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강해

창세기39장20-40장4

푸른 섬 2007. 7. 16. 12:42
 

형통케 하심

창세기39장20-40장4

이전 야곱과 함께 하시던 하나님과 지금 요셉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내용적인 면에 있어서 완전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이전 야곱과 함께 하시던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뜻과 의지대로 그가 원하는 것을 다 이루어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후에는 그의 뜻과 의지가 절대적으로 꺽여 버렸습니다. 과거 당당했던 모습을 볼 수가 없고, 아들들이 오히려 그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습니다.


지금 요셉은 자신의 평소 행동과 꿈으로 인해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애굽까지 팔려 왔고,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렸습니다. 보디발이 비록 애굽사람이지만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과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습니다.


결국 주인 보디발의 은혜를 입어 가정총무로 삼았고 주인의 모든 재산을 주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집에 복이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의 요구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누명을 입고 이제는 종의 신분에서 죄수의 신분이 되었습니다.


정말 야곱과는 다른 인생을 살지요.

물론 부분적으로는 일치하지만, 야곱이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았다면, 요셉은 전혀 자신의 삶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꼬여감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요셉이 옥에 갖혔지만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내용입니다. 왕의 죄수들이 갖히는 곳에 갖힌 것을 보면 보디발이 요셉을 특별대우 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특히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은  정치범들과 같은 중대한 죄를 지은 자나 신분이 높은 죄수들만이 갇히는 곳이라고 합니다. 고대에는 범죄 발생시 그 자리에서 즉형에 처하거나 상해(傷害) 배상을 물리는 것이 관례로서 옥에 가두어 두는 자유형은 거의 실시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 데 이곳에서도 여호와께서 요셉이 전옥으로부터 은혜를 받게 하셔서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겼습니다. 전옥은  요셉의 손에 맡긴 것에 대해서는 일체 간섭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함께 하셔서 범사에 형통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일이 발생 하려는 듯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요셉이 있는 옥으로 오게 됩니다. 요셉은 이들을 섬기게 됩니다. 우리번역에서 섬긴다라고 나왔는데 시중든다는 표현이 적절합니다.


섬긴다라는 표현을 하게 되면 마치 주님의 은혜로 봉사한다는 표현이 될 오해가 있습니다.

당연히 요셉의 처지를 생각하면 왕의 시종들을 섬기는 위치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같이 감옥에 있고, 아무리 모든 것을 맡았다 하더라도 종은 종일 뿐이요, 왕에게 떡 맡은 자의 수장, 술 맡은 자의 수장에 비하면 아주 하찮은 신분입니다.


요셉은 정말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 비비꼬일줄을 몰랐습니다.

우리들이 보기에 요셉이 비록 인생이 꼬였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형통케 해 주시지 않았습니까라고 말씀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너무 낭만적으로 읽으시면 곤란합니다.


여러분 요셉의 삶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형들로부터 미움 받아 노예로 팔려온 인생이 시위대장 집에서 집사를 해 보았자 여전히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종일 뿐입니다.


또한 보디발의 아내로 인해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은 어떻습니까?

우리들 같으면 억울한 누명을 벗겨 주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요셉의 결론을 알기에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이것으로 인해 요셉은 다시 감옥으로 갑니다.

감옥에서도 여호와께서 범사에 형통케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감옥에서 형통해 보았자 여전히 감옥아닙니까?

우리는 쉽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요셉은 좋겠다 하나님께서 범사에 형통케 해 주셔서.


일이 술술 잘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이 요셉처럼 형통한 삶이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속으로 들어가 보면, 아무리 형통해도 여전히 그의 신분은 종일 뿐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어떤 유혹을 받는고 하면 나도 요셉처럼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야곱의 인생과 달리 요셉의 인생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낯선 삶을 산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요셉을 이런 인생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게 하셨는가?


그것은 주의 의미가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한 삶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요셉의 삶은 요셉 자신의 삶이 아닙니다.

여호와께 완전히 빼앗긴 삶입니다.


요셉의 성격도 문제가 있지만 꿈을 자신이 꾸고 싶어서 꾼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꿈을 꾸게 하셨고 그 꿈을 여호와께서 어떻게 성취하시는가를 보여주는 도구로서 요셉은 사용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로 장차 오실 약속의 자손 되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증거하는 삶입니다.


더 크게 보면 요셉에게 꿈을 꾸게 하신 이유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어떻게 성취하실 것인가를 요셉의 삶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언약이라는 것은 결코 야곱처럼 자신이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친히 성취하신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자신의 인생을 자신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이끄시는대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먼저 예수그리스도께로 달려 가야 합니다.

왜 그런고 하면 성경말씀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들은 무슨 일이든 자신 마음대로 하신 일이 없으십니다.

요한복음5장19절을 보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30절에서는 예수님 자신이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셔서 하신 일을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일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다 이룸이라는 것은 아버지의 뜻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예수님이 주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 주님은 친히 지옥 보낼 자와 천국 보낼 자를 나누시는 일입니다.


바로 이 일을 증거하기 위해 요셉의 삶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어떻습니까?

요한복음16장13,14절을 보면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성도들에게 알려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성령을 받은 자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누구의 증인입니까?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요셉과 같은 삶을 산 사람이 나옵니다.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아는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 나름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난리를 쳤습니다.


그러나 다멕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의 삶의 결코 그가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요셉과 또다른 삶이라 보여집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성령을 따라서 움직입니다.


요셉은 그의 행동들이 형통의 근거가 되었다면, 사도바울은 오직 복음으로 형통한 삶을 살았습니다.

요셉은 일들이 술술 풀리는 모습을 보이지만 사도 바울은 일들이 술술 풀리는 것 같지만 종국적으로 감옥에 갇혀 죽임당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빌립보서 4장12-13절을 보면 바울의 삶이 나와 있습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십자가 지신 예수님 안에서 비천에 처하여도 , 풍부해도, 배불러도, 배고파도, 궁핍해도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합니다.


요셉은 이런 삶이 아니지요. 술술 풀리는 삶입니다.

종이어도 종이 아닌 삶, 죄수가 되어도 죄수가 아닌 삶.


바울은 어떻습니까?

그렇지 않죠. 육신적으로는 실제로 어려움을 당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인해 그는 모든 것을 감당하는 삶, 자유로운 삶, 풍성한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들이 요셉과 사도바울을 보면서 누구의 삶을 닮고 싶어 합니까?

요셉입니까 사도바울입니까?


사도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지요.

그런데 요셉을 닮고 싶다면 땅의 문제로 끌어 내려야 합니다. 땅의 문제가 술술 풀리는 것이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신약성경에 어떤 사람도 땅의 문제가 술술 풀렸다는 사람이 나오지가 않습니다.

병이 나았다, 눈을 떴다. 앉은 뱅이가 일어났다. 표면적으로 보기엔 땅의 문제가 술술 풀린 것 같지요.

그러나 그들의 삶이 어떠했을까요?


사도들도 죽임을 당하고 유배를 당하는 판에 이들의 삶이 어땠을까요?

오히려 땅의 문제는 더 꼬이는 쪽으로 갔습니다.


고난당하고 핍박당하고, 죽임당하고.

여러분 성도는 십자가 지신 주님의 영인 성령을 받은 자입니다. 그렇다면 그 삶이 어떤 삶으로 펼쳐질까요? 요셉처럼 원하지 않는 삶으로 펼쳐질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처럼 술술 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기뻐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런 모든 삶 중에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어떤 상황에 처하더러도 예수님만이 주님이심을 증거하도록 주께서 형통케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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