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라임 지파의 노여움
음성설교
사사기7장24-8:3
오랜만에 짧은 본문을 봅니다.
먼저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전쟁의 승패는 이미 갈라졌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드온과 삼백 명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치러 온 미디안과 아말렉, 동방사람들끼리 서로 칼로 죽이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니 이들이 도망을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기드온이 사자들을 에브라임 온 산지로 보내어 에브라임이 해야 할 일을 명합니다.
명령이 떨어지자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다 모여 벧 바라와 요단강에 이르는 수로를 점령했습니다.
미디안 연합군이 도망가는 퇴로를 막은 것입니다.
그 결과 두 장군 오렙과 스엡을 사로잡았습니다. 오렙은 오렙 바위에서 죽이고 스엡은 스엡 포도주 틀에서 죽였습니다. 그리고 오렙과 스엡의 머리를 요단 강 건너편에서 기드온에게 가져 왔습니다.
오렙과 스엡이 죽은 장소 이름이 오렙 바위 스엡 포도주 틀입니다.
왜 이것을 기록하셨을까요?
성경에서 이런 이름이 나올 때 생각을 좀 많이 하셔야 합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의 명령을 기다렸다는 듯이 수행하여 임무 완수합니다.
그리고 기드온과 다툽니다.
8장1절입니다.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 같이 대접함은 어찌 됨이냐 하고 그와 크게 다투는지라”
에브라임 사람들이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그 의도가 보입니까?
에브라임이 전쟁에 참여한 시기는 언제입니까?
전쟁의 승패가 끝난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 전쟁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습니다.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나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찌됨이냐 라는 말의 뜻을 아시겠습니까?
왜 전쟁의 공로를 너희들만 취하느냐? 이런 뜻입니다.
왜 우리만 빼고 전쟁의 공을 너희들만 가지느냐라는 말입니다. 우리들도 처음부터 불렀다면 열심히 전쟁에 참여하여 승리의 영광을 함께 누릴 것인데 왜 우리만 쏙 빼 버렸느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 삼백 명의 사람들 중에 어느 지파라는 말이 나옵니까?
물론 므낫세, 아셀, 스불론, 납달리 지파 사람들이 섞여 있겠지요. 아니면 한 지파에 편중되었든지.
중요한 것은 전쟁에서 어떤 한 지파가 , 아니면 이들 지파들의 연합군이 전쟁의 승리를 가져 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삼백명을 남기셔서 전쟁의 승패를 가르신 이유를 몰라요.
23절을 보면 미디안군사들이 도망할 때 납달리, 아셀, 므낫세 사람들이 기드온의 부름을 받고 잔당소탕을 버립니다. 물론 잔당을 모두 죽이는 일이지요.
그러나 이미 전쟁의 승패, 공로는 이미 누구에게 돌아간 상황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간 상황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전쟁의 승리를 여호와 하나님께만 돌리는 행위가 됩니다.
문제는 에브라임 지파입니다.
이들은 이것을 몰라요.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왜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느냐? 우리를 이렇게 대해도 되느냐? 우리를 이렇게 불쾌하게, 기분 나쁘게 해도 되느냐?
그래서 기드온과 크게 다투게 됩니다. 마치 기드온과 한판 붙어볼 기세입니다.
그 정도로 에브라임 지파가 화가 났다는 말입니다.
왜 화가 났는지 말씀드렸지요.
전쟁승리의 영광을 자신들도 갖고 싶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기드온이 뭐라고 합니까?
한수 가르쳐 줍니까 아닙니까?
한수 안 가르쳐 줍니다.
8장2,3절을 보세요.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 행한 일이 너희가 한 것에 비교 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넘겨주셨으니 내가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가 한 것에 비교 되겠느냐 ”
기드온이 어떻게 말했습니까?
에브라임지파를 한껏 치켜 세워줍니다.
이렇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미 에브라임 지파가 어떻게 나올 것인지를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손에 오렙과 스엡을 넘겨주신 것입니다.
기드온이 에브라임 지파를 이렇게 치켜 세워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전쟁의 승리를 깔끔하게 마무리 지으면 안 됩니까?
왜 에브라임지파 같은 반응을 그대로 내버려 둡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왜 에브라임 지파의 행동을 그대로 받아주시고 성경에 기록해 두셨을까요?
다시 7장25절로 가 봅시다.
오렙과 스엡이 죽은 장소이름이 무엇입니까?
오렙 바위, 스엡포두주틀입니다.
이들이 죽은 곳의 이름이 새겨졌습니다.
그 이유를 8장1-3절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미디안 손에서 구원하신 그 구원의 공로를 자신들에게 돌렸다라고 땅에 팍 새겨 놓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전쟁의 승리는 누가 보아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승리케 하셨음을 보여주십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에브라임과 같은 사고방식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결코 오렙과 스엡 장군과 싸워서 이길 수 없습니다.
즉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에브라임 지파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여기에 집어넣었습니다. 또한 기드온이 그들을 치켜 세워주는 장면도 집어넣었습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하는 자가 아님을 드러냅니다.
틈만 나면 자신들의 영광을 꿈꿉니다.
이들이 언제 노여움이 풀립니까?
기드온의 말을 들은 후에 노여움이 풀렸습니다.
노여움이라고 했지요. 이들은 기드온에게 분노를 했습니다.
그러니 기드온이 자신들을 한껏 높여주는 말을 듣자 분노가 풀렸습니다.
자신들이 영광을 받은 후에야 분노가 풀렸습니다.
만일 전쟁에서 졌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부리지 않아서 전쟁에 패했다고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이들의 마음은 자신들의 영광만 생각합니다.
