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성듣기
사사기10장1-16
1,2절은 잇사갈 사람 도도의 손자 부아의 아들 돌라가 이십삼년동안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음을 말씀하십니다.
3-5절은 길르앗 사람 야일이 이십 이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음을 말씀하십니다.
야일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한 가지를 더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들 삼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 삼십을 탔고 성읍 삼십을 가졌는데 이 동네 이름이 하봇야일입니다. 즉 야일의 동네라는 뜻입니다.
왜 이렇게 간단하게 돌라와 야일을 기록하셨을까요?
이들에겐 사건이 없었을까요?
있었겠죠. 그러면 왜 이렇게 간단하게 기록했을까요?
지금 돌라와 야일은 누구 뒤에 나옵니까?
기드온 뒤에 나옵니다.
야일의 경우 기드온과 비슷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들 삼십명, 기드온은 몇 명이었습니까? 칠십한명.
이렇게 기록하심으로 말미암아 돌아와 야일 사사의 모습이 기드온과 별로 다르지 않았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짧게 기록된 사사들의 이름이 있는 이유는 앞 사사의 삶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하셨습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이 얼마나 크신 가를 또한 말씀하시고자 함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사들을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6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이 말씀이 이해가 됩니까?
해도 너무하지 않습니까?
신이란 신들은 다 섬깁니다. 누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을 경험한 사람들입니까?
사사들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합니까 하지 않습니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호와를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지 않습니다.
지금 우상이 몇 종류입니까? 바알들, 아스다롯, 아람의 신들, 시돈의 신들, 모압의 신들, 암몬자손의 신들,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
이들 신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도움이 되었을까요 되지 않았을까요?
도움이 안 된다면 왜 이 신들을 섬길까요?
당연히 도움이 되었겠죠?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기든 신들의 백성들 즉 블레셋과 암몬 자손의 손에 이들을 파셨습니다.
도대체 애굽생활을 몇 번 하고 있습니까?
요단강 동편쪽 즉 아모리 족속의 땅이 있는 이스라엘 자손은 십팔 년 동안 억압받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아모리 족속을 진멸하고 그곳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을 차지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어떻습니까?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압제로 인해 이들은 흩어져 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암몬 자손이 요단을 건너서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 족속과 싸웁니다.
남쪽 지파들의 곤고가 엄청 심했습니다. 얼마나 심하면 여호와 하나님을 찾을까요?
10절을 봅시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그렇다며 지금까지 무슨 신을 찾았을까요?
여호와께 부르짖기 전까지는 어떤 신을 찾았을까요?
11-13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시되 내가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에게서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였느냐 또 시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마온 사람이 너희를 압제 할 때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므로 내가 너희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였거늘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여기에서 애굽은 암나오는 애굽입니다. 아모리 사람은 민수기21:21-26절에 나옵니다. 아모리왕 시혼이 이스라엘이 자신의 영토로 지나가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쳤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이 칼날로 그들을 쳤습니다.
암몬 자손의 경우 사사기3장12에 보면 모압왕 에글론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사사 에훗을 통해 이들은 압제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블레셋 자손은 사사 삼갈 사사기3장31절에 나옵니다.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소 모는 막대기로 죽였습니다.
사사였다는 말은 이스라엘을 블레셋 손에서 건져내 주셨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시돈 사람의 경우 성경에 언급되지 않았지만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들로부터 구원해 주셨음을 말씀하십니다.
아말렉 사람의 경우 사사기 6장을 보면 아말렉이 미디안과 동방 사람들의 연합군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할 때 기드온을 통해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온사람이 압제할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음으로 여호와께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마온 사람은 역대하 26장7절과 역대하20장1절을 볼 때 이들이 미디안족속이지 않나 추측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셨지만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구원해주신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13절하반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않겠다는 말씀입니까 아니면 다른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너희들은 압제받아, 꼭꼭 쥐여 짜여 비틀어지고 흩어져도 마땅한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니 주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 우리를 건져 주옵소서.
최후의 기도가 아닙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결정을 내려졌습니다.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않겠다는 결정입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이 우리가 범죄했다고 인정합니다. 그래서 주께서 보시기에 좋은대로 우리에게 행하십시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를 건져 주옵소서.
그리고는 16절입니다.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이들이 기도한 후에 무엇을 했습니까 여전히 이방 신들을 섬겼습니까?
아닙니다. 주의 처분만을 기다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를 건져달라고 기도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들 가운데 이방신들을 제하여 버립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셨습니다. 즉 마음이 슬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여느 본문과 좀 다르지 않습니까?
사사기 앞부분을 보면 3장7절에 메소포타미아왕 구산 리사다임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15절에 모압왕 에글론으로 인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4장3절에서도 가나안왕 야빈으로 인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 6장6절에는 미디안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좀 다르지요.
