어떻습니까?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차이가 별로 없습니다. 아니 똑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은 고린도 교회가 그래도 더 낫다라고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오늘날 교회가 더 낫지 않느냐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오늘날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아니면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바울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가 나와 있습니다.
13장 1절을 봅시다.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갈 터이니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왜 바울이 이런 말을 합니까?
이 말은 마태복음18장에 나오는 예수님을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마태복음18장을 봅시다.15-20절을 보겠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형제가 죄를 범함에 대해 어떻게 처리해야 되는가를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분명 그 대상은 형제입니다.
형제라고 여겨지는 자요 함께 형제자매로 불리든 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은혜를 안다고 하는 자가 죄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바울은 두 번이나 참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 가면 용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말이 너무 심하게 들립니까?
바울이 무엇인데 다시 가면 용서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울의 권위가 아닙니다.
3절을 보세요.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저가 너희를 향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주님의 권위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바울이 약한 모습을 보이니까 우습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이들은 바울을 향해, 이렇게 말했던 모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보이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말한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바울 꼴을 보아하니 별것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의 모습 같으면 우리가 수긍할 만한데, 당신은 항상 약한 모습, 사람들이 보기에 멸시당할 만한 모양으로 살아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서 말씀하시는 말씀을 보여 보라는 것이지요.
보여 보았자 별 것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바울은 의외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저가 너희를 향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희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고린도 교인들은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능력으로 살아나시어 주가 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약한 자 이지만 너희를 향해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주님의 능력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참 성도의 모습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약한 자의 모습으로 이 땅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참으로 볼품없이 살아갑니다.
아무런 힘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약한 자로써 주님의 능력을 행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이 능력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18장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신들의 삶 속에서 그 말씀이 그대로 성취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약한 바울을 통해 두 쪽으로 갈라집니다.
한 쪽은 용서받은 자로, 한 쪽은 용서받지 못한 자로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5절을 말합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주를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이 말씀은 마태복음18장의 말씀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죄에 대해 지적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할 마음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저들 마음에 계시지 않는 것이지요. 이것은 곧 버리운 자의 전형적이 모습니다.
마음이 강퍅한 것입니다.
마치 출애굽기에 나오는 바로 왕과 같은 모습입니다.
바로왕은 여호와의 능력을 눈으로 봄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강퍅하여 여호와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 놓고, 그 십자가를 경험해 놓고, 그것을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참으로 날마다 주님의 긍휼을 구하며 그 은혜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버리운 자가 아닌 증거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계신 증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계신 증거가 무엇입니까?
방금 말씀드린 바로 그것입니다.
마음을 낮추는 자, 겸손한 자, 강퍅하지 않는 자의 모습이지요.
6절을 봅시다.
“우리가 버리운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현재 바울 일행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약한 자의 모습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께로부터 버림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참 성도라면 이런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약한 자로서 이 땅을 살아갑니다.
그러면 바울이 왜 이렇게 극단적인 표현을 합니까?
고린도 교인들이 미워서 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7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오직 우리가 버리운 자 같을 지라도 너희로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그러면서 8절을 말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이 말씀은 다시 마태복음18장으로 가서 보면 알 수 있습니다.
21-35절을 보게 되면 용서 받은 자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말합니다.
지금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을 위해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대적하면 이해가 될 법도 한데 예수님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화가 나지요.
그래서 용서할 마음이 손톱만큼도 없습니다.
저주만 퍼붓고 싶지요.
이게 우리의 심정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이런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용서의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 자입니다.
이렇게 말하게 되면 우리는 또한 이런 의문을 갖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한발 후퇴한 것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지금 심판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심판주이심을 증거하는 증인입니다.
증인으로서 그 긍휼을 마음껏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자신의 입장을 바꾼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이제 다시 가게 되면 완전히 갈라 놓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갈라놓음이 철저하게 용서받은 자로써 그 긍휼을 보여주는 모습으로 갈라놓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10절에 나오는 “내게 주신 그 권세를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의 의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제가 처음에 몇 사람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오늘날 교회의 문제와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차이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런 교회를 향해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합니까?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약한 자의 모습을 보이며 주님의 긍휼을 받은 자답게 그 긍휼을 마음껏 보여 주면서 편지를 끝냅니다.
이것은 바울이 주님의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증인입니다.
주님의 증인은 긍휼을 마음껏 보여주는 자입니다. 약한 자로써 말입니다. 그 죄악을 지적하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