마태복음20장20-28절을 봅시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세베대의 아들들이 누굴까요?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어머니의 자식 사랑이 유별났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는 것까지 받아 드렸습니다.
엄마 입장에서 마음이 어떠했을지 부모라면 이해하시겠지요.
예수님을 위해 전 뭐든지 다 버립니다. 라고 하면 부모님들이 뭐라고 할까요?
엄마는 여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곳까지 찾아옵니다.
그리고 요청합니다.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소서
왜 이런 말을 하는 지 아시겠지요.
나의 두 아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면 주의 나라에서는 하나는 주의 우편, 하나는 주의 좌편에 있을 만하다는 것입니다.
고생한 보람을 찾게 해 달라는 것이지요.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세베대의 두 아들들이 대답합니다. 마실 수 있습니다.
알지 못한다고 하는데도 마실 수 있다고 합니다.
왜 이말을 했는지 아시겠지요?
어머니의 마음이 어찌 우리의 마음과 똑 같습니까?
저도 주의 자리에서 주의 우편에, 주의 좌편에 앉고 싶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이들이 생각하는 주의 우편, 주의 좌편의 의미가 어떤 의미인지 아시겠지요.
좌의정, 우의정, 영의정 같은 것입니다. 임금 다음 자리를 말하는 것이지요.
막강한 권세를 부릴 수 있는 자리, 명령 내릴 수 있는 자리.
왕은 될 수 없으니 그 다음 자리는 내가 차지해야겠다는 마음입니다.
그러니 에수님의 말씀은 무조건 오케이입니다.
내 욕망, 내 꿈이 이루어질 수 있으니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들이 지금까지 예수님을 따랐던 그 본심이 드러나지요.
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까?
한 자리 차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아주 애매합니다.
23절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참으로 애매하지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천국에는 주님 계시고 그 다음 자리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 말씀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 말씀으로 인해 24절을 보면 다른 열 제자의 반응이 나오게 됩니다.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저에게 이런 말을 할 것입니다.
그래도 분명 예수님께서 좌우편에 앉는 자가 있다고 말씀하지 않습니까라고할 것입니다.
그러나 25-28절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모든 초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이 마시는 잔에 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시는 잔에 앞서서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이방인의 집권자들, 그 고관들이 하는 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임의로 주관하고 즉 자기 하고싶은대로 권력을 막 휘두른다는 말입니다. 이들의 권세를 이런 식으로 부립니다.
그런데 너희들은 어떠해야 한다고 하십니까?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참 어려운 말씀입니다.
크고자 하는 자는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섬기는 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면 됩니다.
이게 왜 어렵다고 하냐고요?
섬기는 것이 어려워서, 종이 되는 것이 힘들어서.
아닙니다.
보세요. 크고자 한다는 마음 자체가 이미 어떤 마음입니까?
이방인의 집권자들 고관들의 마음 아닙니까?
그러니 이들이 섬기고, 종이 되는 것 자체는 이미 이방인의 집권자들의 마음, 고관들의 마음을 다르게 보여줄 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틀림없이 이렇게 마음을 먹었을 것입니다.
그래 이제 섬기는 자가 되고, 종이 되어 살겠다고 말입니다.
이렇게 살면 무엇이 보장됩니까? 으뜸, 큰 자가 보장됩니다.
그런데 28절을 봅시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말씀을 제자들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또 무슨 생각할까요? 그래 우리도 예수님처럼 죽자, 그러면 한자리 주시겠지.
이게 육으로 성경을 보는 것입니다. 성령 받지 못한 자가 성경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십니까?
왜 섬기는 분으로 오셨습니까?
바로 지금 제자들이 갖고 있는 사고방식 때문입니다.
크고자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고방식, 이방인의 집권자들처럼 권세를 한 번 부려 보겠다는 자들 때문에 예수님께서 대속물이 되셨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제자들의 생각이 여기 앉아 있는 우리들의 생각입니다.
에브라임의 생각이 우리들의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영광만 관심이 있습니다.
나의 영광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종도 될 수 있고 섬기는 자도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의 사고 방식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제자들이 예수님이 마시는 잔을 마시게 됩니다.
어떻게 마시게 될까요?
지금 우리가 보는 본문을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나는 으뜸이 되고자 하고 예수님을 믿고 한 자리 얻으려고 하는 그런 죄인이었습니다.
이런 인간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대속물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죄용서함을 받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대속물 되신 그 예수님이 주님이십니다를 전함으로 말미암아 이들은 사람들로부터 미움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잔을 마신 것은 그들의 결심, 노력이 아닙니다.
대속물 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 말미암아 십자가 복음을 전합니다.
에브라임의 분노와 제자들의 분노를 말씀 속에 남겨 두시면서 구원해 주신 이유는
오직 인자가 어떤 분이신지를 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여기에서 많은 사람들은 누굽니까?
바로 분노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자들입니다. 영광을 자신들에게 돌리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목숨을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늘 나의 영광만 꿈꾸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의 대속물되심이 우리를 덮쳐옵니다.
그래서 전하는 것이, 믿는 것이 예수님의 대속물 되심을 전합니다. 물론 나는 늘 나의 영광만 생각하는 자입니다를 말하면서 말입니다.
오늘 사사기7장24절 이하와 마태복음20장20절 이하를 보면서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죄악의 깊이가 드러납니다. 또한 이 가운데 예수님의 대속물 되심으로 구원의 은혜가 제대로 드러납니다.
성도는 말씀을 대하면서 이 은혜의 깊이를 알아가는 인생입니다.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외침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