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강해

강해 48

푸른 섬 2008. 12. 1. 20:38

원수 갚는 것은 주님께 있다

사무엘상24장1-7

사람이 원수를 만나면 그냥 평안히 보내 주겠습니까?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니고 사울왕이 다윗에게 한 말입니다.


사람의 본성이 그렇죠?

원수를 만나면 그냥 보내 줄수가 없습니다.


물론 자신이 힘이 없다면 할수 없겠지만, 얼마든지 원수를 제거할 , 원수를 갚을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보내 준다면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습니까?


물론 이것은 단순히 원수다가 아니라 목숨을 잃느냐 얻느냐에 대한 원수관계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다윗이 사울왕을 죽일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다윗이 어떻게 합니까?


다윗은 단지 사울의 겉옷자락을 베는 것으로 끝냅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기 때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참으로 어려운 말입니다.

사울같은 왕도 여호와께서 기름부으신 왕의 자격이 있느냐로 우리는 반문합니다.


이미 제가 수차례 설교했지만 사울왕은 이미 버림받은 왕의 모습을 보이는 역할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얼마든지 사울왕을 제거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보여주어야 하는 역할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보여주기 위해 다윗은 다윗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원수를 친히 갚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모두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보여주어야 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요셉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꾸게 해 주신 꿈과 꿈의 해석으로 인해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죽음의 자리로까지 나아갑니다.


그런데 고생고생하여 죽음의 위기를 넘겨 강력한 나라의 총리대신이 된 그가 형들에게 취한 행동은 너무나 의외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형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을 죽이려는 형들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믿음아닙니까?

신앙인은 개개인의 한을 푸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를 증거하는 살게 되는데 그 누구는 다름 아니라 바로 십자가 지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시어 주가 되셨습니다.


주님되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요셉은 자신의 삶을 고생고생하며 총리대신까지 하며 나그네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지요. 그의 삶이란 그의 삶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다윗이 자신이 왕위에 오를때 그 왕위를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앞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이요, 아무리 보아도 자신이 불리한 위치에 있는 다윗인데 이런 것까지 계산했겠습니까?


물론 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인생으로 살게 하셨다는 것에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런 인생이라면 살고 싶습니까 살기 싫습니까?

살고 싶지 않죠.


이렇게 되면 우리의 울분과 원한을 어떻게 참고 살아가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이 울분과 원한을 다르게 풀려고 합니다.

갚아 달라는 것지죠.

무엇으로, 


원수가 바뀌도록, 마치 사울이 울면서 다윗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런 태도가 자신의 원수로부터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아니면 많은 돈을 보상으로 받든지, 높은 지위를 얻든지, 아니면 자녀가 잘 되든지.


이렇게 함으로 자신의 한을 풀기를 원하고 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나 다윗의 삶의 본질적인 모습인 예수님의 삶을 보면 어떻습니까?

이런 것이 없다는 것이 우리를 당황케 합니다.


이 땅에서 천국으로 자리 이동을 해 버리는 것이 우리를 당황케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셉의 삶을 더 사랑하고, 다윗의 삶을 더 그리워하고 그들의 삶을 살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삶이 부럽습니까 아니면 요셉이나 다윗의 삶이 부럽습니까?


당연히 요셉이나 다윗의 삶이 부럽습니다.

이유는 그들에겐 이 땅에서 무언가 받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말하고는 곧장 성경의 인물에 관심을 둡니다.

물론 스데반 집사님과 같은 사람은 제외 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원수를 한번 갚아 보겠다고 덤벼드는 것입니다.

목사는 목회과정이 어렵지만 언젠가 이 원수를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죠.


내가 지금 이렇게 충성봉사하면 주님께서 물질로 정신적으로 모든 것을 충분히 보상해 주시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로마서12장19절 이하를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갚는 것은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니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 말씀이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해당사항이 있습니까?


있는 것 같습니까?

없습니다. 

이럴 인간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어떻게 그렇게 했습니까?

그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입니다.


신약시대로 말하면 주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으로 악을 이기는데 이 땅에서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이기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까?

죽는 것입니다.


뭔가 보상받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


이것이 예수님을 믿겠다고 덤벼든 사람들에게는 청천 벽력이죠.

그래서 이런 복음은 제거합니다.


편리하죠.

그래서 다윗의 삶을 끌어당깁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가 기름 부음왕 사울왕을 직접 죽이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다 그에게 축복을 내려주시지 않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6장9-10절을 보면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나옵니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음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때까지 하시려 나이가 하니”


이 말씀은 그냥 순교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령받은 성도의 삶의 모델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삶은 이러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이 땅에 살면서 성도는 이런 원한을 갖고 죽는 것입니다.

보상이라는 것은 주님의 심판만이 보상입니다.


주님께서 원수를 갚아주시기만을 기도할 따름입니다.


이것이 앞서 살펴본 로마서  12장 말씀과 일치하는 내용이 아닙니까?


왜 자꾸 주님께서 맡기라고 하시는고 하면 성도란 자신의 임의대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삶을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께서는 주님대신 예수님의 영이신데 성도를 항상 어떤 삶을 살게 하시는고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래서 붕어빵 찍어 내듯이 성도의 삶의 본질을 십자가의 길의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원수를 주님께서 친히 다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미리 앞당겨 보여준 인생이 바로 다윗입니다.


자신의 분대로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전하는 인생으로 삶을 사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우리는 본성상 남에게 지고는 못사는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기고 지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최종 심판자가 따로 계시다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었으면 합니다.

주님 언제 이 원수를 다 갚아 주시겠습니까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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