상당히 심각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추적해 들어가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이전과 달리 우상숭배가 극에 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여호와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엄청난 압제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지금은 압제는 이전과는 도무지 비교할 수 없는 압제입니다. 빨래 물을 짤 때 쥐어틀어 짜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압제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이들이 10장10절에서처럼 주께 범죄하였다라고 항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여호와 하나님의 반응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여호와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무슨 사람처럼 삐지시느냐 말이지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삐치신 것이 아닙니다.
13,14절을 봅시다.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너희의 환난 때에 그들이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하신지라”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백성들이 섬긴 우상들이 이스라엘을 환난에서 구원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니 너희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들은 헛된 신을 섬겼다. 환난 날에 전혀 도움 안 되는 우상을 섬겼다. 이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아.
그런데 너희들을 그렇게 구원해 주었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우상을 섬겼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아.
이런 의미입니다.
여기에 대해 우리라면 어떤 반응을 하겠습니까?
그래 여호와 하나님 잘났다. 나 당신 안 섬길 거야. 당신 마음대로 해 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도와 주지 않겠다는 신을 섬길 이유가 있을까요?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이나 바알신이나 똑 같잖아요. 그러니 내 마음대로 살겠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런 모습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주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옵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 우리를 건져 내옵소서.
얼마나 뻔뻔합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이런 이스라엘 죽어 마땅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느냐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배은망덕한 놈은 지옥가야 마땅하다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뻔뻔했습니다.
이들은 더 이상 압제에 못 견뎌 죽을 때가 되어서야 여호와 하나님께 회개하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한번 보세요. 10절에 보면 우리가 주께 범죄했다고 해 놓고 왜 자기 가운데 있는 이방신들을 제거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같으면 이방신들을 먼저 제거하고 우리가 주께 범죄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구원해 주세요라고 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들은 마음을 먼저 돌렸던 것입니다. 그러니 우상을 제거하는 일은 별 문제가 없습니다.
결국 이들의 이러한 태도가 여호와의 마음이 이들을 긍휼히 여기는 모습으로, 불쌍히 여기는 모습으로 바뀌게 했습니다.
자 이렇게 되면 문제점이 하나 생깁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이키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해서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결정을 달리하신다라고 말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은 내가 하기 나름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옛날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누구나 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무당을 믿는 자들이나 부처를 믿는 사람이나 아니면 조상신을 믿는 사람들이나 항상 이들이 갖고 있는 법칙이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화도 올수 있고 복도 올수 있다고 말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을 그렇게 볼 수 있을까요?
출발점을 보세요.
출발점이 어디입니까?
그들이 회개에서 출발합니까 아니면 출애굽에서 출발합니까?
출애굽입니다.
애굽에서부터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애굽에서 바로가 어떤 짓을 했는지도 있지만 이스라엘이 어떤 짓을 했는가도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그러니 여기 약속의 땅에 들어오게 된 것은 이스라엘이 회개했기 때문에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여호와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 말씀을 그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인간의 회개로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하신다면 그것은 그야 말로 착각입니다.
지금 여호와 하나님께서 대하시는 상대가 누굽니까?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은 이스라엘입니다.
이들의 삶은 끊임없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전하는 삶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이스라엘을 극한에 처하게 하셔서 이들 속에서 나와야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 즉 유월절 어린양의 피밖에 없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들이 평소에 그렇게 좋아하던 것들을 다 회수해 가시고 견딜 수 없는 압제 속에 두심으로 말미암아 이들의 처음 출발점,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을 다시 보게 하십니다.
요한복음15장18-1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오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이 압제받는 이유는 자기 죄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가 미움 받는 이유, 압제 받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자기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입니까?
예수님 때문입니다. 성도가 왜 예수님 때문에 미움 받습니까?
예수님의 택함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택함을 입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회개해서, 착해서, 옳은 일을 해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의 피를 전하도록 택함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회개, 착한 일, 옳은 일과는 거리가 멀어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도 나는 고기잡으로 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먹고 살아야겠지요.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 마음속에 없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으로 이들은 주님되신 예수님의 증인이 됩니다.
주님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이들에게 부어 주셨기에 이들이 전하는 내용은 한결같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주님이 되셨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너희’속엔 자신들도 들어가 있지요.
이들이 전하는 것은 자신들이 믿는 바를 전하는 것입니다.
압제 받는 이유가 달라졌습니다.
성도가 압제 받는 이유는 오히려 부르짖기 때문에 압제받고 미움 받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지할 뿐은 여호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그 부르짖음.
오늘날 성도들은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예수님밖에 의지할 분 없다는 그 믿음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미움당하고 핍박을 받습니다.
또한 히브리서12장에 보면 징계가 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이스라엘이 징계를 받았듯이 성도에게도 징계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을 철저하게 징계하시는 장면중 한 장면입니다. 그 징계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님만 의지하게 됩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징계가 있습니다. 성도에겐 다 징계가 있습니다.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일들을 오히려 감사하게 받으셔서 주님만 더욱더 의지하는 주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니 성도는 정신이 없습니다. 징계도 있고 핍박도 있고. 그러니 이 둘 모두 주님의 십자가만 자랑토록 이끈다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