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왕과의 언약
사무엘하 5장1-3
사도행전 5장을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나옵니다.
이들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습니다.
베드로가 아나니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으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5:4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죽었습니다.
그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
그러자 삽비라도 죽었습니다.
좀 심하지 않습니까?
자기 땅을 갖고 팔아서 돈 얼마는 감추고 나머지를 헌금했습니다.
이게 과연 죽을 짓입니까?
하나님께서 꼭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죽이셔야만 합니까?
그야 물을 필요도 없이 죽여야 합니다.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성령을 속였기 때문입니다.
돈을 아까워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핵심은 성령을 속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지금도 살아 계셔서 주님의 역할을 하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을 통해서 말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러했습니다.
정말 주님께서 살아서 자신의 일을 하실까?
즉 교회라는 것이 과연 주님이 친히 세우시고 친히 이끌어 가시는 것이 맞는가라는 말입니다.
그냥 사람들이 득실 거리고 사람들이 말하고 사람들이 활동할 뿐입니다.
나와 다르지 않는 사람이 설교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할 뿐입니다.
모든 것이 사람에 의해 움직입니다.
사람의 생각대로.
주님되신 예수님이 하시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사도행전4장을 보면 성령이 충만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령이 충만한 모습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우리가 보기에 이 일이 성령을 받아야 가능한 일인것 같죠?
그런데 이런 일은 사이비 집단들도 그렇게 합니다.
다른 종교를 가진 자들도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사도행전에 나타난 이런 모습이 성령충만한 모습이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까?
성령충만한 모습이라 볼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이라고 해서 성령충만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령충만하니 이들을 통해 전해지는 것은 이들의 착한 삶이 아니라 십자가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이 전파됩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자신들이 이해하고자 하는대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4장을 보면서 흉내냅니다.
이렇게 하면 성령 충만이 아니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이라고 했을 때에는 반드시 어떤 일을 전하게 됩니까?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게 됩니다. 어떤 행동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보세요.
여러분들의 눈으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보면 믿음이 좋습니까 좋지 않습니까?
성령이 충만한 것 같습니까? 아닙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서로 의논해서 소유를 팔았습니다. 물론 다 판 것은 아닙니다.
소유의 일부분을 팔았겠죠?
자신의 소유 일부분을 판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헌금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판 것의 일부분을 감추었습니다.
자기 소유를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둘다 죽었습니다.
자신의 소유를 자신들이 팔아서 일부분을 감추고 헌금한 것이 죽을 죄입니까?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어떻습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생각이 어떤 생각입니까?
이들은 처음부터 주님은 고려치 않았습니다.
주님이 피흘려 사신 교회를 자신의 임의대로 생각대로 할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내가 마음에 결심하여 헌금하는 것을 누가 알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결심을 바꾸었습니다.
돈이 아까워지기 시작한 것이지요.
물론 처음부터 교회를 우습게 생각한 것입니다.
주님이 세우신 교회를 사람의 뜻대로, 생각대로 세워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 소유의 일부를 팔아 헌금할 때 일부분 감춘다고 해서 누가 알겠느냐는 것입니다.
어차피 눈에 보이는 사도들이라는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이 모든 것을 행하고 움직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거짓말 한 것이 되어 이들은 죽습니다.
요즘 한국텔레비젼을 보게 되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생각대로 t 라고 말입니다.
마음먹은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사람이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그 삶의 내용이 달라지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렇지 않나요?
늘 패배의식에 젖어 있는 사람은 그렇게 살고, 도전정신이 강한 사람은 또한 그렇게 살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이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까?
가만히 있으면 뭔가 달라집니까?
전혀 달라지지 않죠/
교회를 가기 위해 내가 일찍일어나야 하고 아이들을 빨리 준비 시켜야 하고, 그렇지 않나요?
그렇다면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는 어떻습니까?
목사가 설교 준비하고, 성도들이 모이고, 밥 준비 하고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여기 어디에 주님이 하신다는 것이 보입니까?
성령님의 주도하심이 나옵니까?
보입니까? 보이지 않죠.
그러니 아니니아와 삽비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충만이라는 것이 별것 없다는 것이죠.
자신의 행동을 보여주면 되는 것입니다.
아마 이들이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장난으로 소유를 팔 인간 아무도 없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진심이 결국 하나님을 속이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들이 소유를 판 것 모두를 내어 놓아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속이고 성령님을 속였습니다.
오늘날 교회라는 집단이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을 속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인간의 힘으로, 땀으로, 노력으로 만들어 나갑니다.
성경을 잃고 그 말씀대로 행하여 교회라는 것을 만들어 갑니다.
마치 성경에 나오는 모임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이들 속에는 무엇이 없습니까?
한 가지가 없습니다.
심판이 없습니다.
성령충만 하다면 심판이라는 것이 교회 속에 있어야 하는데 죽이는 것이 없다 말입니다.
탈락시키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어쨌거나 붙들어 두고 그래서 헌금 뽑아 내려고 합니다.
교회라는 것을 인간의 집단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교회는 주님이 새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목사 머리에서, 장로 머리에서, 성도 머리에서 만들어 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미 교회는 교회 아닙니다.
지옥갈 집단들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다윗 왕이 이스라엘 모든 장로와 언약을 맺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언약은 다윗왕의 일방적 언약입니다.
이스라엘 모든 장로들은 무조건 다윗 왕 속으로 들어 가야 합니다.
다윗 왕에 의해 죽느냐 사느냐가 결정됩니다.
왜 그런고 하면 이미 하나님께서 다윗왕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성도는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로 세우신 예수님만 전하는 자로 살게 됩니다.
예수님을 전한다는 것은 늘 상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삶입니다.
이미 앞서서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주님의 교회에는 죽음이라는 것이 늘상 살아 활동해야 합니다.
좀 이상합니까?
십자가라는 것이 제거된 모임, 설교는 마귀의 앞잡이에 불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