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과 이방신의 딸과의 결혼
말라기2장10-17
요한복음4장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자는 남편이 다섯, 그리고 현재에도 한명의 남자가 더 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다.
왜 남편이 다섯이나 되었을까요?
결혼하고 이혼하고 결혼하고 이혼하고 결혼하고 이혼하고.....
이 여자 보통사람이 아니지요.
그렇다면 우린 궁금한 것이 있지 않습니까?
왜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을까요?
팔자가 사나와서 그렇습니까?
사람이 왜 결혼을 합니까?
사람이 한 남자를 만나서, 여자를 만나서 결혼을 합니다.
왜 합니까?
필요해서 하는 것입니다.
필요해서 하는 결혼이지 필요없어서 하는 결혼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혼은 왜 할까요?
상대방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니 이혼을 합니다.
이혼하는 이유를 보면 겉으로는 성격차라고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들어가보면 상대가 자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혼을 합니다.
이것은 물질적이든 정신적인든 마찬가지입니다.
물질과 정신을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물질이 만족스럽제 못하면 그것은 곧 정신적으로 영향을 줍니다.
상대방에게 속았다는 느낌을 받았을때에도 이혼을 하지요.
남편이 다섯 있는 여자. 여러분 부럽지 않습니까?
이게 뭐가 그리 부러우냐고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가 볼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고 이방신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이들이 왜 젊어서 취한 아내를 버리고 이방신의 딸과 결혼했을까요?
이것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창세기4장23절을 보겠습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창세기2장24절을 보면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가인의 후손 라멕은 아내가 둘입니다.
아니 둘 이상이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라멕에게 있어서 아내들은 어떤 기능을 합니까?
창세기 4장15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느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리라”
이 말씀과 라멕의 말을 비교해 보면 라멕에게 두 명의 아내가 있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보다 자신이 더 위대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라멕이 보기에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의 상대가 될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뜻으로 두 명의 아내가 그 역할을 합니다.
물론 아내가 세명이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6장 1,2절을 봅시다.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이 일로 인해 3절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무슨 결정을 내리십니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심판을 결정내리십니다.
여호와의 신이 영원히 사람을 떠나는 결정을 내리십니다.
그러면 다시 6장1,2절을 봅시다.
사람의 딸들이 아름다움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푹 빠져버립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아름다움에 빠진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습니다.
또 우리들이 부러운 것이 나옵니다.
아름다운 여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여자를 자신이 원하는대로 다 아내를 삼았다는 것입니다.
여자분들은 흥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자가 있었지 않습니까?
똑 같습니다.
맨날 때리는 남편이 있으면 안때리는 남편이 있었으면 하지요.
돈 못버는 남편이 있으면 돈 잘 버는 남편이 있었으면 합니다.
키작은 남편이면 키 큰 남편 있었으면, 현빈 같은 남편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창세기 6장에서는 원하는대로 다 자 자신의 아내로 삼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신의 등장이지요.
물론 라멕에게서 약간 보였습니다마는 창세기 6장으로 가면 완전히 여호와 하나님과 한판 붙어 보겠다는 행위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이렇게 결혼하는 것이 뭐가 나쁩니까?
이것에 대한 힌트를 4절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네피림이라는 것은 거인족입니다.
힘이 센 사람들이죠.
이 당시에는 힘이 세면 최고 아닙니까?
무슨 총이 있습니까? 핵폭탄이 있습니까?
이런 힘센 거인 용사들이 지배하는 시절아닙니까?
이들에게 모든 권력과 힘이 집중되는 시절아닙니까?
그렇다면 이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필요할까요 필요하지 않을까요?
당연히 필요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보다 더 위대한 사람임을 보여줄 뿐입니다.
이런 결혼의 모습을 두고 창세가6장 5-7절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결혼하는 것이 심판의 이유가 됩니다.
참 신기하죠.
결혼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드셨는데 인간들은 그 결혼을 이용해 여호와를 대적하는 짓을 합니다.
더 나아가서 여호와보다 자신이 더 위대하고 강한 자리에 있음을 만천하에 보여주는 도구로 결혼을 사용합니다.
다시 오늘 본문 말라기 2장을 봅시다.
유다, 이스라엘, 예루살렘, 즉 모든 자들이 가증한 일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 가증한 일이 무엇인가?
이방 신의 딸과 결혼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와 좀 다르지요. 그곳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이 딸들을 원하는대로 취하여 아내를 삼았다고 말씀하시지요.
여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신의 딸과 결혼했다고 합니다.
신의 딸이 어디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이 어디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성경말씀을 찾아보면
욥기1장6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
욥기 2장1절에는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와서 여호와 앞에 서니 "
욥기 38장7절에는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 "
분명하나님의 아들들이 나옵니다.
호세아 1장 10절로 넘어오면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
그리고 로마서로 넘어오면
8장 14절에서는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
8장19절에서는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
9장26절에서는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
물론 예수님이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른 하나님의 아들들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욥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은 궁극적으로 성도들을 묘사한다고 볼수 있습니다.
따라서 창세기 6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참 성도들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이들이 사람의 딸의 아름다움을 보고 모든 원하는 자로 아내를 삼은 행위를 함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들에서 탈락된 것이지요.
그러니 땅엔 사람만 있습니다. 육체만 있습니다.
그러니 심판만이 이들에게 있을 뿐입니다.
말라기 2장에서 이방신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누가 결혼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결혼했습니다.
