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목사가 자기 아내가 허리 디스크로 너무 아프다고 친구 목사에게 이야기 했다.
그러자 친구 목사는 허리 디스크에 좋은 운동을 열심히 찾아서 어느 목사에게 알려 주었다.
그러자 그 목사는 정보에 감사하다면서 이렇게 글을 썼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는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위해 날 때부터 소경 되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소경의 부모 마음이 어떨까? 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그 당사자의 심정은? 비록 예수님께서 눈을 뜨게 해 주셨지만 그 동안의 세월은 누가 보상해 주나?
그 부모는 왜 하필 나에게 소경된 자식을 주셨을까? 많고 많은 사람 중에.
그런데 소경은 구원을 얻었다. 예수님이 자신의 피로 구원해 주시는 주님이심을 보여주기 위해 소경으로 태어 났고 구원을 얻어, 그 당시 사람들을 심판하는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성도의 자리가 이러하다.’
라고 말하니 친구 목사는 화를 버럭 내면서 욕을 한다. 그래 너 잘났다.
범사에 감사하는 이유는 성도는 범사에 십자가와 만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친구 목사는 범사에 십자가와 만나는 것이 싫다. 짜증날 뿐이다. 아플 때는 위로해 주고, 기도해 주고, 좋은 약 지어 주고, 운동 방법 알려 주는 것이 오히려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에 대해 고마워하고 감사하고, 함께 기도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십자가 빼고 이야기 하자고 한다.
그러면서 버럭 화를 내고 욕을 하면서 느닷없이 이근호 신학을 욕한다. 자신은 예수님의 십자가 신학이라고. 그러면서 자신은 십자가신학에도 미쳐보고, 부활신학에도 미쳐보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제는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을 만났다고 한다.
그래서 그 친구 목사에게 한마디 했다.
공의와 사랑의 기준이 십자가 피 라고.
그러자 욕을 하며 가 버렸다.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