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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26

푸른 섬 2008. 9. 10. 11:05

십자가 은혜 안에 사는 삶

고린도후서13:11-13

바울은 편지를 끝내면서 십자가 은혜 안에 있는 삶이 어떤 삶인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삶이란 도대체 어떤 삶일까요?


첫째로는 기뻐하는 삶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언제 기쁩니까?

사업하든 일이 잘 되었을 때 기뻐합니까?


아니면 자녀가 태어 났을 때 입니까? 자녀가 학교에서 공부를 잘할 때입니까?

아니면 남편이, 아내가 잘 대해 줄때 입니까?


물론 이런 일들로 우리들은 기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지금 말하는 기쁨은 이런 유의 기쁨이 아닙니다.


땅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기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고린도 후서를 보았듯이,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성도들을 책망하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단호하게 죄에 대해 지적하고 있습니다. 물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충분히 드러났습니다.


이런 글 끝에 하는 말이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겠습니다.


여러분의 죄를 일일이 지적하고, 부족한 부분에 대해 권면 한 후, 여러분 기뻐하세요 하면 기뻐하겠습니까?

아마 이 땅을 살아가는 어떤 인간도 기분 나빠 할 것입니다.


이것은 병 주고 약주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입니다.


지금 바울은 성도들의 삶은 기쁨의 삶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기쁨은 인간이 노력해서 주어지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인간의 행위로 인해 주어지는 기쁨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앞서서 이들의 죄와 문제점들을 일일이 지적한 것입니다.

사실 기쁨이란 십자가 지신 주님이 주시는 기쁨입니다.

기쁨의 이유가 자기 죄를 아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성도가 비록 약하고, 죄악 투성이 일지라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한가지 입니다.

바로 십자가 지신 주님의 은혜를 알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자신의 죄를 말씀을 통해 일일이 지적당하면서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놀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합니다.

여러분들, 매주 모이면서 이런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죄인들은 이런 기쁨을 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날마다 얼마나 괜찮은 인간이 되어 가느냐? 아니면 앞서 언급했듯이 이 땅의 소유가 얼마나 늘어나는가? 아니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는가로 기쁨을 누립니다.


지옥가는 자의 전형적인 모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오직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알므로 참 기쁨을 누립니다. 이것은 주눅들어 사는 삶이 아니라 자유로운 삶입니다.

여러분들도 자유로운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주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온전케 되며 라고 합니다.

여러분 방금 제가 주눅들어 사는 삶이 성도의 삶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말하는 온전케 되며 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기가 팍 죽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이 말 앞에 우리는 너무나 부족하고, 아니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개판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준은 누구의 기준입니까?

십자가 지신 주님의 기준이 아닙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첫째 아담을 닮은 죄인들의 기준입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 보세요. 온전케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듭니까?

아무 생각이 안 납니까?


이거 문제 있습니다.

생각 없이 사는 것입니까?

흐르는 강물위에 떠서 흘러 내려가는 낙엽처럼 살아갑니까?


조금은 생각을 해 보면, 죄를 짓지 않는 쪽으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죄를 조금이라도 덜 짓는 쪽, 그래서 날마다 덜 죄인이 되어 가는 쪽으로, 점점 더 온전해 지는 쪽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주의 교리를 보면 성화라는 것이 나오는데,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죄인은 이 땅에서는 온전히 성화를 다이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죽을 때 이룬다는 것입니다. 말이 안 되지요, 인생의 행위가 그쳐지는 것을 보고 완전히 성화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살아 있을 때에는 인간의 행위를 갖고 성화 운운해 놓고, 죽으면 인간의 행위가 없는 것을 완전히 성화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6: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11절을 보세요.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길지어다”

이미 성도는 죽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는데, 무슨 인간의 행위를 운운할 수 있겠습니다.

사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인데.

성도는 날마다 자신이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기면서 살아가는 자가 참 성도입니다.


이 믿음이 없이 자꾸 온전케 되려고 발부둥 친다면 참으로 이런 자는 믿음 없는 자요 성도가 아님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온전케 된다는 말씀의 의미가 어떤 의미인지 우리는 제대로 파악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온전케 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교인들은 자꾸 행위로 믿음을 대체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십자가의 은혜를 자꾸 밖으로 밀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후 세 번째 위로를 받으며라고 말씀합니다.

당연히 위로가 되겠지요.

자신들의 행위를 본다면 도무지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심이 참된 위로가 됩니다.

자기 행위를 바라보는 자가 있다면 결코 바울의 편지가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짐이되고, 부담이 됩니다.


아하, 고린도교회 성도같이 살아서 안 되겠구나.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 그래 저들이 한 나쁜 짓은 하지 않아야 돼. 헌금도 제대로 하고, 세상에서 깨끗하게 살아야지.

이런 식이 되어 버리면 하루하루 사는 것이, 직장 생활하는 것이 너무나 큰 짐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은혜로 내가 산다는 것을 안다면 오히려 모든 것이 감사의 제목이 될 것이요. 모든 것이 주님을 위해 봉사하는 일로서 즐거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봉사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유로움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바울의 말을 통해 우리는 부담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더욱더 분명히 보게 됨으로 위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바울은 네 번째로 마음을 같이 하라는 말을 합니다.

많은 교회에서 이 말씀을 지켜보려고 발부둥 칩니다. 그런데 마음을 같이 하라고 한다고 마음을 같이 할 수 있는 죄인이 아닙니다. 이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게 된다는 말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악을 제대로 아는 자들이 모여 있다면 그들이 당연히 한 마음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억지로 노력한다고 끼어 맞춘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우리 하나 됩시다를 설교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죄악을 다 들추어 내어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렇게 되면 줄서기가 시작 됩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무리들, 회개하는 무리들과, 더욱더 마음이 강퍅해 지는 무리들로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평안할 지어다 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평안을 찾아 일생을 헤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정이, 직장이 돈이, 건강이 자신에게 평안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세요. 이런 것이 다 있어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평안은 어디에서 옵니까?

바로 주님의 사랑에서 옵니다.

요한 일서4:18절을 봅시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스데반 집사가 어떻게 돌에 맞아 죽을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사랑을 온몸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돈으로, 가족으로, 건강으로, 장수로 평안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십자가 사랑을 온몸으로 받은 자로써 참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평안에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아니면 날마다 두려움 속에서 살아갑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인생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는데, 우리는 오히려 죽기를 무서워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내일 우리 사업이 망하면 어떻게 될까? 우리 아이가 갑자기 죽으면 어떻게 될까?

등등. 많은 근심에 사로잡혀 있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우리가 받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감격하고 탄복할 것인데 이 은혜를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가 참으로 근심에 차서 살아가는 하루하루입니다.


여러분 사랑엔 두려움이 없습니다. 참 평안에 있습니다.

죄를 지었다고 불안하지 않습니다.

본래 죄인입니다. 그러니 오히려 십자가의 은혜를 더욱더 깊이 아는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고린도교인들이 만일 바울의 말을 듣고 받아들인다면 얼마나 큰 평안이 찾아오겠습니까?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모든 기쁨과 온전케 됨과 위로와 마음을 같이하는 것과 평안은 오직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가능한 일입니다.

십자가 지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이런 일이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이런 기적을 여러분들이 맛보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