왜 이들이 이방신의 딸과 결혼했을까요?
이방신이 어떠하길레 이들과 결혼했을까요?
성경말씀을 모르더라도 알수 있는 것 아닙니까?
왜 우상을 섬깁니까?
복이지요.
이방신은 복주는 신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시지 않습니까?
복을 주시지요.
그런데 까다롭습니다.
율법을 지켜야 복이 옵니다.
사람이 만든 조건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조건입니다. 그러니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말씀에 의하면 불가능하죠. 오히려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율법입니다.
이것을 미리 깨달았을까요?
그러니 한쪽발을 이쪽에 담가두면서 쉬운 이방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방신의 딸과 결혼했다는 말은 이스라엘백성들이 원하는 바가 이방신의 딸에게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엔 자신들이 원하는 바가 없습니다.
그러니 원하는대로 이방신의 딸과 결혼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누구를 버리게 됩니까?
누구와 이혼하게 됩니까?
이게 이상하지요.
그냥 처음부터 이스라엘 백성과 결혼하지 않고 그렇게 되면 이혼하지 않고 이방신의 딸과 결혼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제 지금 말라기 말씀을 듣는 자들은 제사장들입니다.
제사장들은 반드시 누구와 결혼해야 합니까?
흠이없는 처녀를 취하여 결혼해야 합니다. 물론 이방여인과 결혼하면 안되지요.
그래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쪽을 보니 더 아름답거던요.
아름답다는 말은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지요.
그 아름다움속엔 권력도 돈도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이방신의 딸과 결혼해야하겠지요.
오늘날 이혼을 쉽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이스라엘로 들어가보면 이혼은 밥먹듯이 합니다.
오늘 본문이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도 젊어서 취한 아내를 버리고 새 장가갑니다.
돈 많은 여자에게 말입니다. 그것이 과부가 되었는지 처녀인지 모릅니다마는.
그러니 오늘 세대가 악하다할 필요 없습니다.
어린양의 죽음이 있는 한 모든 세대가 다 악합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여호와의 성결을 욕되게 하는 행위입니다.
곧 여호와의 언약을 멸시하는 행위이지요.
그런데 이들은 나름대로 방편이 있습니다.
제사는 열심히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젊어서 취한 아내를 버렸고 이혼했고, 이방신의 딸과 결혼했지만 제사장이 해야 하는 일은 열심히 합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이게 죄인의 모습입니다. 이게 인간이 모습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희의 헌물을 돌아보지 않으시고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 않는다고 하니 어떻게 그럴수 있습니까?
왜 우리의 열심과 정성을 받지 않으십니까라고 오히려 반문합니다.
이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완전히 일방적인 노선을 걷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여호와의 말씀을 제사장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나타낼 뿐입니다.
17절을 볼까요.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고도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했습니까라고 오히려 반문합니다.
이들은 모든 행악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선히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공의의 하나님은 없다고 합니다.
우린 이들의 이런 말을 이해해야 합니다.
아니 당연히 이해하지요.
왜냐하면 살아보니 그렇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 늘 들어 보세요.
오히려 이런 마음 들지 않겠습니까?
모든 행악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선히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됩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야기 아닙니까?
로마서에 나오지요.
3장 8절입니다.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지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하니 당연히 이런 주장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제사장들이 율법을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율법도 자신들의 놀이게감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이런말을 하는 것이지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 복음 자체가 놀이게 감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심판주 되시는 주님 없다는 것이지요.
단지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는 신이 필요합니다.
결혼은 처음부터 경건한 자손을 얻기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셨습니다.
결혼이라는 것은 하나의 모형이지요.
이 결혼을 주님되신 예수님과 주님의 영을 받은 자들의 혼례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제사장들은 이것을 미리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 역할에 실패합니다.
이들이 실패했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이 역할을 못한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베소서5장31-33절입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결혼이야기가 그냥 구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들이 한번도 경건한 자손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구약이든 예수님이 오셔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들은 오직 자기 자신이 신의 위치에 있기를 바랍니다.
아내를 사랑하라, 남편을 경외하라.
이 말씀은 우리 자신들을 더욱더 죄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남편이 아내가 될수 없고, 아내가 남편이 될수 없기때문입니다.
사랑의 기준이 다르고, 경외의 기준이 다릅니다.
각자가 갖고 있는 기준이 있기에 사랑했다고 말해 보아도, 경외했다고 말해 보아도 소용합니다.
단지 자신이 마음에 들면 사랑이고 경외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런 심심풀이 땅콩처럼 들려지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니 결혼한 자들은 결혼생활을 통해 평생 십자가의 피만 바라 볼 수밖에 없습니다.
결혼이든 이혼이든 아내가 둘이든 셋이든, 넷이든, 남편이 다섯이든 십자가의 피가 덮쳐진 자는 복받은 자입니다.
그러나 결혼생활이 아무리 행복하다고 해도 십자가의 피가 필요없는 자는 저주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중에 아내가 가장많은 사람 누구입니까?
솔로몬아닙니다.
도대체 아내가 몇 명입니까?
열왕기상11장에 보면 왕의 후비가 칠백명이고 빈장이 삼백명입니다.
그런데 그는 인생자체가 헛됨을 알았습니다.
그 인생전체를 통해 인생이 헛되면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이 헛되지 않음을 전했습니다.
아마 삶을 좀 괜찮게 사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 들으면 화가 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생을 개판쳐야 합니까?
개판 치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증인으로 살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